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용혈의 주인 (1)
그 행사가 열리는 사천이기에 무림의 모든 세력은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강호의 법칙은 다르다.
얻어먹을 건 없지만, 뜯어먹을 것은 넘쳐 나기 마련이었다.
지금 사천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승냥이 무리로 넘쳐 나고 있다. 나루터는 한가하게 보였지만, 그곳을 감시하고 있는 세력들까지 여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물고 물리는 경극이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사들에게 밀려 무진과 영아 부녀가 한빈 쪽으로 다가왔다.
무사들의 기세에 눌려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무진.
그의 등에 업힌 영아는 숨이 찬지 헐떡거리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약한 몸이 무사들의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아가 고개를 떨구자 무진이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영아야!”
“…….”
고개를 떨군 영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화가 조용히 다가갔다.
“제가 봐도 될까요?”
갑자기 나타난 청화를 본 무진이 깜짝 놀라 영아를 감싸 안았다.
그것도 잠시, 청화의 눈빛을 본 무진이 긴장을 풀었다.
누가 봐도 도와주려는 듯 안타깝게 자신과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의원이시오?”
“의원은 아니지만, 비슷한 환자를 치료해 본 적이 있어서요.”
“의원은 아니지만, 환자를 치료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무진이 당황한 채 묻자 이번에는 설화가 끼어들었다.
“그런 게 있어요. 사정상 비밀이지만, 우리 동생이 환자를 치료한 건 맞아요.”
설화가 청화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들의 모습에 무진은 둘의 정체를 유추해 보았다.
하얀 무복에 단정한 외모.
누가 봐도 의녀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의원의 옆에서 보조하는 의녀의 특성상 직접 치료한 것은 아니지만, 환자를 돌본 것은 맞을 테니까.
무진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부탁드리오.”
“네, 알았어요. 아저씨.”
청화가 정신을 잃은 영아의 완맥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완맥을 잡은 청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름시름 앓는 환자의 상태로 봐서는 분명히 독이나 안 좋은 환경 노출되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환자의 몸에서는 독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청화는 공독지체를 믿고 치료를 해 보겠다고 나섰지만, 자신의 예상 밖의 상황이 나타나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청화는 다급하게 설화에게 물었다.
“고, 공자님 어디 계세요?”
“어, 어디 가셨지?”
설화도 고개를 좌우로 돌려 한빈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한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청화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심각합니까?”
“무슨 병인지 모르겠어요.”
“허허, 그래도 의녀님은 솔직하시구려.”
무진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무진의 모습에 청화가 재빨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제까지 의원들은 모두 아는 척을 했소. 하지만, 의녀님만은 솔직하셨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역의 모든 의원은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고는 돈을 뜯어 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솔직히 얘기해 주니 더욱 신뢰가 갈 수밖에 없었다.
“아…….”
청화는 탄성 이외에 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낮게 탄성을 흘리며 눈동자를 돌려 계속 한빈을 찾을 뿐이었다.
청화는 사실 지금 죽어 가는 영아라는 아이의 모습에서 예전 자신의 모습을 느꼈다.
한껏 감정이입이 된 상황.
의술은 모르지만, 꼭 치료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믿을 건 한빈밖에 없었다.
“공자님…….”
청화가 당황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뱉을 때였다.
그녀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나 은밀하게 나타났는지, 그들을 포위했던 무사들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그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설화와 청화의 옆에 앉았다.
청화가 다급하게 한빈을 불렀다.
“공자님,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인데?”
“여기 환자가…….”
청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은 용린검과 월아를 설화에게 건넸다.
“이것 좀 가지고 있어라, 설화야.”
“네, 공자님.”
설화가 고개를 끄덕일 때 한빈은 이미 환자의 완맥을 잡고 있었다.
순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환자의 몸속에서 친근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문을 피워 올리는 한빈의 모습에 청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병인가요?”
“내가 의원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헉.”
“물론 치료법은 알 것 같다만은…….”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용린검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청화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자님.”
“병이 아니니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지.”
그때 무진이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무진의 말에 청화는 그제야 한빈의 외모와 복장이 바뀌었음을 알아챘다.
한빈은 하얀 수염을 붙인 채, 착 달라붙는 붉은 무복이 아닌 조금은 여유가 있는 붉은 무복으로 바꿔 입은 상태였다.
청화는 한빈이 변장한 이유를 곰곰이 떠올리다가 눈앞에 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한빈이 변장한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설화에게 맡겼던 용린검을 다시 가져왔다.
한빈은 용린검의 손잡이를 정신을 잃은 환자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용린검의 손잡이를 그녀에게 쥐여 줬다.
순간 환자의 안색이 다시 돌아온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이 멈추듯 떨리던 눈꺼풀이 스르륵 완전히 감겼다.
누가 봐도 숙면을 취하는 모습.
순간 무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비밀일세.”
한빈이 고개를 젓자 청화가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다. 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전후 사정이 밝혀지기 전에는 속단은 금물이지.”
