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뜻밖의 보상 (5)
한빈은 팽강위의 눈빛을 담담히 받았다.
“네, 맞습니다.”
“…….”
팽강위는 답하지 않고 한빈의 눈을 바라봤다.
진심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한빈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팽강위의 입에서 작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흠.”
그는 한빈이 혼원벽력도를 요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소가주 후보라면 응당 가르쳐 주어야 할 도법이 혼원벽력도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흘러나오던 침음을 지운 팽강위가 말했다.
“한빈아, 현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혼원벽력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팽강위를 바라봤다.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안다고 표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조용히 듣고 있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팽강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건 모르겠지. 그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새겨듣거라.”
“네,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팽가의 기본 도법도 익히지 않은 네가 과연 상승 도법을 익힐 수 있냐는 문제이다. 네가 어떤 스승을 만나 검법을 전수받았는지는 이제까지 묻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문이 가르쳐 준 검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문의 절기를 가르쳐 달라는 하니, 네 검술의 기본을 물어봐야겠구나.”
“…….”
한빈은 말없이 가주 팽강위를 바라봤다.
팽강위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가문의 무공을 가르쳐 주려면 한빈의 무공에 어떤 근본이 깔려 있는지를 알아야 할 터였다.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용린을 먹고 세월을 거슬러 왔다고는 할 수 없는 일.
한빈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짜 놓은 것이었다.
“제가 처음 검법을 배운 것은 지나가던 어떤 고인에게서입니다. 그 고인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빈은 살짝 말끝을 흐리며 팽강위의 눈치를 봤다.
팽강위가 흥미가 동한 듯 상체를 기울이고 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노인이 가르쳐 준 것은 기본적인 검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빈은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팽강위가 술병을 다 비울 동안, 한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팽강위의 옆에 술병이 점점 쌓여 갔다.
그에게 한빈의 입담은 훌륭한 안줏거리였다.
한빈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쉴 틈 없이 설명을 쏟아 냈다.
급기야는 팽강위가 입을 벌렸다.
한빈의 설명은 생각보다 세세했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어떤 노인이 검법을 가르쳐 주고 나머지는 세상에 나가 배우라고 길을 열어 줬다는 것이었다.
홍칠개를 사부로 모신 이야기도 털어놨다.
한빈은 지금 공손수에게 무영수를 배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이야기.
뭐, 한빈도 거짓을 섞으려 해서 섞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팽강위와 팽혁빈이 보여 준 모습으로 인해 한빈도 마음을 연 상태.
가족에게는 최대한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못 했던 말들…….
그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드디어 한빈이 말을 멈추고 술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인 한빈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는 잘 들었다. 네가 말한 기연에는 팽가의 무공은 전혀 섞이지 않았구나.”
“네,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어떻게 말입니까?”
“혼원벽력도를 익히기 위해서는 세 가지 무공을 먼저 익혀야 한다.”
“혼원보(混元步)는 당연할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 무공은 어떤 것입니까?”
“혼원장(混元掌)과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다.”
“혼원보와 혼원장, 오호단문도를 익히면 혼원벽력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혼원보 하나를 익히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으냐?”
“칼을 쥐는 법은 한나절이요, 걸음마는 일 년이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첫째 혁빈이가 혼원보를 익히는 데 걸렸던 시간이 오 년이요, 혼원장을 익히는 데에는 일 년이 걸렸다. 그리고 오호단문도를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었다. 네가 혼원보를 다 익힐 때쯤이면 나머지 두 무공도 몸에 배어 있겠지. 그렇지 않느냐?”
“그럼 세 가지 무공을 익힌 후 아버님을 찾아오면 되는 겁니까?”
“흠.”
“왜 그러십니까?”
“이쯤 해서 내가 해 둘 이야기가 하나 있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르쳐 줄 혼원벽력도는 반쪽짜리다.”
“아, 그렇군요.”
“왠지 놀란 표정이 아니구나.”
“아니, 충분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왜 반쪽이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후반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저는 현재의 혼원벽력도면 충분합니다.”
“알았다. 내가 말한 세 가지 무공을 익히고 나면, 언제든 반쪽짜리 혼원벽력도를 가르쳐 주마.”
말을 마친 팽강위는 활짝 열린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구름이 달빛을 가린 것이, 팽강위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가주전을 나왔다.
가주전을 나오기 전, 한빈은 맹호비고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한빈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혼원장을 비롯한 세 가지 무공을 자유롭게 익히라는 팽강위의 배려였다.
이번에는 오 층까지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가주전에서 나온 한빈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빈은 팽강위와는 다르게 얼핏 비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이 언제까지 달빛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바람이 불면 구름도 걷히는 법이 아니던가.
