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90화 (190/621)

190화. 사면초가 (10)

천독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그의 관자놀이에 돋아난 힘줄이 뱀처럼 꿈틀댔다.

녹색 무복을 입은 천인천독대의 독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독인은 몸이 반대로 꺾인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어떤 독인은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천독은 독인의 아랫배를 유심히 봤다.

그의 예상대로 독인들의 아랫배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랬군.”

천독은 허탈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상대는 독인을 어찌 상대해야 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독인이 독을 다스리는 원리는 무엇일까?

신체가 독에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것에 앞서 내공으로 독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내공이 없다면?

즉, 신체가 녹아내렸다는 것은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

단전이 파괴된 독인은 자신이 쓰는 독도 다스리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피떡이 된 것이었다.

참담한 광경을 본 천독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들은 자신이 힘들여서 키운 독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천독의 칭호를 물려받을 촉망받는 인재도 있었다.

천독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불찰이라 생각했다.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하고 흑수대를 미끼로 썼건만, 돌아온 것은 흑수대와 천인천독대의 전멸이었다.

만약 자신 혼자 나섰다면?

미꾸라지 같은 놈도 못 잡았겠지만, 피해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것은 무력에서 진 것이 아니었다.

천독은 노기가 폭발한 듯 소리 질렀다.

“썩을!”

무력의 차이가 아닌 지략에서 진 것이기에 더 분한 것이었다.

완벽하게 옭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상어처럼 자신의 수하들을 찢어 놓았다.

천독은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독기를 방출했다.

독기(毒氣)인지 노기(怒氣)인지 모를 기세에, 주변의 풀들이 생명을 잃어 간다.

분노에 찬 천독이 진정한 독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디에도 한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독의 허리 부근의 흑색 검집을 잡았다.

독이 아닌 힘으로 한빈을 누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스르릉.

검을 뽑자 칠흑보다 어두운 분위기를 내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독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내 검은 독아(毒牙)라 한다! 세상의 빛을 흡수해서 독으로 만들지. 네가 사내라면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고 내 검에 당당히 맞서거라!”

천독의 도발에도 주변은 고요했다.

천독은 쓰러진 자신의 수하 사이를 누비며 한빈을 찾았다.

천독의 미간에 골짜기가 패였다.

그나마 헐떡이던 수하들마저도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이젠 수하 중에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없었다.

천독의 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놈!”

천독이 한 바퀴 돌며 기세를 뿜어낼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묘한 바람을 느꼈다.

한동안 느껴 보지 못한 불길한 느낌이 천독의 뇌를 자극했다.

천독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파박.

하지만, 묘한 소리가 천독의 귓전을 때렸다.

푹!

자리를 벗어나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녹색 무복을 입은 한빈이 웃고 있었다.

입에 호선을 그린 채 손에 단검을 들고 있는 한빈.

한빈의 모습을 본 천독은 지금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독 안개 속에서 독인을 해치우고, 옷까지 빼앗아 입고 죽은 척 누워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아무리 비겁하게 독을 쓰는 천독이었지만, 한빈의 얄팍한 행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천독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죄 없는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한빈이 웃으며 답하자 천독이 물었다.

“네가 정녕 무인이더냐?”

“나 무인 아닌데.”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천독이 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무인이 아니라……. 그럼 대체 뭐 하는 놈이라는 말이냐!”

“쓰레기 치우는 사람.”

“네놈이…….”

천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무인이냐?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 봐! 서른 명이 나 하나를 다구리 놓은 게 비겁한 건지, 아니면 서른 명의 무시무시한 독인을 상대로 살아남으려고 죽은 척하는 게 비겁한 건지.”

한빈이 턱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천독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서른 명이 하나를 죽이려고 달려든 것도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빈의 논리에는 가장 큰 허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빈이 독 안개가 자욱한 이곳을 누비며 천인천독대를 모두 섬멸할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자가 살아남기 위해 죽은 척했다고 하니, 천독의 입장에서는 황당했다.

천독은 너처럼 강한 놈이 할 말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천독은 잠시 한빈을 바라봤다.

‘잡을 수만 있다면…….’

진심이었다.

한빈이 무서운 것은 빠른 발과 독을 파훼하는 치밀함 때문이지, 그의 검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빈을 여기서 살려 보낸다면 분명 후환이 될 것이라 천독은 판단했다.

천독은 결심한 듯 외쳤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곳을 네놈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말을 마친 천독의 기세가 다시 변했다.

기세뿐이 아니었다.

천독의 백발이 점점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수리에서 내뿜는 독기 때문인지, 마치 삼화취정을 이루는 것처럼 머리 주변에 세 개의 자그마한 꽃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화경에 든 독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독화(毒花)!

자신의 경지를 완벽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피부까지 점점 녹색으로 변했다.

진정한 독인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천독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만독지체.

모든 공력을 독기로 바꾸는 것이다.

단전 속에 꿈틀대는 내공이 독의 성질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천독이 만독지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진이었다.

그것이 지금 그의 한계였다.

만약 한 시진이 지난다면?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한 시진이 아니라 단 일각만 지나도, 상대는 천독의 손에 녹아 핏물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조금씩 변하는 천독의 모습에 한빈이 월아를 뽑았다.

월아가 검신을 반쯤 드러내 놓았을 때였다.

한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음.”

