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동행 (4)
한빈과 당기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청화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품 안에서 간식거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설화를 닮아 가는 청화의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한빈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설화는 자신을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빈과는 다르게 당기명은 웃고 있었다.
살짝 휘어진 눈썹은 이내 반달 모양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청화가 찹쌀떡을 먹는 모습이 이상하게 친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당기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청화가 찹쌀떡을 먹는 모습이 친근하게 보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도 찹쌀떡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찹쌀떡을 먹다 목에 걸린 것이 몇 번인지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마다 당기명은 동생의 등을 두드려 줬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강북에 오고 나서부터 잃어버린 동생이 생각나는 당기명이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기명은 이 모든 것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은 당기명은 망설임 없이 붓을 놀렸다.
사삭.
서명을 끝낸 당기명은 붓을 건넸다.
그 붓을 한빈 대신 청화가 받았다.
붓을 받아 든 청화는 지필묵이 든 보따리를 정리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당기명을 바라봤다.
“왜 안 읽어 봤습니까?”
“읽어 봤습니다.”
“읽어 본 것치고는 번개같이 처리하셨군요.”
한빈은 계약서를 손바람으로 말리며 당기명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당기명은 조용히 웃었다.
“먹이 마를 때까지라고 했는데 제게 선택 권한이 있나요?”
“흠.”
“제가 서명한 게 못마땅하신 표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아까 제가 내용을 써 나갈 때 옆에서 보고 미리 판단하신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쓴 작은 글자는 안 읽어 보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네? 작은 글씨라니요?”
당기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큰 글씨로 쓴 내용도 이상한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면 안 된다고 못 박은 조항은 이해가 안 되었다.
강호인, 그것도 무림세가 중 으뜸이라 하는 사천당가에서 태어난 자신이었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놀라면 몰라도 자신이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니!
그것은 자신을 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기명의 표정을 본 한빈은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서명이 끝나셨으니 내용은 나중에 읽어 보시죠.”
말을 마친 한빈은 문서를 곱게 접어 당기명에게 건넸다.
문서를 받은 당기명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고개 숙인 당기명의 표정은 변화무쌍했다.
그만큼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글씨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빈이 쓴 모든 글자를 놓치지 않고 다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한빈의 붓놀림이 자신의 동체 시력을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순간 당기명은 등골이 오싹했다.
붓놀림도 보이지 않았는데 상대의 검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당기명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표정을 수습하고 가문을 위해 한빈을 사천당가로 이끌어야 했다.
당기명이 억지웃음을 짓고 있을 때, 마주 선 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시죠. 본래는 아침 수련 때문에 나왔는데, 수련은 물 건너간 것 같습니다. 가시죠.”
손을 내민 한빈이 앞장섰다.
그때 어디선가 설화가 튀어나왔다.
기척 없이 한빈의 옆에 선 설화를 본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천수장에서도 놀랐었는데 여기서도 놀랄 일들뿐이었다.
자신이 겁쟁이라 알고 있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천수장의 장주였다.
거기에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붓놀림을 보여 줬다.
그것도 모자라 옆에서 튀어나온 시녀의 무위는 당기명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대체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이 모여 있다는 말인가?
당기명은 자신이 강호의 흐름에 뒤처지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당기명이 힘없이 발길을 옮기자, 멀리 떨어져 있던 소대섭과 장삼, 조호까지 달려왔다.
갑자기 많아진 인원에 당기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기명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나머지 사천당가의 무사들도 움직였다.
이제 모든 이가 한빈의 뒤를 따르는 상황.
그때 멍하니 있던 덩치 큰 거지가 외쳤다.
“형님, 같이 가시죠!”
그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되니 당기명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봤다.
“팽 공자님, 저분은 대체 누구시죠?”
“산동악가에서 온 녀석이지요.”
한빈의 말에 당기명의 눈빛이 떨렸다.
당기명은 잠시 대화를 멈춘 채 뒤쪽에서 쫓아오는 거지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상거지가 맞았다.
당기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산동악가라면, 제가 알고 있는 그 강북 오대세가의 산동악가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동악가에서 왜 거지가…….”
“그건 모릅니다. 산동악가에서 왜 거지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저 녀석이 악가의 대공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빈은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악가의 대공자라면……. 혹시 악비광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기명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다시 뒤를 힐끔 돌아본 당기명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악비광이라면 당기명도 들어 봤던 이름이었다.
한빈은 당기명의 표정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맞습니다.”
“…….”
당기명은 순간 머릿속에 하얗게 변했다.
