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강 건너 불구경 (7)
한빈이 낸 상처를 통해서 나오는 검은 액체는 기괴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꿀렁이고 있었다.
청화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네, 공자님.”
대답을 마친 청화가 재빨리 그 상처를 지혈하듯 움켜잡았다.
다른 이라면 놀라 벌벌 떨었겠지만, 청화는 어릴 적부터 많은 독을 경험하며 자란 독인이었다.
혈고가 살아 있다는 독충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눈에는 귀여운 벌레에 불과했다.
게다가 공독지체라는 체질은 혈고를 보며 입맛까지 다시게 만들었다.
한빈은 팔목을 쥔 상태에서 상황을 살폈다.
팽혁빈의 상태뿐 아니라 청화의 상태도 세심하게 살폈다.
역시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팽혁빈의 몸에서 나온 혈고가 청화의 손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청화의 얼굴색이 점점 생기를 찾았다.
공독지체가 된 청화의 상태는 지금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다.
청화는 우유 대신 독을 양분 삼아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넘실거리며 청화의 손에 빨려 들어가던 혈고가 통제를 벗어났고, 혈고는 팽혁빈의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혈고가 피부를 감싸자, 팽혁빈의 팔은 점점 검은색으로 변했다.
한빈은 그 모습에 혈고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빼내는 데 성공해도 바로 처리를 못 한다면 피부를 썩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팽혁빈의 오른팔은 잘라 내야 할 터였다.
한빈은 재빨리 진기를 보내 혈고를 끌어당겼다.
순간 혈고들이 팽혁빈의 손목을 타고 다시 한빈에게 들어왔다.
동시에 한빈의 시야에 글귀가 나타났다.
[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 만독지체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물론 말만 만독지체에 다가섰다는 것은 아니었다.
[독(毒) : 삼십(三十)]
독의 구결도 추가되어 삼십 개가 되었다.
비급이 나타내는 글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황이 끝났다는 것.
남은 것은 우혈랑검으로 끊어 놨던 팽혁빈의 손목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기사회생을 썼다.
동시에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고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청화가 시선을 한빈에게 돌렸다.
마치 신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는 청화.
청화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한빈에게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느냐?”
“공자님은 신선이십니까?”
“…….”
한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청화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오해의 정도가 심각한 것 같았다.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청화야.”
“네, 공자님.”
“이상한 오해는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설화에게 잘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청화야.”
“네. 명심할게요, 공자님.”
한빈의 말에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신선이 아니라 생불이셨어.’
정신이 들고 가장 궁금했던 것이 한빈의 정체였다.
그때 설화는 이렇게 말했다.
마을 사람 중에 몇몇은 한빈을 생불로 부른다고 말이다.
치료를 마친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심호흡한 한빈은 팽혁빈의 상태를 살폈다.
치료 전과 마찬가지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혈맥의 외관에 붙어 있는 혈고라는 놈은 일부분 제거됐지만, 겉으로는 전과 다름없었다.
이제 혈도만 풀면 잠에서 깨어날 것이었다.
팽혁빈의 상태를 확인한 한빈은 이번에는 청화를 바라봤다.
청화의 얼굴에는 살짝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오늘의 치료를 복기했다.
의원은 아니지만, 자신의 진기와 공독지체를 가진 청화를 이용해 팽혁빈을 치료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물론 완벽한 치료는 아니었다.
제거된 혈고는 정확히 삼 분의 일.
완벽한 공독지체는 아니었기에 하루에 흡수할 수 있는 독의 양이 정해진 것이었다.
밥도 무한정 먹을 수는 없는 법이 아니던가.
청화가 흡수하는 독의 양도 비슷했다.
시간이 문제지, 치료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팽혁빈은 완벽해질 터였다.
* * *
이틀 뒤 한빈의 처소.
팽혁빈이 계속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틀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오늘은 한빈이 말한 마지막 날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잠이 들었다.
툭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치료가 끝나고 한빈이 수혈을 푼 것 같았다.
눈을 뜨자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빈의 모습이 보였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래, 한숨 푹 잔 것 같구나.”
“푹 쉬셨으니 비무 한 판 어떻습니까?”
“하하, 막내야!”
팽혁빈이 호탕하게 웃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싫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보니 네가 가장 팽가다운 기개를 지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죠? 형님.”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방심하는 법이 없다고 하지 않느냐? 네 마음가짐이 호랑이 같다는 말이다.”
“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와 함께 설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화는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한빈에게 건넸다.
가죽 주머니를 받은 한빈은 설화에게 우혈랑검을 건넸다.
“잘 썼다, 설화야.”
“헤헤, 원래 공자님이 주신 건데요. 저는 청화랑 나가 볼게요.”
말을 마친 설화는 청화를 향해 눈짓했다.
설화의 신호를 받은 청화는 가볍게 포권한 뒤 돌아섰다.
그때 한빈이 그녀를 불렀다.
“청화야.”
“네, 공자님.”
“포권은 생략해도 된다. 너희들은 무인이 아니잖아.”
지시가 아닌 조언이었다.
청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장운현을 떠난 후 청화가 보인 첫 번째 미소였다.
옆에 있던 설화가 기분 좋은지 청화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기분도 좋은데 당과 한 꼬치 어때?”
“좋아요, 언니.”
그들이 사이좋게 나가자,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화에게 받은 가죽 주머니를 팽혁빈에게 건넸다.
