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무가지회 (1)
팽혁빈이 은밀히 전한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조금 황당한 것도 있었다.
그것은 칠음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팽혁빈 일행은 현비 마마에게 초대를 받아 들어갔다고 한다.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했다.
현비는 한빈으로 변장하고 있는 이무명에게 독대를 요청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돌아와서 이무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어디가 한 군데 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이무명은 대답을 피한 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뭐, 제가 직접 물어보죠.”
“그래, 아무래도 그게 좋겠구나. 그리고 다른 일도 있다.”
“무슨 일이요?”
“너를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꽤 되더구나.”
“누가 제 목을 노린다고요?”
“아, 그게 아니라. 너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탐을 낸다는 뜻이 정확히…….”
“사위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거지.”
“누가요?”
“음, 사파 쪽에서는 사도련주의 누나라는 독고련도 심상치 않더구나.”
“아, 그 할머니는 전에 만났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그런 기색 안 비치던데요. 그리고 그 할머니는 제가 알기로는 가족이 없을걸요. 그 동생도 다 아들밖에 없고요.”
“무슨 손녀라고 하던데…….”
“정말로요? 그 선배한테 손녀가 있었어요?”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팽혁빈을 바라봤다.
“손녀가 있다고 하던데 누군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대체 오호단문도는 어떻게 된 것이냐?”
“여행 중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지난번에 만난 독고련 선배의 도움도 좀 컸고요.”
“아까부터 선배라고 하는데 그건 어르신에 대한 실례 아니더냐?”
“그 선배는 어르신이라고 하면 화낼걸요. 나중에 만날 때는 누님이라고 해 보세요. 대접이 달라질 겁니다.”
“허허.”
팽혁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하북에만 있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강호에 대해서 몇십 년은 구른 노고수처럼 아는 것이 아닌가?
팽혁빈은 한빈이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고수들의 성격까지 다 꿰뚫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것은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았는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길가에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팽혁빈은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위험하다, 한빈아.”
“왜 그러십니까?”
“기세가 대단하구나.”
팽혁빈이 바라보는 곳에서는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무아지경에 든 현문이었다.
한빈이 씩 웃으며 팽혁빈을 안심시켰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무당에서 오신 분입니다.”
“무당이라고…….”
팽혁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현문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혔기 때문이다.
신묘한 보법에 팽혁빈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였다.
현문은 팽혁빈을 그대로 지나쳐 한빈의 앞에 섰다.
깊숙이 포권한 현문이 입을 열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별일 아닙니다.”
“덕분에 살심을 지울 수 있었소. 내가 사부님의 말씀을 이해 못 하고 관음의 겉모습만 깎고 있었다니……. 이런 우매함을 공자께서 깨우쳐 주셨구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아닌 도를 깨친 듯한 느낌이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도가의 현기가 진득하게 풍기고 있었다.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깨달음이라는 게 특별한 게 있습니까? 진인께서는 벌써 깨달음을 손에 넣고 계셨을 겁니다.”
“흠.”
“다만, 한 가지를 잊고 계셨을 겁니다.”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소?”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고 했습니다.”
“득어망전이라…….”
현문을 마치 소가 되새김질하듯 득어망전이란 말을 입으로 되뇌었다.
“어부가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어야 하는 법입니다. 진인께서는 관음을 통해 깨달음을 벌써 얻으셨으나 관음을 놓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하하.”
현문은 갑자기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그러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공자와의 약속을 지키리라.”
“네, 감사드립니다.”
“공자와의 약속을 다 지키고 나면 무당에 들르겠소.”
“네, 무당으로 돌아가시는 게 맞죠.”
“무당으로 돌아가서 파문을 요청하고 공자께 돌아오리다.”
“네?”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빛에는 뭔 개소리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현문을 도와준 것은 무당파의 현문과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이지, 파문당한 현문과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부께서 항상 말씀하셨소. 깨달음을 주는 이가 사부라고 말이요. 자신과 맺은 사제의 연은 그저 형식에 불과하다고 하셨소. 나중에 진정한 사부를 만나게 되면 진심으로 모시라 하셨소. 그러니 내 공자를 사부로 모시리라.”
“이런…….”
한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이제야 전생의 기억이 이해가 되었다.
왜 무당이란 거대 문파를 버리고 소림으로 들어가 일지 대사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말이다.
문제는 현문에게 관음보살상을 깎으라고 명한 사부라는 작자였다.
그의 사부는 현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임시로 덮으려 한 것이 분명했다.
관음보살상을 깎으며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은 사고 치지 말고 조각이나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진정 사부가 원한 것은 관음보살을 깎으면서 누군가와 인연을 맺어 무당을 떠나는 것이다.
뭐, 떠나서 다른 문파로 들어가게 되면 그 문파는 현문이란 폭탄을 그대로 떠안는 것이다.
