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독사의 독니는 물린 뒤에야 알 수 있다 (4)
설화는 언제든 준비됐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는 바로 몸을 돌렸다.
바로 미행을 시작하겠다는 말이었다.
설화가 막 방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한빈이 설화에게 뭔가를 던졌다.
휙!
백발백중의 수법으로 날아간 물체가 천장을 맞고 설화의 앞에 떨어졌다.
설화는 보기 좋게 그것을 낚아채고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예요? 공자님.”
“출출하면 당과라도 사 먹으라고 주는 용돈이지.”
“헉.”
“왜 그렇게 놀라?”
“뭔가 묵직해 보이는데요.”
“아마도 연막탄이 같이 있어서 그럴 거야. 위험할 때 쓰라고. 그리고 신호용 폭죽도 있으니 조심하고.”
“네, 공자님. 충성!”
설화가 씩씩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한빈이 막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쉬려는데, 청화가 눈을 반짝인다.
“청화야, 너는 왜 그러고 있어? 어서 가서 자야지.”
“그게 아니라, 저도 일 좀 시켜 주면 안 돼요, 공자님?”
“흠.”
“저도 용돈 받고 싶은데…….”
“너는 돈을 욕심내지 않아도 된다, 청화야.”
“왜요?”
“큰 건수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 일만 잘되면 나 혼자 먹지는 않으마. 네 몫도 챙겨 주지.”
“정말로요?”
청화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거짓은 아니니 안심하고 푹 자 둬라. 내일부터는 바빠질 수도 있으니까.”
“네. 알았어요, 공자님.”
청화도 씩씩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 상승의 경공술을 배운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지.”
* * *
그날 아침 식사 자리.
당기명이 한빈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별실로 자리를 옮긴 당기명은 망설이는 눈빛으로 입을 뗐다.
“팽 공, 아니 한빈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여기에서 더 머무를 이유가 생기신 겁니까?”
“헉, 그걸 어떻게…….”
“눈빛이 그랬습니다. 아마도 저보다 더 뛰어난 의원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시겠죠? 하나보다는 둘이 더 나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 저와 숙부님의 대화를 엿들으셨습니까?”
당기명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눈빛을 보니 더 남아야 될 듯했고, 당문호 어르신이 황실의 의관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면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한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
당기명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당문호는 당기명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 왔었다.
솔깃한 제안이라는 건 한빈의 말 그대로였다.
당기명은 당문호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천당가에서 머리 좋은 이였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당문호가 가문을 나간 이유는 간단했다.
사천당가의 무공과는 신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문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두각을 나타낸 정도가 아니라 늦은 나이인 서른에 과거 시험을 준비해서 향시, 회시, 전시까지 연속으로 급제한 인물이었다.
그 기간이 불과 삼 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문벌 집안이 아닌 무가 출신인 그는 조정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런 난관에도 종육품까지 오른 인물이 바로 당문호였다.
덕분에 사천당가도 당문호의 덕을 톡톡히 봤었다.
집안에 중앙 관료가 한 명 있다는 것은 그만큼 든든했다.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사천당가에 얼굴을 비치는 그였다.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소문 때문인지 사천당가의 소식도 알고 있었다.
숙부 당문호는 황실의 의관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당기명에게 당문호는 아낌없이 베푸는 따뜻한 숙부였다.
다만, 지금은 한빈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다른 의원을 모신다는 것은 한빈을 못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기명만의 착각이었다.
상념에 잠긴 당기명의 귓가에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언제입니까?”
“네? 언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궁 출신 의원을 만나기로 한 날 말입니다.”
“그날이라면 별도로 통보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상관없습니다.”
“황궁 출신 의원을 소개받으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시지요.”
“팽 공자님, 아니 의원님을 데려가라고요? 기분 나쁘실 만한 일인데 저희 가문을 위해…….”
“오해는 마십시오. 순수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주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가 의원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죠.”
“네, 의원이라고 부르지만, 의원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의원님…….”
당기명은 한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고개를 내민 지 얼마 안 되는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당기명은 한빈을 의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에게 한빈은 천하를 비추는 태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어떤 요구도 없이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 한빈이었다.
천수장 주변 마을 사람들의 말도 그렇고, 한빈은 생불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겉으로는 조금은 세속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진정한 자신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고, 당기명은 생각했다.
상념에 잠긴 당기명을 본 한빈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눈빛을 보면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빈이 보기에 당기명이 가야 할 길은 멀었다.
천수장에서 이미 탈탈 털리고 왔을 텐데, 그것을 계산에 넣지 못한 당기명은 아직 강호 초출에 불과했다.
한빈은 일단 당문호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당기명에게 밝혀 봐야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정보만 새어 나갈 것이었다.
짐승을 사냥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몰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고요함이다.
고요함 속에 덫을 놓고 기다리면 짐승은 덫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설령 잡으려고 하는 짐승은 아니더라도…….
* * *
그날 저녁 칠천 객잔.
그때까지 당문호로부터 통보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조호가 객잔의 별채 문을 열고 다급하게 달려왔다.
한빈은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소대섭이 보낸 것 같았다.