그는 반사적으로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그것도 잠시,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가죽 주머니의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붉은색을 띤 환약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란 팽혁빈이 물었다.
“이건 혹시 영약…….”
“영약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것은 가죽 주머니에 담긴 붉은색 환약의 용도에 대한 것이었다.
한빈의 설명을 듣던 팽혁빈은 눈을 크게 떴다.
* * *
한빈과 팽혁빈은 다시 연무장에 마주 섰다.
팽혁빈은 신체의 변화를 못 느끼고 있었다.
조금 개운하다는 느낌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팽혁빈은 소매로 얼굴의 먼지를 털어 내는 척하며 붉은색 환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한빈을 향해 외쳤다.
“자, 오늘도 놀아 보자꾸나, 아우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형님.”
한빈이 목검을 잡고 기수식을 취했다.
한빈의 목검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인다.
팽혁빈의 눈이 커졌다.
목검의 표면을 기막으로 감싼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공을 조절하는 능력이 문제였다.
목검의 표면을 감싸고 있던 내공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아마도 목검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었다.
그런데 목검을 저렇게 다룬다고?
그만큼 내공을 조절하는 능력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목검에 기막을 유지하는 것이 간단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법을 밟으며 초식을 펼치고 상대의 공격까지 방어해야 한다.
그 순간에도 내공을 제어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것인데…….
한빈을 바라보던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걱정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한빈이 천재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그렇게 확인하고도 다시 의심한다니?
생각을 마친 팽혁빈도 자신의 목도에 기를 불어 넣었다.
스스-슥.
팽혁빈이 뿜어내는 진기가 그의 목도를 감쌌다.
순간 팽혁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 정도의 진기를 사용하고 나면 혈맥에 무리가 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빈의 말대로 치료가 된 것이었다.
팽혁빈은 목도를 감싼 기막을 조금 더 두텁게 조절했다.
그도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빈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앞서 말한 최선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비무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치료에 부작용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팽혁빈의 몸에서 지금 일렁이는 구결 때문이었다.
한빈이 혼원보를 펼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기세.
그 기세를 본 팽혁빈도 똑같은 혼원보를 펼쳤다.
“간다, 아우야!”
그 말을 시작으로 팽혁빈의 기세가 태산처럼 넓게 연무장을 장악했다.
이것은 한빈이 바라던 비무였다.
쾅! 쾅!
수련용 목검과 목도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굉음이 연무장을 중심으로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과 팽혁빈은 서로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팽혁빈이 아니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수(隨)를 획득하셨습니다]
이제 하나 남은 인급 구결.
한빈은 이 구결을 오늘 완성하기로 했다.
앞으로 필요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팽혁빈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멀쩡하니 언제든 다시 시작해도 좋다.”
“그럼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한빈이 보법을 바꾸었다.
구걸십팔보로 말이다.
한빈의 신형이 잔상만을 남긴 채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빈이 나타난 곳은 팽혁빈의 오른쪽.
팽혁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바로 진각을 밟았다.
모든 내공을 실은 혼원보.
그것은 한빈이 서 있는 공간을 장악했다.
한빈은 재빨리 발을 빼서 그 간격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마치 장기를 두듯 한 수씩을 주고받으며 칼을 맞댔다.
비록 무기는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지만, 그들의 눈빛에 살기를 없었다.
한빈이 외쳤다.
“마지막입니다!”
“그래, 오너라.”
팡. 팡.
둘이 동시에 파공성을 내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팽혁빈의 칼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한빈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한빈은 머리만 가볍게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고는 검을 뻗었다.
팍! 팍!
동시에 울리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
방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벗어 버리고 순수한 공격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몸에 무기를 갖다 댄 채 멈췄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한빈과 팽혁빈의 내공 조절 능력이었다.
둘은 서로의 몸에 닿기 전에 무기를 감싸고 있던 기막을 지워 버린 것이다.
마지막의 순간에 동시에 기막을 지웠다는 것은?
눈이 상상도 못 할 만큼 빠르든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뭐, 둘 다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둘은 그 상태로 그윽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한빈도 이번에는 글귀보다 팽혁빈의 미소를 먼저 확인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구결을 확인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창(唱)을 획득하셨습니다]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한빈이 나머지 글귀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거친 숨을 토하던 팽혁빈이 기침했다.
“쿨럭.”
기침한 팽혁빈이 목도를 내렸다.
한빈도 목도를 내리고 팽혁빈을 부축했다.
팽혁빈이 다시 기침을 했다.
“쿨럭.”
이번 기침에는 붉은 핏덩이가 섞여 나왔다.
누가 봐도 이전보다 증세가 심해졌다.
“형님, 일단 처소로 돌아가시죠.”
한빈은 팽혁빈을 부축하며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한빈의 부축을 받아 처소로 향하던 팽혁빈이 주위를 둘러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더냐?”
“네, 해야 합니다. 형님은 이제 가문의 비밀 무기가 된 거죠.”
“비밀 무기라…….”
팽혁빈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그에게 전한 붉은 환약은 가짜 피였다.
씹으면 터지는 환약을 이번에는 두 개나 터뜨렸다.
증세가 심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자는 한빈의 말 때문이었다.
팽혁빈은 진심으로 한빈의 의도가 궁금했다.
처소에 도착하자 달싹이던 팽혁빈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