지금이야 폭탄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득어망전을 잊으셨습니까?”
“득어망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공자의 가르침인데 말이오.”
“그런데 왜 잊으셨습니까?”
“내가 잊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생각해 보십시오. 깨달음을 얻었는데 사부라는 통발이 왜 필요합니까?”
“흠, 그러고 보니…….”
현문이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문파가 무엇이 중요하고 사부가 무슨 필요입니까? 하지만, 옷을 벗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저 생활에 필요한 의복이라 생각하십시오.”
“공자의 말이 맞소.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는구려.”
현문이 다시 한번 포권했다.
그들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죄송한데 어르신은 대체 누구신지…….”
팽혁빈이 한빈에게 턱짓하자 한빈이 답했다.
“무당의 현문 진인이십니다.”
“현문 진인이라고 하셔…….”
팽혁빈이 말을 맺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무당 역사상 최고의 골칫덩이였다.
오죽하면 가능한 한 현문은 피하라는 쪽지를 정의맹이 은밀히 돌렸겠는가?
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청성파의 제자 하나가 오줌을 쌌다고 해서 머리를 깬 일은 두고두고 무림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청성파 무사가 자신이 쉬를 한 방향에 무당산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무 쪽에 대고 갈겨도 세상은 동서남북 네 방향이니 확률은 사분지 일이었다.
팽혁빈이 이렇게 당황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무가지회를 앞두고 거대 문파와 안 좋은 일로 얽힐까 봐였다.
그때 현문이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 그럼 한 달 동안 나를 맘껏 부리시오.”
“그럼 일단 수염하고 머리부터 정리하시고 말끔하게 세안부터 하고 오시지요. 돈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소. 이래 봬도 불상을 팔아 모은 돈이 꽤 된다오.”
말을 마친 현문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팽혁빈은 무슨 일이냐는 듯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어서 현문은 한빈의 앞에 도착했다.
현문을 본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꽤 준수하게 생긴 서른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나이에 비교해 턱없이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한마디로 전생에 알던 현문이 아니었다.
혹시 깨달음의 결과?
고민도 잠시 한빈이 말했다.
“이제부터 한 달 동안 제 호위를 해 주시면 됩니다.”
“좋소. 공자의 말을 따르겠소.”
“한 달이 지나면 말없이 무당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득어망전!”
“좋소.”
현문이 염화미소를 그리자 한빈은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쪽에서 설화가 조심스럽게 팽혁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 공자님,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소저는 누구십니까?”
팽혁빈이 당황한 듯 묻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설화요. 못 알아보시겠어요?”
“서, 설화라고……. 그럼 저 옆에 있는 소저는 혹시 청화?”
“네, 맞아요. 잘 지내셨죠? 대 공자님.”
청화가 눈을 반짝이며 답하자 팽혁빈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한빈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비밀입니다. 형님.”
* * *
며칠 후 한빈 일행은 드디어 사천당가에 다시 들어섰다.
그들을 맞은 것은 사천당가의 당기명이었다.
당기명은 공손하게 한빈을 맞았다.
하지만, 알은체는 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기명은 사천당가의 정문에서 그들을 향해 포권했다.
그것도 잠시, 당기명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과 같이 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황보만청이야 천수장에서 봤다고 하지만, 산동악가에 무씨검가까지 모두 같이 있었다.
그때 한빈이 슬쩍 눈짓을 했다.
그 신호를 알아챈 당기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을 전달받았다는 신호였다.
한빈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이로써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심미호와 헤어지며 써 준 서찰이 잘 전달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북팽가와 같이 온 세가들은 비교적 한적한 곳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모든 짐을 풀고 난 한빈은 기지개를 켜며 숙소에서 나왔다.
이제는 사흘 후부터 진행될 무가지회만 기다리면 되었다.
진지하게 계획을 떠올리던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이무명이 그렇게 기가 죽어 있던 이유를 어제에서야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비에게 불려 간 이무명은 공주와의 약혼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기가 막힌 상황에 이무명은 얼떨결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했다.
하지만, 현비와 공주는 이무명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황실과 얽매이지 않는 강호인의 특성상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착각한 것.
이무명의 입장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비와 공주는 칠음현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며 무가지회가 끝나는 대로 들르라 했다고 한다.
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인 게 상대는 열다섯도 안 된 어린애라는 것.
이무명에게는 청천의 날벼락 같은 제안이었다.
이무명은 한빈의 소매를 잡고 대신 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한빈은 활짝 웃으며 거절했다.
그림자 호위라면 그런 상황까지 대신 받아들이는 게 맞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너무했나?”
한빈이 씩 웃으며 별채의 전경을 바라봤다.
한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설화가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공자님, 뭐 깜빡하신 거 있지 않으세요?”
설화의 표정은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