하루 동안 적혈맹호대는 당독대와 함께 지난밤 폭발이 일어났던 저택을 살폈다.
한빈이 생각하기에 결과야 뻔했지만, 일단 들어 봐야 했다.
조호가 헐떡거리며 한빈의 앞에 멈췄다.
“후, 다녀왔습니다. 주군.”
“느낀 점은?”
“허,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조사할 것이 없었던 것 같구나.”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군 말씀대로입니다. 가 보니 폭발의 흔적도 없었고 전각이나 바닥도 멀쩡했습니다.”
“흠.”
한빈은 생각에 잠긴 듯 탁자를 톡톡 쳤다.
아무래도 이 사건에 개입된 것이 당문호와 살막만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깨끗하게 처리했다면?
칠음현의 관리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칠음현의 관리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바로 조호가 조사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장판이 된 사건 현장을 하루 만에 수습할 수는 없을 터였다.
톡.
탁자를 치던 한빈의 손가락이 멈췄다.
고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이 아닌 선공이 필요했다.
선공이라고 해서 당문호를 섣불리 건드리는 것은 곤란하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면 안 되었으니 말이다.
한빈은 최대한 은밀히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때 조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군.”
“왜 그래? 조호.”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요.”
“혹시 어제 잠을 못 자서 눈이 이상한 게 아니야?”
“저 멀쩡한데요?”
“멀쩡한데 내가 왜 무섭게 보여. 천수장 아랫마을 사람들은 나보고 생불이라고 하던데. 안 그래?”
“아, 맞아요. 주군. 제 눈이 잘못됐나 봐요.”
조호는 뒤로 주춤거리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빈의 방에서 빠져나온 조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빈이 저런 눈빛을 보인 것은 몇 번 있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대형사고가 터지기 일쑤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한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만약 한빈의 눈앞에 사과를 놔둔다면 눈빛만으로도 썰려 나갈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조호는 발걸음을 멈췄다.
새로 온 일행인 원경이라는 친구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경아, 무슨 일이야?”
“아, 조호 형님. 뒷간에 갔다 오는데 묘하게 오한이 들어서요.”
“헉, 얼굴이 완전히 푸르딩딩하네. 대체 뭘 먹었길래?”
“특별히 뭘 먹은 건 아닌데 갑자기 한기가 들이닥쳐서요.”
“젊은 놈이 이리 아파서야.”
“조호 형님.”
“왜? 할 말 있으면 해 봐.”
“제가 꼭 이렇게 오한이 들 때면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고요.”
“뭐? 원경이 너한테 예지력 같은 게 있었어?”
“그런 건 아니고……. 주군한테 사로잡히기 전날도 그랬어요.”
“푸웁.”
“왜 그러십니까?”
“아니, 밑으로 알아서 들어온 거잖아. 선택할 여지도 줬고. 그런데 뭘 사로잡혀. 네가 포로냐?”
“그건 아닌데, 어쨌든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아픈가 보다, 빨리 들어가서 쉬어라.”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원경이 휘청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그것을 본 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주군인 한빈의 밑으로 들어온 것이 원경에게는 재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놈 촉이 좋다는 건데…….”
조호는 어깨를 으쓱하고 적혈맹호대와 당기명이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 * *
조호가 돌아가고 한빈은 서책을 펴 놓은 채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한빈의 시선은 책이 아닌, 밖을 향해 있었다.
그렇다고 용린검법을 확인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한빈은 지금 설화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불꽃이 올라갔다.
팡!
제법 높은 곳에서 불꽃이 터지며 밤하늘에 수를 놓는다.
은은한 달빛을 받은 붉은색 불꽃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흘러내렸다.
불꽃을 본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동시에 한빈의 신형이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어가며 불꽃이 올라온 방향을 향해 달렸다.
불꽃은 설화가 보낸 신호였다.
폭음과 불꽃에 태연한 것은 적이 만들어 놓은 환경이었다.
뭐, 누가 만들었건 한빈은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 불꽃은 누가 봐도 칠음현의 평범한 공연으로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불꽃의 색이 한빈이 미리 정해 놓은 것이었다.
칠음현에서 파는 불꽃과는 조금은 다른 색의 적색.
휙. 휙.
지붕을 뛰어넘으며 구걸십팔보를 펼치던 한빈이 멈춘 곳은 다리 위였다.
다리 위에는 아직도 좌판을 펼쳐 놓은 상인들이 있었다.
그 좌판을 구경하는 남녀로 다리는 북적거렸다.
한빈은 그곳에서 설화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야밤에 당과 꼬치를 들고 있는 사람은 설화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설화도 한빈이 온 것을 눈치채고 걸어왔다.
다리 위에 서 있는 한빈과 설화는 행인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오누이였다.
설화는 아무 말 없이 당과 꼬치를 한빈에게 건넸다.
“여기 이거 드세요.”
“그래, 고맙다.”
한빈은 당과 꼬치를 입으로 가져가는 대신 눈매를 좁혔다.
역시나 당과 꼬치에는 한 단어가 써 있었다.
살막(殺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