혼원벽력도를 전수받기 원한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적혈맹호대뿐 아니라 하북팽가 전체의 전력에도 신경 써야 할 때라 생각한 것이다.
혼원벽력도가 반쪽짜리가 된 것은 한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전생의 기억.
전생의 기억으로는 많은 세가들이 가문의 비기를 잃었었다.
하지만, 한빈이 과거로 돌아오며 그중 몇 가지 역사는 바뀌었다.
하남정가에 파혼검을 찾아 주었고, 공손세가에 잃어버린 무공인 무영수를 찾아 주었다.
하북팽가의 혼원벽력도의 반쪽도 잘하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필요 없었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필요해졌으니 반쪽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면 남은 반쪽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다.
* * *
가주전을 나와서 맹호 비고로 향하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서 친근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빈이 앞쪽을 향해 외쳤다.
“형님, 그만 나오시죠!”
“허허, 눈치챘구나.”
장난스럽게 상의를 툭툭 털며 걸어오는 팽혁빈.
왠지 오늘따라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형님.”
“사실 아까 아버님과 나눈 대화를 다 들었다.”
팽혁빈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팽혁빈이 엿듣고 있던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의도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르는 척 대화를 한 것이었다.
사실, 팽강위에게 한 말은 팽혁빈도 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가주에게 한 이야기가 아닌, 가족에게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떼를 쓰는 것도 보셨겠군요.”
“떼라니, 당치 않다. 소가주 후보가 되었으니 혼원벽력도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한 게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살짝 말끝을 흐리는 팽혁빈을 본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편히 말씀하시지요.”
“내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가르쳐 주다니요?”
“혼원벽력도를 배우기 전에 익혀야 하는 세 가지 무공 말이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기다리신 겁니까?”
“하하, 내가 해 줄 것이 그거 말고는 없더구나.”
팽혁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한빈도 마주 웃었다.
“하하, 형님이 가르쳐 주신다면 저는 좋습니다. 언제부터 할까요?”
“준비되면 찾아오너라.”
“지금부터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지. 일단 자리를 옮기자.”
팽혁빈이 앞장섰다.
그 뒤를 한빈이 천천히 쫓았다.
두 사내를 달빛이 비췄다.
기울어진 달만큼 그림자도 유난히 길어 보였다.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힌 것이다.
팽혁빈을 따라가던 한빈은 생각했다.
진짜 선물은 황제가 내린 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최고의 선물은 가족일 것이었다.
* * *
잠시 후, 연무장 주변에 풀잎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사-삭. 사사-삭.
한빈은 지금 혼원보를 시전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막내 한빈의 경공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한빈의 보법은 자리가 잡혀 있었다.
문제는 혼원보를 가르쳐 주었는데도 방향이나 간격은 맞지만, 그 안에 내포한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참을 보던 팽혁빈이 손뼉을 쳤다.
짝짝!
동시에 한빈은 펼치던 혼원보를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오늘은 이쯤 해야겠구나.”
“그만하다니요?”
“네 혼원보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치명적인 문제라면…….”
“네 보법에는 운치가 있다.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걷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구나.”
“…….”
“그런데, 혼원보의 성격은 중(重)이다. 네가 펼치는 보법은 경(輕)을 중시하는구나.”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말을 마친 한빈은 내공을 실어 혼원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탁. 탁.
한빈은 청강석으로 된 연무장에 발자국이 찍힐 듯 보법을 펼쳤다.
팽혁빈이 다시 손뼉을 쳤다.
짝짝!
한빈이 걸음을 멈추고 팽혁빈을 바라봤다.
팽혁빈은 빙긋 웃으며 한빈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를 토닥였다.
“인위적인 무거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무거움이 핵심이다. 그런데 너와 내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가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가요?”
“네가 혼원보를 막 익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듯, 혼원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 년. 아무리 기재라도 삼 년 안에 익힌 적은 없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팽혁빈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네 솜씨가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
“아무래도 지금 비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무리겠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팽혁빈.
한빈은 그 모습에 웃었다.
팽혁빈이 걱정될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뭐, 얼마 전이라면 처소로 돌아가 곯아떨어져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심화편을 개화한 상태.
운기를 하지 않더라도 피부가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탁기를 내뿜는 상태였다.
그 양이 미미하지만, 쉬지 않고 운기한 덕분인지 웬만한 움직임으로는 피로가 쌓이지 않은 상태였다.
한빈은 기분 좋게 연무장 옆에 놓인 수련용 목검을 잡았다.
형제간의 사심 없는 비무라?
한빈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쿵. 쿵.
한빈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비무를 즐긴다는 것은 팽가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탁. 탁.
수련용 목검과 목도가 달빛이 흐르는 연무장을 수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