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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05화 (205/621)

205화. 경천동지(驚天動地) (6)

그 모습에 한빈이 검지로 흑선을 가리켰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알고 있지. 네가 천령지체라는 것도…….”

“…….”

흑선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혹시 점쟁이냐는 표정인 것 같았다.

그가 놀란 입을 다물기도 전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흑룡단주의 금제에서 벗어났다는 것도 말이야. 물론 너는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었겠지만.”

한빈의 입에서 나온 흑룡단주는 그의 기억에서 엿본 괴인의 이름이었다.

그를 납치해 금제를 걸고 꼭두각시처럼 부려 먹었던, 흑선의 적이며 보호자이자 주군인 놈의 이름.

물론 흑선의 모든 기억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에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흑선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흑선은 살짝 떨고 있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왜 나만 보면 그걸 묻는지 모르겠어.”

한빈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흑선이 물었다.

“호, 혹시 내게 금제를…….”

“비슷해.”

한빈이 씩 웃자 흑선이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의 머리에 심어진 구결을 몰아내려는 듯 상단전의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대신에 뒤쪽에 있는 월아를 틀어쥐었다.

흑선이 자신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다면, 근묵자흑이란 초식을 쓸모가 없었다.

대신 몰아내는 즉시 흑선을 다시 제압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흑선의 천령개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악!”

흑선이 땅이 울릴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워이, 워이. 진정해. 잘못하면 남은 공간마저 무너진다고.”

“…….”

흑선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한빈은 틀어쥐었던 월아를 다시 바닥에 놓았다.

그러고는 사람 좋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흑선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 말부터 하지,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흑룡단주라는 놈이 네게 금제를 걸었지. 너는 그걸 풀었고.”

“그렇다, 그런데 내게 자유를 주겠다는 말은 무엇이냐?”

흑선은 한빈의 진의를 살피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 눈빛은 조금 부담스럽고. 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해 주면 되는 거잖아. 그럼 너도 나를 해칠 필요 없고.”

“네가 그걸 어떻게…….”

“백선 맞지? 아미파의 백선.”

“…….”

흑선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놀란 건 알아. 일단 내 말부터 들어.”

흑선의 눈빛이 사그라들었다.

“말해 봐라.”

“흑룡단주가 건 금제도 푼 너야. 그런데 내가 건 금제는 왜 못 풀었을까?”

“…….”

“그거 하나만으로도 금제술의 위아래가 결정되었겠지?”

“그렇다면…….”

흑선은 말끝을 흐렸다.

반박하려 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말은 논리적으로 정확했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백선의 금제술을 풀어 줄 수 있어. 아니 풀지는 못해도 막아 줄 수는 있어.”

“막는다라?”

“기억을 찾아 주지는 못해도 너를 따르게 할 수는 있다는 말이지. 대신!”

한빈은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말에 흑선이 침을 삼켰다.

“꿀꺽.”

함부로 묻지 못하는 흑선.

하지만, 인내심이 다했는지 흑선의 입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흑선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조건이 뭐냐?”

“내 동료가 되어라.”

“동료라고? 하하.”

흑선이 허탈하게 웃었다.

한빈도 마주 웃었다.

“하하, 일단 편하게 웃어. 앞으로는 웃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내가 웃는 이유를 알겠나?”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강호를 벗어날 거야. 그런데 나한테 네 부하가 되라고?”

“복수하고 싶지 않나?”

“음.”

흑선이 침음을 삼켰다.

그것도 잠시, 흑선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황당하군!”

“뭐가 황당하다는 거지?”

“흑룡단주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누가? 네가?”

“물론 내가 도와주지.”

“이런 미친…….”

“불가능한가?”

“나한테도 버둥대던 네가 흑룡단주를 잡겠다고?”

“계속 말해 봐.”

“현 무림삼존에게 대들 자신이 있나?”

“무림삼존이라…….”

한빈은 조용히 무림삼존을 떠올렸다.

무림삼존이라고 하면, 세대에 따라 바뀌지만, 지금은 마교의 교주와 무당의 장문인 그리고 소림사의 일지대사를 일컬었다.

그들은 모두 무신으로 추앙받는 자들.

그들과 대등하게 비무를 펼칠 수 있는 자는 무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었다.

생각을 마친 한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림삼존을 꺾을 실력이 되면 흑룡단주에게 복수할 수 있는 건가?”

물론 지금 꺾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가능성을 가늠하려는 질문이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실력이 있어도 흑룡단주를 찾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

“흠.”

“우리가 납치된 곳, 다시 끌려간 곳. 그리고 일 년마다 만나는 회합 장소가 모두 달랐어.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계속해 봐.”

“그래, 계속하지. 무서운 것은 그는 우리가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야. 어떤 방법을 쓰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뭐, 방법이야 많지. 그래서 네 생각은 뭐지?”

“신경 끊고 흑룡단주의 눈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가 찾은 정답이었어.”

“너희가 있는 곳을 안다며. 그러면 또 찾아올 텐데?”

