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동행 (3)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 당기명이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대결 중이라 해도 기척도 없이 이런 근거리까지 접근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게다가 자신의 수하들은 지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는 것이다.
당기명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넌 누구냐!”
“그건 알 거 없고 하던 거 계속하시지. 나는 고기나 먹으면서 구경할 테니…….”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고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당기명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 쪽으로 검날을 세웠다.
그러고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냐고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대가를 치르도록.”
말을 마친 사내는 한 손으로 꼬치를 든 채 한 손은 흔들었다.
“무슨 헛소리냐?”
당기명이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고기를 베어 물었다.
그렇게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옆쪽에 있던 거한이 고기 꼬치를 들고 있는 사내에게 달려갔다.
“형님!”
순간 당기명의 눈은 한계까지 커졌다.
지금 거한이 분명 사내에게 형님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둘은 한패라는 것이었다.
당기명은 다시 한번 사내를 살펴봤다.
붉은 무복에 그리 크지 않은 덩치,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 얄미웠다.
거기에 묘하게 경계심이 일어났다.
당기명은 다시 한번 상대를 바라봤다. 강북에 이런 무인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물론 거지 중 창을 쓰는 인물도 금시초문이었다.
둘을 지켜보던 당기명의 입이 딱 벌어졌다.
갑자기 붉은 무복의 사내가 뒤로 물러나며 달려드는 거한을 막아선 것이다.
“누군데 형님이래!”
“형님, 나요, 나.”
“나는 거지를 동생으로 둔 적이 없다.”
“허, 진짜 나를 모르오?”
“어허, 나는 거지를 동생으로 둔 적이 없대도. 스승이면 또 몰라도. 냄새나니 좀 떨어져라.”
붉은 무복의 사내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물론 한빈이었다.
둘의 싸움을 몰래 숨어서 구경하다가 출출하던 김에 고기 꼬치를 주워 든 것이었다.
한빈이 상대를 쫓는 모습은 마치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상대 거한이 입술을 내밀며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와, 이거 서운하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너는 잠시 옆으로 비켜 있어.”
한빈은 상대 거한을 옆으로 물렸다.
상대 거한은 말없이 옆으로 비켜 섰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당기명 앞에 섰다.
“일단 인사부터 나누시죠.”
“너, 너는 대체 누구냐?”
“그러니까 지금부터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면…….”
당기명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살폈다.
한빈은 그의 눈빛에서 속마음을 읽었다.
양예신과 마찬가지로 천수장의 장주와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듯싶었다.
뭐,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홍칠개의 안배였다.
천수장의 장주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어차피 알게 될 사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이 한빈을 누구로 인식하냐에 있어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신분보다는 천수장의 장주가 더욱 자유로운 위치였으니 말이다.
가문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은 중요했다.
물론 지금처럼 예전 한빈의 소문을 기억하는 이들을 대할 때는 난감할 때도 있다.
지금 당기명의 표정을 보면 하북제일의 겁쟁이가 여긴 무슨 일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일단 공적인 일부터 마무리 짓도록 하죠.”
한빈의 말에 당기명은 또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공적인 일이라니…….”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보는 당기명.
하지만, 한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 찾고 계신 분이 천수장의 장주 아닙니까?”
“…….”
당기명은 말없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상대가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적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시라면 저는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거리낌 없이 뒤돌아섰다.
당기명이 검을 겨누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빈이 돌아서서 발걸음을 떼자, 당기명은 순간 당황했다.
“자, 잠시만.”
한빈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됐는지요?”
“당신이 천수장의 장주가 있는 곳을 안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런데 그 쇠붙이는 치우고 이야기하지요.”
한빈은 손끝으로 당기명의 검 끝을 슬쩍 밀어 냈다.
당기명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보여 준 한 수가 너무 대범했기 때문이다.
사천당가의 검 끝을 맨손으로 만지는 미친 인간은 최소 강남에는 없었다.
물론 강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천당가와 마주치면 최대한 접촉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런데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검 끝에 손을 대고 밀고 있었다.
당황도 잠시, 당기명은 지금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떠올렸다.
동시에 검을 재빨리 검집에 넣었다.
쓰윽.
그러고는 한빈을 바라봤다.
“천수장의 장주에 대해서 아시면 사례를 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주시지요.”
“뭘 달라는 것인지…….”
“말씀하신 사례를 주시지요.”
한빈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슬슬 흔들었다.
당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황도 잠시, 당기명은 뒤쪽에 있는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전낭을 챙겨 오라는 신호였다.
당기명의 신호에 반응한 것은 그의 호위인 당독대였다.
당독대는 재빨리 달려와 은밀하게 귀엣말을 전했다.
귀엣말을 듣고 난 당기명의 눈이 커졌다.
당독대의 말에 의하면 이미 자금이 바닥났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천수장에 있던 인간들이 당기명의 전낭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갔었다.
