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천수장 (5)
한빈의 눈빛을 본 황보만청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을 모른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한빈이 웬만한 일에 속을 보일 인간이 아니었다.
얼마 전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도 저런 표정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자신과 가문을 구하고 나서 보상을 준다고 했을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한빈이 자신을 보고 놀란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것도 잠시 황보만청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한빈이 황보만청, 자신의 성취에 놀라고 있다고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기세를 피워 내며 다가온 것에는 한빈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황보만청은 한빈과 헤어지고 작은 성취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작은 성취라 겸손하게 말하지만, 사실 작은 성취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놀라나? 자네답지 않게.”
황보만청이 모른 척 입꼬리를 올라자, 한빈이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빈의 말에 황보만청은 못 참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혹시, 내 성취에 놀라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어르신의 성취에도 조금 놀랐습니다.”
한빈이 마지못해 답했다.
“조금이라…….”
황보만청이 삐진 듯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제가 말한 조금은 태산입니다.”
“하하, 태산이라? 자네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그런데 하북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어르신.”
“상의할 일이 있어서 자네 존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네.”
“아버님을요?”
질문을 던진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아무래도 강북 오대세가 사이에 전서구가 오간 듯싶었다.
황보만청이 한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본래는 하북팽가로 가던 길이었네만은…….”
“그럼 이쪽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자네한테 먼저 들르는 게 이치에 맞을 것 같아서 방향을 바꾸었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다니요?”
“자네를 먼저 보는 게 왜 이치에 맞다고 했는지 말이네.”
“뭐, 그야…….”
한빈은 쓱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웃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세.”
“지금 저와 스무고개를 하기 위해 여기에 오신 건 아니시죠? 어르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걸세.”
황보만청이 자신의 등 뒤에 짊어진 짐을 보여 줬다.
등 쪽에 있는 짐을 업어치기 하듯 돌려서 내려놓는 황보만청.
거대한 돌덩이처럼 보이는 짐을 황보세가부터 짊어지고 왔다라?
조금은 의아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려 꽂으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 꽂히는 짐을 본 한빈의 눈이 커졌다.
바위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현철로 만든 네모난 덩어리였다.
다듬은 현철의 앞면에는 제법 많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바둑판이 분명했다.
그냥 바둑판이 아니라 현철로 만든 거대한 바둑판.
황보만청이 내려놓은 바둑판에 한빈이 놀라고 있을 때였다.
어찌나 세게 내려놓았는지, 먼지바람이 몰려왔다.
휘휙!
쾅.
한빈의 뒤에 있던 설화와 청화도 강풍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순간 청화의 머리 위에서 뭔가가 날아갔다.
휘릭.
순간 청화의 머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천독에게 당한 상처는 완벽히 치료했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여서 까까머리로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청화가 여자아이라는 점이었다.
청화는 까까머리를 받아들일 수 없어 했다.
설화도 한빈을 설득했다.
시녀가 까까머리면 주군인 한빈도 주지승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고민하던 한빈은 그녀에게 가발을 선물했다.
한빈이 변장 용도로 쓰는 수많은 가발 중에 가장 실한 놈으로 골라 주었다.
청화도 그걸 아는지, 가발을 애지중지 아껴서 써 왔다.
그녀에게 가발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 가발이 바람에 날아간 것이었다.
어이없는 상태에 한빈마저 살짝 입을 벌렸다.
가발은 바람을 타고 새처럼 점점 멀어져 갔다.
사태를 수습한 것은 설화였다.
설화가 바람에 몸을 싣고 허공으로 날았다.
휘릭.
하지만, 점점 멀어지는 가발.
펄럭.
설화가 허공을 박차고 속도를 높였다.
손을 뻗은 설화가 겨우 가발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탁.
설화는 재빨리 제자리에 돌아와 청화에게 가발을 다시 씌워 줬다.
청화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먼지 반 눈물 반이었다.
설화는 매섭게 황보만청을 쏘아봤다.
일개 시녀가 한 가문의 가주를 쏘아본다라?
어찌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보만청도 설화가 보통 시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헛기침으로 답했다.
“흠.”
“왜, 그러셨어요?”
“아니, 내가…….”
황보만청은 말끝을 흐렸다.
설화뿐 아니라 한빈까지 곱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실수하셨습니다. 어르신.”
“…….”
뭐, 황보만청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한빈의 새로운 시녀가 가발을 쓴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황보만청은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재빨리 품 안을 뒤졌다.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한빈을 지나 청화에게 다가갔다.
황보만청은 청화에게 말했다.
“이건 사과의 의미이니, 받아 두거라.”
황보만청이 내민 손끝이 유난히 반짝였다.
어찌나 반짝이는지 설화의 눈도 반짝였다.
황보만청이 검지와 엄지로 잡고 있는 것은 금화였다.
하지만, 청화는 금화를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청화 대신 손을 내밀었다.
황보만청이 금화를 건네려 할 때였다.
손을 내밀던 설화가 뭔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췄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받아도 괜찮아. 요즘 어르신의 전낭에는 돈이 마를 날이 없으니까.”
한빈의 말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그게 아니라요…….”
“그럼 안 받는 이유가 대체 뭐지? ”
“아까 품 안에서 분명히 금화 두 닢을 꺼내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한 닢밖에 없어서요.”