“아, 그렇군요. 공자님. 그런데 수염은 왜 붙이신 거예요?”
“저놈들 하는 짓으로 봐서는 한바탕 칼질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거하고 복장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에이, 뭔가 꺼림칙한 짓을 할 때는 변장은 기본이다. 청화야.”
한빈의 말에 청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설화가 나섰다.
“그건 공자님 말씀이 맞아. 이마에다가 이름표 붙이고 나쁜 짓 할 수는 없잖아.”
“아, 그러네요.”
청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쁜 짓이라니!”
“앗, 죄송해요. 공자님.”
설화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한빈이 웃었다.
“농담이다. 나쁜 짓이 맞을 수도 있지, 하하.”
한빈이 웃자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환자는 괜찮은 거죠?”
“그것도 지켜봐야지. 일단 우리는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자고. 여기 너희 간식 가져왔다.”
“네?”
“아무리 급해도 간식은 챙겨 와야지. 안 그래?”
말을 마친 한빈이 슬쩍 조금 전 앉아 있던 객잔의 이 층을 가리켰다.
순간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자신들의 간식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줄을 몰랐다.
물론 한빈은 나머지 짐을 챙기기 위해 객잔의 이 층에 들른 것이었다.
설화의 부담스러운 표정에 한빈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한빈의 웃음에 그들을 포위한 정의맹 무사들이 움찔했다.
그의 웃음에서 알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진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딸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워 보이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변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한 무진은 다시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지금 나루터는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선주를 둘러싸고 있던 정의맹 무사들은 벌써 몸을 돌려 다른 자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정의맹 무사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에는 사도련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지금 팽팽하게 눈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사도련의 무사 중 하나가 나와서 외쳤다.
“그자를 내놓아라!”
“그게 무슨 헛소리지?”
정의맹의 무사가 외치자 사도련의 무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교도의 목은 우리가 가져갈 것이다.”
“마교도의 목이라고? 어째서 그것이 사파의 것이더냐? 이 마교도는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
정의맹 무사가 검파를 움켜쥐며 턱짓으로 선주를 가리켰다.
눈이 마주친 선주는 찔끔하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자신이 졸지에 마교인이 된 상황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그는 어서 관아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만약 관아에서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만큼 무림인은 마교에 적대적이었다.
자신이 여기에서 죽는다면, 영원히 마교인의 오명을 벗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관무불가침이라고는 하나, 중원을 어지럽히는 마교인을 관에서도 달가워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겁에 질린 선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의맹과 사도련 사이에 설전이 이어졌다.
“정파가 마교와 맞선 게 언제지?”
“우리가 마교와 맞선 건 셀 수도 없지.”
“최근에 있었냐는 이야기다.”
“최근이라면…….”
정의맹의 무사가 생각에 잠겼다.
마교와 결전을 벌인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그때 사도련의 무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우리가 마교와 맞서고 있을 때 너희 정의맹은 방구석에서 방바닥이나 긁고 있었겠지?”
“그게 무슨 말이냐?”
“너희는 적룡대협이라고 들어 봤느냐?”
“흠.”
“영단산의 혈전 때 수많은 사도련 무사는 마교의 잔혈마도를 막다가 목숨을 잃었지.”
“…….”
“그때 사도련의 영웅이신 적룡대협이 동귀어진 하며 강호를 구하셨고…….”
사도련의 무사는 마치 천자문을 외듯 적룡대협의 공적에 대해서 읽어 나갔다.
뭐, 요지는 간단했다.
마교인을 막아 낸 것은 사도련이고, 그러니 마교인을 처벌한 권한은 사도련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던 설화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화는 한빈의 입에 걸린 미소를 보았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설화는 점점 불안해졌다.
한빈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항상 강호가 들썩였다.
물론 한빈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강호가 떠들썩해질 사건이 일어나곤 했다.
암제와의 혈투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설화는 사실 어질어질했다.
사실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지금은 시녀라지만, 설화의 본래 모습은 초특급 살수.
거기에 한빈이 옆에 있는데 두렵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이제는 좀 편안히 누워서 당과를 먹고 싶을 뿐이었다.
청화와 장신구도 좀 사러 다니고, 만금 전장의 사천지점으로 가서 야명주도 정리하고 싶었다.
이제 좀 여유를 가질 만했는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올라오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언니 왜 그래…….”
하지만, 청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휙!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간 먹구름은 대치 중인 사도련과 정의맹 무사 사이로 떨어졌다.
쿵!
굉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청화의 머리 위로 지나간 것은 먹구름이 아니라 거구의 사내였다.
굉음에 모두의 시선은 거구의 사내에게 향했다.
영아를 돌보고 있던 무진도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딸이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고수가 등장하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설화는 반가운 표정으로 거구의 사내를 바라봤다.
“왜 저 아저씨가 여기에…….”
“그러게요, 언니.”
청화도 신기한 듯 거구의 사내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