당기명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천당가의 명예를 걸고 사례할 테니 말씀해 주시지요.”
“나중은 필요 없고 일단 돈부터 내놓으시죠. 그게 아니라면…….”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풀자 당기명이 상체를 기울였다.
“아니라면요?”
“문서로 약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하자 당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약속할 테니…….”
당기명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기 때문이다.
딱!
그 소리에 당기명의 눈이 커졌다.
이 소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청색 무복의 도인이 마지막 보여 줬던 그 한 수.
당기명의 머릿속이 순간 뒤죽박죽이 되었다.
모든 장면이 엉켰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달리 사천당가의 직계가 아니었다.
머리만큼은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사천당가였다.
당기명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장면이 나란히 정렬되면서 몇 가지 사실을 뽑을 수 있었다.
상대는 청의 무복을 입은 도인이 말했던 그의 후인일 가능성이 컸다.
돈을 밝히는 것으로 봐서 천수장과 관련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여기까지 추측을 했을 때였다.
갈대밭 사이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여자아이는 보따리를 펼쳐 놓고 한지를 펼친 후, 대나무 통에 있는 먹을 벼루에 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설화는 어디 가고 청화 네가 온 거야?”
“제가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언니는 뒤에 있어요. 그런데 공자님.”
“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우리가 온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설화가 싸움 구경을 놓칠 리 없잖아.”
“아.”
청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당기명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모든 일을 문서로 남겨야 확실한 법 아니겠습니까?”
“하북팽가의 사 공자께서 무슨 권리로 문서를 작성하시는 거죠? 천수장과 관련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당기명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의 눈치를 살폈다.
모든 상황이 생뚱맞게 돌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앞에는 꼭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함정이라면?
사천당가를 대표해서 이곳 강북에 온 만큼, 당기명은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천수장과 관련이 있다는 건 알아내셨군요. 그런데 너무 신중하신 거 아닌가요?”
“사천에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가란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속담이군요.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어떤 조건이죠?”
“가장 궁금한 것이 장주의 행방이죠?”
“…….”
“그건 공짜로 알려 드리는 대신…….”
“그 대신은 뭐죠?”
“나머지 조건은 두 배로 뛸 겁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당기명은 눈을 빛냈다.
일단 장주의 행방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협상이었으니 말이다.
장주를 만나게 되면 하북팽가 사 공자는 뒤쪽으로 물려 놓고 대화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당기명은 천수장의 장주가 이곳 장하를 건넌다는 사실만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당기명이 팔짱을 끼고 대답을 기다리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조건을 수긍하신 걸로 알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접니다.”
“네?”
“천수장의 장주가 저라는 말씀입니다.”
“…….”
당기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천수장의 장주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동일인이었다고?
알아보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다급히 돌아다니는 바람에 놓친 정보라 생각했다.
그가 멍하니 있자 한빈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병 때문에 저를 찾은 게 맞습니까?”
“…….”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해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해는 안 될 것이니까요.”
“…….”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긴 했지만, 같은 십대세가가 아니겠습니까? 이럴 때 돕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한빈의 말에 당기명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장주님, 아니 팽 공자님. 뭐라 불러 드려야 할지.”
“같은 십대세가의 자제끼리 장주라 높이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그냥 공자라 편히 부르십시오.”
“감사합니다, 팽 공자님.”
“그럼 이제부터 툭 까놓고 거래를 시작해 봅시다.”
“거래라니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한빈이 싱긋 웃었다.
한빈의 웃음에 반비례해서 당기명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졌다.
한빈은 당기명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청화가 먹을 흠뻑 적신 붓을 그 손에 건넸다.
붓을 잡은 한빈은 일필휘지로 내용을 적어 나갔다.
휙. 휙.
붓이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한지 위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물론 이것은 전광석화의 위용이었다.
붓을 검처럼 쓰는 것은 중원에서 한빈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지금 한빈이 보여 준 움직임에 당기명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기명이 놀란 것은 신기한 붓놀림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내용이었다.
이것은 불공정 계약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조건.
가장 중요한 대가에 대한 것은 치료를 못 할 경우 받지 않을 것이라 했으니 부담은 없었지만, 한빈을 사천까지 데려가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내용을 눈에 넣은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수장의 장주라는 신분에 굴복한 것이다.
한빈은 재빨리 서명한 후 붓을 당기명에게 넘겼다.
“서명하시죠.”
“네?”
“읽어 보든 말든 자유지만, 먹이 마르기 전에 서명하시죠. 시간은 거기까지 드리겠습니다.”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붓을 주시죠.”
당기명은 재빨리 붓을 잡았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청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설화 언니 말대로 명필이네요. 진짜 아름다운 서체예요…….”
청화는 넋을 놓은 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흠.”
한빈이 헛기침하며 청화를 바라봤다.
당기명도 같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