산동악가의 대공자가 저런 꼴로 나타난 이유는 그가 보기에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가문의 몰락.
강북의 오대세가 중 한 곳이 몰락해서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다고?
어찌 보면 저것이 사천당가의 미래일 수도 있었다.
누가 산동악가를 몰락시킨 것일까?
당기명의 손에 축축해졌다.
땀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하남정가의 가주가 병에 걸렸을 때는 남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천당가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자 이젠 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북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당기명의 착잡한 기분과는 달리 장하의 물결 위에 우뚝 선 해가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당기명의 옆에 선 한빈은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빈이 웃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 번째가 당기명의 표정 때문이었다.
당기명의 착각은 한빈의 머릿속에서 훤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우선 당기명의 오해와는 달리 산동악가는 건재했다.
묘하게 악비광과의 소식은 끊겼지만, 산동악가는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거지꼴을 한 악비광이 궁금하기는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는 바로 악비광 때문이었다.
산동악가의 대공자가 거지꼴이라니!
한빈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 * *
한빈이 묶는 객잔 일 층.
점소이가 부지런히 객잔을 정리하고 있었다.
점소이는 어제 다루에서 한빈 일행을 안내하던 점소이였다.
다루에 속한 점소이였으나, 어제 한빈 일행을 안내하는 바람에 이곳 객잔으로 파견을 나온 것이었다.
이곳 객잔도 다루의 루주가 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한빈의 돈으로 산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는 한빈이 주인이라는 언질은 받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급비밀.
그저 한빈이 귀빈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잘못 보이면 목이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귀빈이라니!
이 때문에 점소이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손님 중 둘이 문제였다.
당과와 찹쌀떡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 대는 통에 쉴 틈이 없었다.
뭐,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점소이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고단했던 어제 때문인지 그의 눈이 뻘게져 있었다.
하지만, 점소이의 걸음은 씩씩했다.
설마 어제와 같이 자신을 부려 먹을까 생각하며 일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이른 아침 손님이 올 리가 없기에 점소이는 바짝 긴장했다.
점소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보고 있을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한빈이었다.
그 양옆으로 같이 들어온 설화와 청화.
둘을 본 순간 점소이는 찔끔했다.
어제의 악몽이 기억난 것이다.
놀람도 잠시, 점소이의 눈은 점점 커졌다.
한빈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것은 어제 봤던 그의 일행들뿐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무사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천당가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깃발을 든 무사는 객잔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객잔의 앞에 깃발을 꽂았다.
이것은 맹수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동작과도 같았다.
마차가 있다면 마차의 지붕에 깃발을 꽂아 놓고 객잔 앞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천수장에서 마차까지 털린 그들은 이렇게라도 표시를 해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오던 한빈의 턱짓에 사천당가 무사는 꽂았던 깃발을 다시 거둬들여야 했다.
점소이가 보기에 한빈의 의도는 간단했다.
객잔 앞에 깃발을 꽂아 다른 손님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점소이는 입을 벌려야 했다.
다른 손님과 사천당가가 함께 섞인다는 것 자체가 불길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빈이 활짝 웃으며 점소이를 바라봤다.
“일찍 일어났네.”
“덕분에 푹 잤습니다.”
“뭔가 뼈가 있는 거 같군.”
“아, 아닙니다.”
“내가 손님을 모셔 왔으니까, 일단 아침부터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공자님.”
점소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주방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상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한 무리의 거지가 객잔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점소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하지만, 한빈의 다음 말에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그리 놀라지 말라고. 저쪽도 내 손님이니까.”
“소, 손님이요? 거지가요?”
“그래, 거지도 내 손님이야.”
한빈이 단호히 말하자, 점소이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요.”
주방으로 걸어가는 점소이는 일단 음식을 준비시키고 빨리 루주에게 보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빈은 귀빈이고 장사 망치는 건 더 이상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점소이는 나름대로 이곳에 충성심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 * *
널따란 객잔 일 층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이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장했던 것이다.
물론 악비광을 비롯한 거지 무리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비웠다.
그러고는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트림을 했다.
물론 악비광도 마찬가지였다.
한빈도 악비광이 음식을 비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음식을 다 비우고 트림을 해 대자 매서운 눈으로 쏘아봤다.
시선이 마주친 악비광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 옆에 있는 당기명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묘하게도 가장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당기명이었다.
산동악가의 몰락이라는 사실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악비광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 한빈이 그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줬다.
“이제 말해 봐.”
“뭘 말입니까? 형님.”
“왜 그런 거지꼴을 하고 있냐고?”
“잘 곳도 없고 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악비광은 당당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