“저 멀리 해남이나 동이족이 사는 곳으로 가면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흑룡단주도 그리 한가한 새끼는 아니니까.”

뭔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이를 부득부득 가는 흑선이었다.

한빈은 그 모습에 기가 찼다.

저 정도로 증오한다면 복수라는 단어를 한 번쯤 생각할 만도 한데, 그는 도주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곧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억을 읽으며 흑룡단주에 대한 공포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정체 모를 적과 나라를 엮어 넣은 자신의 계획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한빈이 물었다,

“흑룡단주의 목적이 마를 멸하고 정파를 바로잡는 것인가?”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지? 참,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 당신에게 물어볼 말은 아니군.”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백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흑선의 모든 삶을 한 번에 머리에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흑선의 기억 중 중요한 것만 읽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흑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저 명분일 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군림천하지.”

“군림천하라? 내 경쟁자군.”

“…….”

흑선은 한빈을 보며 혀를 찼다.

마치 흑선은 너도 미치광이냐는 눈빛으로 한빈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읽은 한빈은 피식 웃었다.

사실 공허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한빈이 원하는 군림천하는 세상에 적수가 없는 상태였다.

세상에 시비 거는 자가 없는 천하제일인.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절대자.

수하를 잃지 않을 만한 권력을 가진 존재.

그것이 한빈이 나아갈 길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구결을 모으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세상을 구하고 강호를 구한다?

그런 낭만 따위는 한빈에게 없었다.

만약 세상을 구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빈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할 때였다.

한빈이 그런 성인이 될 일은 없었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흑선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이번에는 잘못 짚었군.”

상단전이 개방된 고수답게 한빈의 표정에서 진의를 파악한 것이다.

한빈과 흑선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빈이 적에게 얼마나 노출되어 있냐는 점이었다.

한빈은 이 부분에서는 조금 안심했다.

그들은 한빈을 주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과 계속 부딪힌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황보세가에서 죽였던 괴인도 팔선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몇 가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흑룡단주에게 지시를 받아 모두를 통솔하는 것은 지선(智仙)이라는 동료라고 했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무림세가와 거대문파의 장악이었다.

그 부분에서 한빈은 지선과 흑룡단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한빈도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하수인을 심어 문파를 장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한빈은 흑선에게 물었다.

“그럼 지선의 행방은?”

“정확히는 모른다. 내 예상으로는……. 위씨세가 혹은 제갈세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호.”

한빈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흑선이 물었다.

“왜 그러지?”

“별일은 아니고 위씨세가에는 전에 빚이 조금 남아 있어서.”

한빈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전생의 빚이었다.

흑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도 뭐 하나만 묻지.”

“말해 봐. 이 정도로 성실히 답해 줬으니, 나도 네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게 맞지.”

이것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사실 어떤 질문에 답하든 상관이 없었다.

한빈이 그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구결을 바로 독(毒)이기 때문이다.

한빈을 해치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머리부터 썩어 들어갈 것이었다.

그의 기구한 인생에 양념 한 숟가락을 더 퍼 넣은 느낌 때문에 찝찝하긴 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흑선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빈도 간단히 답했다.

“하북팽가의 막내.”

“헉!”

비명이 튀어나왔다.

제법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비명이었다.

한빈은 모른 척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말을 마친 흑선은 한빈을 훑어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너를 놀리겠어? 이런 석관을 생각나게 만드는 공간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굳이 너를 놀릴 이유는 없지.”

한빈이 턱짓하며 주위를 가리켰다.

다른 이라면 이런 밀폐된 공간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까무러칠 텐데, 흑선의 관심은 오직 한빈에게만 향했다.

흑선이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나한테 펼쳤던 검법이 하북팽가의 무공인가? 하북팽가에 언제부터 너 같은 검객이 있었지? 적어도 화경의 초입 수준인데……. 그 정도의 검객이 하북, 아니 강호에 나왔는데 이렇게 조용하다고?”

흑선은 놀랐는지, 다람쥐 도토리 까듯 빠르게 질문을 쏟아 냈다.

한빈은 잠시 틈을 두었다.

계속 대답을 해 봤자 상대가 못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상단전에 개방된 인물.

천천히 얘기하다 보면 이해를 할 터였다.

다만, 지금은 흥분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둔 한빈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북팽가의 무공은 아니지만, 하북팽가의 막내는 맞아.”

“하하.”

흑선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것도 잠시 그가 다시 물었다.

“하나만 더 묻지. 네가 던진 그 마지막 암기는 태극혜검의 묘리를 담고 있었나? 혹시 무당의 제자인가?”

“무당산 근처에도 가 보지 않은 내가 무당의 제자일 리가 없지.”

물로 이것은 거짓이었다.

전생에는 제법 많이 들른 곳이 무당과 화산이었으니 말이다.

흑선은 또 질문이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순간 한빈의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그 모습에 흑선이 숨을 멈췄다.

“흡.”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청강석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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