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친절한 주군 (2)
설화와 청화, 저 둘 때문에 무림의 판도가 바뀔 것 같았다.
한빈은 정작 변화의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설화의 변화도.
청화의 변화도 모두 한빈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상념도 잠시,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은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광개와 악비광을 손쉽게 부릴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지금 보니 설화가 둘의 천적이 확실했다.
한빈은 앞으로 광개나 악비광에게 일을 맡길 때는 설화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빈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있던 당기명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한빈과는 달랐다.
설화와 청화가 비둘기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은 당기명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수들의 비무에 뛰어든 청화의 용기가 심상치 않았고, 두 고수의 병기를 단검으로 막아 낸 설화의 무위가 놀라웠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설화의 설교였다.
설화는 광개와 악비광에게 멈추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보통 시녀가 무림고수에게 당당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던가?
당기명은 이 점이 가장 혼란스러웠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제까지 못 했던 이야기를 모두 광개와 악비광에게 터뜨리는 것 같았다.
광개와 악비광은 이렇다 할 반박도 못 한 채 설화의 설교를 계속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누가 봐도…….”
조근조근 쪼아 대는 설화의 모습에, 한빈은 광개와 악비광이 불쌍해졌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자 한빈이 나섰다.
착각일까?
자세히 보니 악비광과 광개의 귀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설화의 잔소리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흠.”
한빈의 헛기침 소리에 설화가 힐끔 돌아봤다.
한빈을 확인한 설화가 화들짝 놀라 웃었다.
“헤헤, 제가 말이 조금 길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길었네. 우리 설화가 쌓인 게 많았나 봐.”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전서나 확인해 보자고.”
“전서요?”
“그 비둘기에 매달려 있는 거 전서 통 같은데?”
한빈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악비광과 광개 그리고 설화와 청화가 엉킨 상태라, 모두 비둘기의 다리에 달려 있는 전서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답한 것은 광개였다.
“이건 우리가 쓰는 전서 통이 아닌데?”
고개를 갸웃한 광개가 청화의 손에 있던 비둘기의 다리에서 전서 통을 풀려 하자 한빈이 손을 저었다.
“멈춰.”
“앗, 깜짝이야.”
광개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당기명을 바라봤다.
“당 공자께서 확인하시죠.”
“제가요?”
“혹시 독이 있을지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흠, 독이라…….”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게 함정일 수 있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팽 공자님.”
당기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비둘기의 다리를 잡았다.
슬쩍 전서 통을 확인한 당기명은 한빈을 바라봤다.
“팽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량의 독이 묻어 있습니다.”
“그럼 비둘기가 독에 당한 것입니까?”
“전서 통의 마개에 묻어 있었습니다. 여기 보이시죠?”
말을 마친 당기명은 마개를 보여 주었다.
당기명이 말한 대로 마개에는 끈적거리는 검댕이가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본 광개가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당기명이 말했다.
“피부에 닿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비둘기도 이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비둘기가 당하다니요?”
“여기 보시면 암기가 스치며 전서 통에 상처를 낸 것 같습니다.”
“흠, 그렇군요.”
“전서 통에 흠집이 나면서 그 독이 비둘기에게 튄 것이지요. 이 비둘기는 무사들 간의 싸움 도중에 날아오른 것이 분명합니다. 뭐, 이건 삼화산이라는 독인데 그리 걱정할 극독은 아닙니다.”
당기명이 전서 통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리켰다.
비둘기의 날개는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로 죽지는 않은 것이, 극독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 이유로 광개는 당기명의 근처에서 계속 머물렀다.
광개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질문을 이었다.
“허, 그럼 위험한 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뭐 보통 사람이 만지면 몇 달 동안은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을 겁니다. 원인도 모른 채 말입니다. 피부로 스며든 독이 내장을 서서히 녹이니까요.”
“헉, 저리 치우시오.”
광개가 뒤로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 모습에 당기명이 황당하다는 듯 광개를 바라봤다.
“이 삼화산이라는 독은 호흡만으로 중독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기명이 말끝을 흐리자 이번에는 악비광이 물었다.
“빨리 말하시지요.”
“이 안에 전서를 확인하려면 해독제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아.”
“삼화산은 조금은 오래된 독이라 해독제를 만들려면 따로 재료를 구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러니 일단 마을로…….”
그때 한빈이 재빨리 전서 통을 낚아챘다.
“이리 주시지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전서를 확인하려면 해독제가…….”
“방법이 생각난 것 같으니 일단 맡겨 주시죠.”
전서 통을 다시 닫은 한빈은 씩 웃고 나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 남긴 채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그 모습에 악비광이 광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경공의 고수는 먼지조차 일으키지 않는군. 누구와는 다르게…….”
“건조해서 먼지가 난 것뿐이라네.”
“꼭 하수가 병장기나 환경 탓을 하지.”
“흠.”
광개는 고개를 휙 돌렸다.
광개는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한 말 중 반은 변명에 불과했다.
광개는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산길에서라면 먼지를 피우지 않고 구걸십팔보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황토 길이라면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한빈은 환경과는 관계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경공을 펼쳤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광개는 한빈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한빈이 사라진 방향에서는 어떤 기척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광개의 어깨를 토닥인다.
“혹시 벽을 보셨습니까?”
