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천수장 (6)
진청색이 아닌 노란색의 점.
일렁이지만 않는다면, 염료가 묻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선명했다.
한빈은 심호흡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호기심이 머릿속을 채우지만, 우선은 이 비무에서 저 구결을 얻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 상태로는 구결을 얻어 내는 것은 상당히 힘들 것 같았다.
첫수만 교환했지만, 상황은 분명했다.
황보만청의 바둑판에 묘하게 검이 꼬이는 상황이다.
묘한 무기에 처음 보는 초식.
거기에 더해 상대에게 상처도 입히면 안 되었다.
아무리 구결이 소중해도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만청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한빈이 머뭇거리자 황보만청이 물었다.
“용케 피했군. 그런데 자네의 지금 초식은 대체 뭔가?”
“…….”
용린검법의 초식을 말해 줄 수는 없는 일.
한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피식 웃었다.
“오호, 이번에도 비밀인 모양이군.”
말을 마친 황보만청은 잠시 바둑판을 내려놓았다.
한빈은 몇 가지 단어를 떠올린 후 입을 열었다.
“입계의완(入界宜緩)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초식의 본래 이름 대신 바둑의 위기십결의 하나를 대신 말한 것이었다.
바둑에 임하는 요령인 위기십결 중 입계의완이란, 상대의 세력에 뛰어들 때는 완만하게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제법 그럴듯하군. 그런데 계속하겠는가? 표정을 보니 당황한 것 같네만.”
“검을 쓰시던 어르신이 바둑판을 들고 계시니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뭐, 호기심 때문이라도 끝까지 가야겠네요.”
“오호, 역시 자네야.”
“그럼 이번에는 어르신이 오시죠.”
“그럼 가겠네.”
황보만청이 한빈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가 든 거대한 병기 때문인지, 한빈의 귓가에 파공성이 들려왔다.
팡!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병기의 면적이 문제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보만청의 속도가 한빈의 검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빈은 이 문제를 쾌(快)와 중(重)을 섞어 해결하기로 했다.
빠름과 무거움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한빈에게는 가능했다.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는 빠름의 초식이었으며, 응용편에는 한빈의 초식 중 가장 무거운 초식이 있었다.
‘파혼검.’
월아의 검신에 묘한 일렁임이 피어났다.
파혼의 힘을 나타내는 불꽃.
한빈은 파혼검으로 황보만청의 병기를 밀어 내기로 한 것이었다.
거리를 좁히는 월아와 황보만청의 병기.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보만청의 바둑판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월아를 감싼 검기에 맞서 황보만청의 병기도 일렁이기 시작한 것.
팅!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파혼검의 초식이 힘없이 튕겼다.
파혼검의 근본은 무거움, 그런데 황보만청의 바둑판이 가지는 무거움을 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팅, 팅.
한빈의 월아와 황보만청의 병기가 징처럼 산자락에 울렸다.
푸드득.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다급히 날갯짓하며 자리를 떠났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에 한빈과 황보만청이 동시에 물러났다.
이번에는 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지금 초식은 무엇입니까?”
“난공불락(難攻不落)이네.”
“지금의 위세에 딱 어울리네요.”
“고맙네.”
“그럼 내 차례인가?”
“잠시만, 시간을 주시죠.”
“오, 수를 읽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황보만청과 하는 비무는 대국(大局)에 가까웠다.
한빈이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자, 황보만청은 기분 좋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황보만청은 한빈에게 수를 읽을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는 자신과 한빈이 쓰는 초식 하나가 바둑의 돌 하나와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바둑에서 돌 하나라?
그것은 대국의 전체를 가를 수 있는 한 수였다.
잘못해서 한 수를 실패한다면?
그것은 볼 것도 없이 패배로 이어진다.
황보만청이 보기에 이 비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는 정석에서 벗어나는 수법은 없었다.
황보만청이 한빈에게 원하는 것은 묘수였다.
자신이 새로 얻은 병기와 초식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허점을 점검하고 싶은 것이 황보만청의 의도였다.
한빈은 잠시 승부에서 벗어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주위를 돌아보던 한빈의 눈빛이 바뀌었다.
뭔가 실마리를 얻은 것이었다.
승부라는 것은 자신과 월아만이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주변의 지형이나 사물도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다.
주위를 살피던 한빈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그곳은 황보만청이 바둑판을 내려놨던 곳이었다.
아까 무지막지하게 바둑판을 내려놨을 때는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곳인데, 지금은 묘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빈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멈췄다.
그에게 구결을 얻을 방법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때 황보만청이 외쳤다.
“그럼 들어가겠네! 준비하시게!”
황보만청이 한빈 쪽으로 짓쳐 들었다.
한빈은 월아를 뻗었다.
휙.
동시에 황보만청의 바둑판이 파공성을 내며 앞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빈을 짓뭉갤 듯한 묵직한 기세였다.
검을 뻗던 한빈이 춤을 추듯 옆으로 빠졌다.
사사삭.
순식간에 황보만청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한빈.
그때 한빈이 진각을 밟았다.
쿵.
가벼운 구걸십팔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격과 연관된 동작도 아니었다.
황보만청에게서 몇 걸음은 떨어진 곳에서 밟은 진각이었다.
한빈의 동작은 몇 번씩 반복되었다.
