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폭풍전야 (5)
한빈이 탄 마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 감탄한 이는 짙은 눈썹에, 그 눈빛마저도 다른 이들보다 더 짙었다.
얼굴은 마흔 중반처럼 보이지만, 백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 백발 때문에 그의 눈동자는 더욱 검게 보였다.
그의 탄성에 흑의살풍이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저 나이에 대단합니다.”
“흑의살풍 자네는 내가 무엇 때문에 감탄하는 줄 알고 있나?”
“그 영악함에 놀라시는 게 아닌지요? 주군.”
흑의살풍이 사내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내의 이름은 강남 사도련주인 독고진이었다.
마휘를 통해서 강남 사도련을 지휘하지만, 정작 자신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고수였다.
백발만 아니라면 서른 중반의 무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의 피부는 탄탄했다.
하지만, 흑의살풍보다 나이가 위인 그였다.
그는 자신의 누이 독고련의 부탁으로 이렇게 사천당가로 향하고 있었다.
독고련의 부탁은 간단했다.
그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다치지 않게 감시하라는 것이다.
독고진은 누이의 부탁이 이해되지 않았다.
멱을 따려고 감시한 적은 있어도 보살피기 위해 감시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독고련이 인상을 구기자 바로 승낙했던 것이 며칠 전이였다.
그런 도중에 그 감시 대상으로부터 전서구를 받은 것이다.
전서구의 내용은 간단했다.
‘무가지회에서 벌어지는 일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이런 짤막한 문장이 전서구를 통해 전달되었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달려가 직접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도련주 독고진은 이내 생각을 거뒀다.
감시 대상인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하는 일이 황당해서였다.
갑자기 변장하고 나타나질 않나.
잠시 뒤에는 몇 마디로 대중을 사로잡질 않나.
한빈의 행보는 그야말로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계산이 깔려 있는 듯 보였다.
사도련주 독고진이 판단한 한빈은 무인이 아닌 책사에 가까웠다.
그의 입장에서 한빈의 무공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감만은 절대적이었다.
자신이 기세를 쏘아 보내자마자 한빈은 답장을 줬다.
기세로 답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죽이면서 답을 보냈다.
정말 흥미가 담기는 자였다.
독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 흑의살풍이 다시 물었다.
“제 답이 틀렸습니까?”
그 목소리에 독고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흑의살풍에게 답을 할 차례였다.
“아니네, 영악함이 놀랍긴 하지. 하지만 내가 더 놀라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성일세.”
“방향성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자의 의도를 모르겠네. 재미있는 점은 우리에게 서신을 보낸 이유도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야.”
“아무래도 하는 행동이 중구난방이지요.”
“어찌 보면 광오하기까지 한 자일세.”
“광오하다고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도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것을 보면 광오함을 넘어선 것이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주군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말씀입니까?”
“내게 답장을 보냈으니, 당연하겠지.”
“아, 그렇군요.”
“만약에…….”
독고진은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흑의살풍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내 생각에 못 미치는 자라면 나를 여기까지 부른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네.”
독고진은 자신의 검집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톡톡.
마치 칠현금을 튕기는 듯 경쾌한 소리가 났지만, 흑의살풍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흑의살풍은 한빈에게 알 듯 말 듯 한 묘한 인연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같은 일에는 엮이지 않고 싶었다.
한빈과 엮이면 일이 꼬인다는 것은 몇 번의 만남으로 증명되었다.
흑의살풍의 표정을 본 독고진이 물었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흔든 흑의살풍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가지회가 열리는 사천당가에서 자신과 사도련에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무가지회가 열리는 사천당가.
접객당에서는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찻잔에서 이제는 김이 사라지고 어색한 차향이 풍겨 나왔다.
그때 가주 남궁장천이 입을 열었다.
“대체 금와 상단의 상단주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남궁장천이 바라보는 곳으로 몰렸다.
남궁장천이 금와 상단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갑자기 금와 상단의 상단주가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금와 상단주는 얼마 전 용봉지회의 우승자에게 줄 보물을 구해 오겠다며 사천당가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그길로 자취를 감추었다.
금와 상단은 무가지회를 후원하는 가장 큰손이었다.
무가지회를 후원하는 만큼 이곳에서 나올 결실 중 몇은 금와 상단이 가져갈 것이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다 해 놓고 이제는 열매를 거둬야 할 때 말없이 사라진 게 영 찜찜했다.
물론 그들이 준비해 놓은 물품이나 음식들은 완벽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일꾼들이 있기에 행사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점점 일손이 더 필요해질 예정이지만, 사천당가 자체의 식솔도 만만치 않았기에 인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되었지만, 그가 만약에 납치라도 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가지회와 관련이 있다면?
사실 여기까지도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금와 상단은 금와 상단이고 무림세가는 무림세가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이번 무가지회에 들이닥칠 폭풍의 전조라면?
문제는 바로 이 점이었다.
어찌 보면 이 무가지회를 이끌어야 하는 최고 어른인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장천. 그는 미간을 좁혔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궁장천은 재촉하듯 턱짓했다.