설화의 말에 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웁.”
그 웃음에 황보만청이 물었다.
“왜 그러나?”
“어르신, 들키셨습니다. 그냥 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흠, 들키다니?”
“처음에 빼실 때 실수로 두 닢을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두 닢은 너무 많다 생각하시고 감추신 거 아닙니까?”
한빈이 씩 웃으며 금화를 잡은 손을 가리켰다.
검지와 엄지는 금화를 잡고 있었지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손바닥에 딱 붙이고 있었다.
황보만청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내 수법을 알아냈으니, 이것도 받거라.”
그가 손가락을 마저 펴자 그곳에서는 금화 한 닢이 더 나왔다.
설화는 그제야 손을 벌렸다.
금화 두 닢을 챙긴 설화는 청화를 쓰다듬었다.
“청화야, 고생했어.”
“원래 이렇게 돈 벌기가 쉬운 거예요?”
“때에 따라서는…….”
“언제든 준비하고 있을게요.”
청화는 비장한 각오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환하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황보만청이 뭔가 생각났는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문의 금나수가 이렇게 쉽게 간파당하다니 아직도 멀었군, 멀었어…….”
금나수란 손가락을 쓰는 조법의 일종으로, 소위 말해 낚아채는 기술이다.
황보만청의 한숨이 잦아들기도 전에 한빈이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어르신.”
“보면 모르나? 바둑판이지.”
“저도 눈이 있기에 바둑판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바둑판을 짊어지고 다니시는 게 이해가 안 가서 그럽니다, 어르신.”
“이건 내가 이번 깨달음을 통해 얻은 내 애병(愛兵)이라네.”
“애병이요?”
“그렇다네. 자네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검이 아니라 바둑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러니까…….”
황보만청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볍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이야기에 한빈의 눈이 점점 커졌다.
황보만청이 쓰던 병기는 검.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신의 병기를 바꾼다?
문제는 무공까지 새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분명 느껴지는 기세는 전과 달라졌다.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초식을 만드는 일은 차원이 다른 분야였다.
그가 잠시 말을 끊자 한빈이 물었다.
“무공을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허허, 그건 아닐세.”
“그럼 대체…….”
“자네와 대국을 두던 바둑판에서 발견했네,”
“대국을 두던 바둑판이라면, 비동 속의 방 말입니까?”
“자네가 돌아가고 나는 그 방을 샅샅이 뒤져 봤다네. 한 며칠을 뒤지다 보니 거기에서 정체불명의 기보 하나를 발견했네.”
“그럼 그 기보 덕분에…….”
“그 기보대로 방에 돌을 놓다 보니 비급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지.”
“아.”
한빈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황보만청이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어떤가?”
황보만청은 한빈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새로운 무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한빈도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진청색 점은 아직도 일렁이고 있었다.
“좋습니다.”
한빈이 기분 좋게 답했다.
설화는 재빨리 청화를 데리고 뒷걸음쳤다.
몇 걸음 물러난 청화가 물었다.
“이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야. 조금은 더 가야지 안전해.”
“…….”
“조금 격렬한 비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방금 들었거든.”
말을 마친 설화는 청화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오십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깨끗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설화는 짐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뭘 그렇게 찾아요, 언니?”
“아, 찾았다.”
설화가 꺼낸 것은 붓을 말아 놓은 것처럼 길쭉하게 포장한 물건이었다.
청화가 물었다.
“붓이에요? 기름종이에 싸 놓은 것을 보면 귀한 건가 봐요, 언니.”
“…….”
설화는 말없이 조심스럽게 기름종이를 벗겨 냈다.
턱을 괴며 설화를 보던 청화가 입을 벌렸다.
“앗, 당과네요!”
“그래, 비무 구경에는 당과가 최고지.”
멀리서 기수식을 취하던 한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설화와 청화의 대화가 들린 것이다.
황보만청이 말했다.
“어린아이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니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 좋네. 하하. 왠지 오늘 비무는 내가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빈이 재빨리 황보만청을 향해 날았다.
‘일촉즉발.’
가볍게 황보만청의 새로운 무공을 파악하려는 동작이었다.
황보만청은 한빈의 검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앞으로 뛰어나왔다.
덕분에 둘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졌다.
황보만청이 외쳤다.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초식일세!”
말을 마친 황보만청이 현철로 된 바둑판을 앞으로 쓱 내밀었다.
눈앞으로 다가온 황보만청의 바둑판에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황보만청이 갑자기 바둑판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묘한 것은 바둑판 뒷면에도 똑같이 선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바둑판에 찍혀 있는 점, 즉, 귀, 변, 천원에 찍혀 있는 점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빈은 재빨리 동작을 멈추고 월아를 바닥에 찍었다.
하지만, 계속 다가오는 바둑판,
그 바둑판의 중앙의 점, 즉 천원에서 뭔가가 툭 튀어나왔다.
그것은 검신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왼손을 내밀었다.
‘진룡파혼장.’
한빈의 힘이 황보만청의 공격을 허공에서 격파했다.
팡.
동시에 천원에서 튀어나온 검신이 스르륵 들어갔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각각 세 걸음씩 물러났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는 진청색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색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무력에 따라서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바뀌는 것은 당연할 일.
혹시 천급?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