“…….”
“나는 팽 공자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보다 깡이 좋은 무인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팽 공자님을 만났을 때, 잠시였지만 벽을 느꼈습니다.”
“허허, 첫인상보다는 실제 성격이 진국인 것 같수다.”
광개가 악비광을 보며 웃었다.
둘은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둘이 웃고 있을 때였다.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앗! 조심해!”
그 목소리에 광개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당기명이 청화의 앞에 서 있었다.
청화는 무슨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기명이 외쳤다.
“비둘기를 내려놔! 그리고 날개를 잡으면 안 된다. 내가 해약을 만들면…….”
“비둘기가 왜요? 이제 다 나았어요.”
“삼화산에 중독된 비둘기가 다 나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건 네 착각…….”
당기명은 말을 맺지 못했다.
비둘기의 날개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혹시?’
당기명은 한빈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한빈이 어떤 조치를 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물론 비둘기의 날개가 본래 색을 찾은 것은 청화가 비둘기의 날개에 스며든 독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 * *
한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서를 읽는 대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화산을 만지는 순간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 만독지체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막혀 있던 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독(毒) : 삼십삼(三十三)]
이번에 삼이란 숫자가 올랐다.
얼마나 더 높여야 만독지체에 다다를지는 모르지만, 일단 한 걸음 다가섰다는 것이 중요했다.
한빈은 시선을 돌려 전서를 확인했다.
-영단산에서는 사천당가의 무리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 다음 계획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문구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전서 통에 흠집이 나며 내용이 훼손된 것이다.
이 전서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사천당가를 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패로 돌아갔다라?
한빈은 영단산을 쓱 둘러봤다.
적지 않은 혈향이 주변에서 풍겼다.
아무래도 적들은 사도련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독고련이 직접 나섰다면 그들은 상대를 확인하지 못한 채 당했을 것이었다.
어찌 보면 전서구를 날린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천당가를 습격하려 한 무리 속에 생존자가 있다면, 사도련에 사로잡혔을 것이 분명했다.
사도련은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이 있다는 것을 더 빨리 인식할 수도 있는 일.
이것은 한빈이 원한 일이었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들어 운이 좋네.”
피식 웃은 한빈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차 한 잔 마실 즈음의 시간이 흘러, 한빈은 일행의 사이에 나타났다.
그런데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그들 중 한빈이 아는 자가 한 명이고, 모르는 자가 한 명이었다.
뭐, 새로 나타난 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거지라는 것이었다.
광개는 한빈이 나타나자 이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서 인사해.”
그들이 달려오자 광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새로 받은 내 제자들이다. 여긴 나와 형제처럼 지내는 팽 공자.”
광개의 말이 끝나자 둘은 동시에 포권했다.
“광개 사부님의 제자 장오라고 합니다.”
“저는 현개라고 합니다.”
그들의 인사에 한빈이 마주 포권했다.
“나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 팽한빈이라고 한다. 인사는 처음이지만, 지난번에 봤지?”
그 말에 광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봤어?”
“천수장에서 봤지. 사부님이 데려온 친구들이잖아. 사부 찾아 준다고 하시는 걸 들었거든.”
“아, 어르신도 너무하시지. 앞날이 창창한 나한테 제자를 들이라고 하면 어떡하라고…….”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벌려 하소연하던 광개는 말끝을 흐렸다.
홍칠개 때문에 강제로 떠맡긴 했어도 엄연한 이들의 사부였다.
제자한테 못 할 말을 했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많이 컸네, 광개.”
“내가 뭘?”
“뭐, 칭찬이니 밥이나 먹자고.”
말을 마친 한빈은 뒤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손짓했다.
“장삼, 이리로 와 봐. 동생이 왔는데 알은체는 해야지.”
장삼이 한빈의 곁으로 왔다.
한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장삼이 장오를 바라봤다.
“잘 지냈느냐?”
“형이 여긴 웬일이슈?”
장오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전에 장삼을 무시하던 그런 눈빛이 아닌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동경하던 무인의 세계에서 자신의 형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부러웠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삼류의 끝자락에서 놀던 장삼이 자신을 넘어섰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때 장삼의 손이 사정없이 장오의 뒤통수를 갈겼다.
빡!
난데없는 구타에 장오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외쳤다.
“왜 때려요?”
“선배에 대한 태도가 그게 무엇이냐? 나는 네 형이기 이전에 강호의 선배이다. 강호에 발을 들여놨으면 온당히 예의를 차려야 하는 법!”
말을 끊은 장삼은 고개를 돌려 광개를 바라봤다.
“분타주님, 강호의 예법부터 철저히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런데 왠지 팽 공자를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장 무사.”
“뭐, 그렇지요. 수하가 주군을 닮아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장삼은 광개에게 살짝 고개 숙인 뒤 돌아섰다.
장삼이 떠나자 광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오는 오늘부터 특별 교육이다. 동냥의 기본부터 철저히 가르칠 것이야. 그 전까지는 밥그릇을 손에 쥘 생각을 하지 말거라.”
광개의 말에 장삼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광개가 뭔가 생각난 듯 둘에게 말했다.
“너희, 비둘기 가져온 것 좀 올려놔.”
광개가 한빈의 마차를 가리키자, 장오와 현개는 비둘기가 든 새집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