남궁장천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위씨세가의 위지천이었다.
위씨세가라면 한빈과 전생에 악연이 있었던 가문이었다.
그는 아비를 대신해서 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위지천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남궁장천이 금와 상단에 대해 자신에게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위씨세가가 맡은 역할이 금와 상단과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씨세가에 말도 없이 금와 상단주가 사라졌다는 것이 조금 불안했다.
위지천은 아버지의 당부를 떠올렸다.
무조건 금와 상단에 협조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와 보니 협조할 대상이 없어졌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위지천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찝찝한 구석도 있었다.
금와 상단의 복장을 한 자가 자신의 동생인 위지약을 습격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나면 금와 상단의 상단주에게 직접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질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때였다.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무사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위지천에게 달려왔다.
그는 서찰 하나를 위지천에게 건넸다.
서찰을 받은 위지천은 주변을 둘러보다 남궁장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궁장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어서 확인해 보게. 상단주가 보낸 것일 수도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위지천이 고개를 숙이며 서찰을 뜯었다.
서찰을 편 위지천의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치 없게 금와 상단과 자신들의 밀약이 이 서찰에 쓸데없는 내용이 나오는 건 아닌지 해서였다.
서찰을 읽어 나가는 위지천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걱정하는 내용은 서찰에 없었다.
누구에게 보여 줘도 될 내용만이 서찰에 나와 있었다.
탁.
위지천이 서찰을 덮자 남궁장천이 눈매를 좁혔다.
“뭐라 쓰여 있는가?”
“직접 읽어 보시겠습니까?”
위지천이 서찰을 내밀자 남궁장천이 손바닥을 보였다.
“아닐세. 그냥 말해 주게.”
“이건 금와 상단주에게 온 서찰입니다.”
위지천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금와 상단이…….”
“혹시 상단주가 납치라도 당한 것인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지금 극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피부병이라고?”
“네, 그 피부병이 전염병은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그런 일이…….”
“그리고 용봉지회의 우승자에게 줄 상품은 구했다고 합니다. 그 상품은 결승전이 열리기 전날까지 보내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난감했습니다.”
위지천이 어색하게 웃자 주변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우리 십대세가가 하는 일인데 무슨 일이 있을 수가 없지.”
“네, 맞습니다.”
여러 세가의 대표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한쪽에서 힐끔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정의맹의 군사이자 제갈세가 가주의 동생인 제갈공민이었다.
제갈공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금 수상한 자를 찾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직 제갈공려와 제갈휘에게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납치된 제갈세가의 식솔에 대한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남궁장천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그럼 용봉지회는 중단 없이 속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소!”
탁!
남궁장천이 도장을 찍듯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 * *
몇 시진 후.
해가 뉘엿뉘엿 꼬리만을 남기고 사라질 때쯤, 사천당가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어느 야산의 산기슭.
귀락천에서 정의맹 사천지부의 무사들과 헤어진 제갈세가 식솔들은 은밀하게 산길을 이용해서 사천당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한빈이 마지막 남긴 부탁 때문이었다.
한빈은 귀락천에서 벌어진 일을 밖으로 알리지 말고 돌아오라 했다.
정의맹 사천지부의 무사들도 한빈이 남긴 의견에 동의했다.
암제가 머리라고는 하지만, 그의 잔당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암제가 남긴 잔당을 은밀하게 소탕하자는 의견에는 정의맹 사천지부의 수장인 문주익도 동의했다.
사사-삭.
그들은 풀숲을 헤치고 쉼 없이 산자락을 지나갔다.
가장 앞에서 이들을 지휘하는 이는 다름 아닌 가주인 제갈공영이었다.
제갈공영은 이제 기력을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였다.
그는 제갈세가의 가주답게 근처의 지리를 모두 머릿속에 넣어 둔 상태였다.
그는 계획한 대로 최단거리로 사천당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침없이 앞서 나가던 제갈공영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동생인 제갈공려가 들어왔다.
그 옆에는 무당의 현문이 함께했다.
그들의 표정을 본 제갈공영은 나지막이 외쳤다.
“모두 멈춰라. 여기에서 쉬어 간다!”
동시에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제갈공영의 모습에 뒤따라가던 제갈공려가 물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네가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런다.”
“저는 괜찮아요. 하루라도 빨리 사천당가로 돌아가서 팽 공자와의 약속을 지켜야죠.”
제갈공려는 이를 악물었다.
암제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고 지하 공간이 무너진 그 날.
제갈세가 사람들과 정의맹 사천지부의 무사들은 이를 악물고 통로를 복원했다.
하지만, 하루 정도 지나고 그 작업은 중단했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데다 얼마 안 가 모든 통로가 물에 잠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에 잠긴 통로를 복구하는 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현문도 비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갈공려 소저의 말이 맞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천당가로 돌아가서 악을 뿌리 뽑는 것이요. 무당과 나 현문은 팽 공자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요.”
그때였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