서로의 병장기가 맞닿기 전에 한빈은 검을 빼내었다.
황보만청은 한빈의 초식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도 한빈의 경공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한빈이 도망가려 한다면 잡을 수 없는 속도.
하지만, 지금은 비무 도중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도망을 간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라진 후 자신의 위치를 알리듯 내공이 실린 진각을 밟은 것이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황보만청은 한빈의 의도가 궁금했다.
호기심이 이는 동시에, 오기도 생겼다.
황보만청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확인도 하지 않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초식을 한빈이 파훼하지 못하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자신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크기의 차이에 있었다.
얇고 뾰족한 검과 거대한 바둑판.
마치 창과 방패의 대결과도 같았다.
문제는 방패라 생각한 무기가 때에 따라서는 뾰족한 창날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황보만청의 바둑판은 한빈의 검만큼이나 빨랐다.
휘릭.
한빈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황보만청은 이제 호기심을 지웠다.
한빈에게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황보만청은 절대적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공격을 해 올 줄 알았다.
아니면, 자신의 초식을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부딪치거나.
그런데 한빈은 계속 발을 빼고 있었다.
이것은 한빈이 계속 시간만 벌려는 의도로 보였다.
바둑에서 수를 읽는 시간은 공평해야 했다.
언제까지 한빈에게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황보만청은 소리에 맞춰 한빈을 급하게 따라잡기 시작했다.
비슷한 상태가 계속 이어질 때였다.
황보만청의 귓가에 한빈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파공성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슝!
그 소리에 황보만청은 재빨리 자신의 병기를 돌렸다.
쉬익!
그때였다.
황보만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아무 감각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빈이 도망친 것이다.
그때 한빈이 진각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쾅!
이번에는 태산이 무너질 정도의 굉음이었다.
소리가 들린 곳은 자신의 바로 앞.
순간 불길한 예감이 황보만청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비동에서 이 바둑판과 비급을 발견하고 자신이 천하제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불길한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묘한 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렸다.
쏴아-악.
수맥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아래 흙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물줄기가 튀어나와 흙과 섞여 나오는 것.
발아래에서 튀어나오니, 황보만청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에서 왜 물줄기가?
황보만청은 한 발 뒤로 물러나 흙탕물로 가려진 시야 사이로 한빈을 찾았다.
한빈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더는 진각을 밟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차!
황보만청이 급하게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퍽!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황보만청은 이를 악물고 뒤쪽으로 물러나 상황을 바라봤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만청이 헛기침했다.
“흠, 당했군.”
황보만청의 목소리에 한빈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합편의 보충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융합편의 보충 구결은…….]
장황한 설명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한 한빈은 시선을 돌렸다.
한빈은 황보만청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말을 이었다.
“꼼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꼼수라? 꼼수가 아니라 자네도 깨달음을 얻은 것 같군. 그래, 자네의 수법은 대체 무엇인가?”
“수맥타공(水脈打孔)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상한 이름의 무공 초식은 없었다.
한빈이 상황에 맞춰 지어낸 이름이었다.
황보만청이 그럴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초식의 이름이 오묘하군.”
“사실, 무공 초식이 아닙니다.”
“무공 초식이 아니라고?”
“글자 그대로 저는 바닥에 흐르던 물길을 뚫은 것뿐입니다. 그 초석은 어르신이 다지셨군요.”
“내가 초석을 다졌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한빈의 설명에 황보만청은 입을 벌렸다.
한빈이 쓴 수법은 꼼수가 맞았다.
화경에 고수에게 꼼수가 통한다라?
그건 말도 안 되었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한빈의 설명은 이랬다.
바둑판을 세게 내려놓는 바람에 물줄기가 흐르던 바닥에 작은 흠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내공을 실은 진각으로 그 흠을 구멍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물길이 터지며 물줄기가 솟구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럼 하나만 묻겠네.”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정확히 내 발밑에서 물줄기를 터뜨릴 수 있었지? 그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질문을 던진 황보만청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한빈의 수법이 묘수일지도 모른다는 기대하고 있었다.
한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니……?”
“제가 찾아갈 필요도 없이 어르신이 저를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따라갔다라?”
“그렇죠. 제가 진각을 밟는 소리를 따라서요. 사실 저는 한 곳만 밟았거든요.”
한빈이 가리킨 곳은 물줄기가 새어 나오는 곳이었다.
이제는 흙탕물이 걷히고 제법 맑은 물이 나오고 있었다.
황보만청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하하.”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한참을 웃던 황보만청은 뭔가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도 마주 고개를 들었다.
물론 한빈이 보는 것은 용린검법이었다.
[융합편의 초식에 보충 초식이 추가됩니다.]
[진룡파혼검. 선(線)]
[진룡파혼검 중 선의 초식은 심(心)의 구결 다섯 개를 필요로 합니다. 파혼의 힘을 선에 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경지가…….]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지가 두 단계 차이 난다면 진룡파혼검의 초식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선에 힘을 모으는 동시에 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초식의 장점이었다.
그때 황보만청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판 더 어떤가?”
마치 바둑 한 판 두자는 듯 편하게 제안하는 황보만청.
한빈이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먼저 가겠네.”
그들의 비무를 바라보던 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시려나?”
“그러게요.”
“당과도 다 떨어졌는데…….”
그러나 수다를 떨던 설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