낮게 깔리는 한빈의 침음성.

한빈의 눈에는 천독이 일으키는 외모의 변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지 그 변화와 함께 나타난 일렁이는 점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문제는 그 점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녹색 장포 속에 나타난 진청색 구결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뭐지?’

의문도 잠시, 새로운 나타난 구결을 얻게 되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쿵쿵.

한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빈은 지금 자신이 독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천독과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입맛을 다셨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길거리에 황금이 떨어져 있다면 먼저 줍는 놈이 임자가 아니던가?

한빈에게는 구결이 바로 황금이었다.

주인이 황금을 주머니에 다시 넣기 전에 취해야 했다.

한빈이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일촉즉발.’

‘쾌검난마.’

‘전광석화.’

월아와 하나가 된 한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천독의 앞에 나타났다.

천독은 한빈의 공격에 할 말을 잃었다.

만독지체로 신체를 바꾸는 과정에는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생사결이라 할지라도 일대일 승부 상황에서는 서로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상대가 초식을 준비하는 과정에 뛰어드는 것은 어찌 보면 무례에 가까웠다.

거기에 더해 천독이 피부로 뿜어내는 독기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방금 천인천독대가 뿜어내었던 독 연기와는 다른 차원의 독이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썩어 문드러질 독성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달려든다고?

지금 혈맥 곳곳에 담겨 있는 내공을 독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검을 뻗어 오는 검은 위협적이었다.

아직은 천독이 전환된 독기를 갈무리하지 못한 상태.

이것은 번개가 내리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간단했다.

검객이 누군가를 찌르고 그 상황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친다면?

그 누군가도 멀쩡하지 못하겠지만, 검을 든 검객의 몸도 과연 멀쩡하겠는가?

즉 지금 상황에서 천독은 찔린 상태에서 번개에 맞은 누군가.

한빈은 번개에 맞은 사람을 찌른 검객이었다.

필연적으로 동귀어진의 상황이 펼쳐질 것이었다.

천독은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따끔한 감각이 쇄골을 통해 뇌에 전달되었다.

최악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필이면 적의 검이 박힌 곳은 마혈이었다.

조금만 더 들어온다면, 마혈을 제압당해 꼼짝 못 할 것이었다.

그 후 일은 불 보듯 뻔했다.

독기가 주체를 못 하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예상대로 상대와 천독 둘 다 녹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천독은 이를 악물었다.

쇄골로 들어오는 검날을 움켜잡았다.

차라리 심장을 찔렀다면 독기로 튕겨 낼 수 있을지 몰랐다.

목을 찔렀어도 마찬가지였다.

화경의 고수가 와도 독기로 공격을 튕겨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허술한 부분을 찌른 것이었다.

‘과연 저놈은 내 약점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천독은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청연아!

하지만, 전음을 받은 청연은 머뭇거렸다.

흑수대가 전멸했다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잠시, 머뭇거리던 청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멀리서 대결을 지켜 보고 있던 설화는 말아쥔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한빈의 지시는 간단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실시하면 울타리 쪽에서 대기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 지시의 앞에는 절대라는 단어가 붙었다.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를 설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 대결에 끼어들면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저런 무지막지한 독을 감당할 능력이 설화에게는 없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독을 지니고 있는 천독과 맞서 싸우는 한빈의 무위에 설화는 놀라고 있었다.

한빈이 저 정도로 선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지금 한빈과 천독은, 손바닥을 맞대고 내공을 겨루는 고수처럼 서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을 상대의 쇄골에 꽂아 넣은 한빈과, 그 검날의 끝을 움켜쥔 천독 사이에는 검은색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건 혹시 독기?”

설화는 이를 악물었다.

끼어들고 싶지만, 자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한빈과 천독 쪽으로 걸어가는 청연의 모습을 본 설화는 자제력을 잃었다.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장대천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장대천이 아니라 그의 허리 부근에 매달린 검을 말이다.

“아저씨, 이것 좀 빌릴게요.”

“지금 뭐…….”

장대천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설화는 그의 허리에서 검을 낚아챘다.

휙.

“잠시만…….”

장대천이 말릴 틈도 없이 설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은 묘한 상황에 눈매를 좁혔다.

일촉즉발의 수법으로 월아를 상대에게 적중시켰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검을 상대의 쇄골에 박아 넣는 순간.

상대가 펼친 독기에 감전된 듯 몸이 굳었기 때문이다.

독기는 월아를 타고 한빈의 몸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때 허공에 용린검법의 비급이 나타났다.

동시에 기본편이 펼쳐졌다.

회복을 나타내는 속성인 복(復)의 구결도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빈은 기본편의 속성이 나타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급은 한빈의 몸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빈은 기본편의 속성을 유심히 보았다.

만일 복(復)의 속성이 모두 없어진다면 상대의 독에 녹아내릴 수도 있을 터.

그때에는 기사회생의 초식이라도 써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의 구결이 열 개로 줄어들었다.

한빈이 기사회생의 초식으로 시간을 벌어 볼까 했을 그때였다.

쇄골에 박힌 한빈의 검 끝에 남아 있는 진청색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구결이…….’

한빈은 이를 악물고 월아를 밀어 넣었다.

쓱.

순간, 기본편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글귀가 나타났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지급(地級) 구결 근(近)을 획득하셨습니다]

‘지급(地級)이라고?’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글귀가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