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화향만리(火香萬里) (4)
내공이 담긴 웃음소리에 사천당가의 접객실에 있던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눈썹을 꿈틀댔다.
그중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남궁장천이었다.
남궁장천은 눈매를 좁히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휘릭.
전각 아래로 내려간 남궁장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반대 방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껄껄.”
역시나 내공이 담긴 소리였다.
그 웃음은 바로 끊겼다.
마치 남궁장천에게 술래잡기를 하자는 듯했다.
남궁장천은 그 자리에서 바로 웃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도약했다.
파박!
그 소리는 그의 뒤에서도 이어졌다.
파박, 파박.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언제 아래로 내려왔는지 모두 남궁장천을 따르고 있었다.
“껄껄.”
다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가장 뒤쪽에서는 제갈공민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웃음소리를 향해 나아갔다.
뒤쪽에서 처져 남궁장천을 따라가는 이는 제갈공민만은 아니었다.
제갈공민의 옆에서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가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팽대위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제갈공민은 팽대위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며시 걸음을 멈췄다.
탁.
제갈공민이 걸음을 멈추자 팽대위도 걸음을 멈췄다.
탁.
둘은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봤다.
눈을 더 가늘게 뜬 쪽은 제갈공민이었다.
괴인이 나타나서 십대세가 대표들을 어디론가 유인하고 있는 상황.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잡으러 달려가는 십대세가의 대표들.
제갈공민이 판단하기에는 모든 것이 불길했다.
그는 불길함 속에서도 조용히 세가의 대표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괴인의 웃음소리가 자신의 형인 제갈공영과 나머지 식솔과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웃음소리만을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지금 십대세가 중 수상하게 보이는 것을 골라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이 가장 뒤에 서서 세가의 대표들을 살피는 이가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춘 제갈공민과 팽대위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잉.
가을도 아닌데 낙엽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번뜩 정신 차린 제갈공민이 먼저 물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아닙니다. 천천히 가면서 적을 살피려고 합니다.”
“적이라…….”
“예고도 없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적이 아닙니까?”
팽대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렇지요. 적이지요.”
자신이 살피는 것과 팽대위가 살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다.
제갈공민의 어색한 표정에 팽대위가 어깨에 힘을 주면 말을 이었다.
“적이 나타났으니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가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팽대위가 답하며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팽대위의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은밀히 날아온 전서구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한빈의 당부가 쓰여 있었다.
그는 한빈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실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공민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팽대위는 머리가 아닌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인다?
제갈공민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팽대위는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제갈공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갈가에 전해 주라는 전서가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갈 군사가 제갈가의 사람이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말을 마친 팽대위는 다급하게 품을 뒤져 동그란 대나무 통을 꺼냈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측근이 보낸 쪽지입니다. 제갈가의 사람에게 전해 주라 당부했는데…….”
“제갈가라고요? 우리 가문을 말하는 겁니까?”
“네, 생각해 보니 제갈 군사님이 제갈가의 사람 아닙니까? 이걸 전해 주게 되니 이제야 답답했던 가슴이 풀리네요.”
팽대위는 입에 물레방아를 달아 놓은 것처럼 설명을 토해 냈다.
말을 마친 팽대위는 시원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가락 마디보다 가는 대나무 통을 건넸다.
제갈공민은 대나무 통과 팽대위를 번갈아 봤다.
하북팽가에서 자신에게 쪽지를 건네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확인이 먼저였다.
제갈공민은 재빨리 대나무 통에 들어 있는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를 확인하는 제갈공민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것도 잠시, 흔들리던 제갈공민의 눈이 자리를 찾았다.
제갈공민이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이 쪽지를 보낸 분이 대체 누구십니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나쁜 짓을 할 친구는 아닙니다.”
팽대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제갈공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팽대위를 바라봤다.
“나쁜 짓이라니요. 이분은 제가 원하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원하는 소식이라니요?”
“혹시 쪽지를 열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갈가에 전해 달라는 건데 제가 왜 열어 봅니까?”
“허, 역시 하북팽가의 집법당주십니다.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정이시면 차라리 정의맹의 집법당을 맡아 보시는 건 어떨지요?”
“헉, 싫습니다.”
팽대위는 재빨리 손사래 쳤다.
사실 이 쪽지를 열어 보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것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쪽지만 전하고 제갈세가와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한빈이 당부한 내용을 보면 하북팽가만을 챙기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 정의맹의 집법당이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의맹의 집법당이면 하북팽가의 집법당보다 서류가 열 배는 더 많았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팽가의 명성을 요즘 자주 듣고 있었다.
그 위에는 이렇게 겸손한 집법당주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치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제갈공민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남궁 가주를 따라가면서 얘기를 나누죠.”
말을 마친 제갈공민은 힐끔 쪽지의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익히 알고 있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적벽대전.]
그것은 제갈가의 선조인 제갈량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어느 편이 될지는 잘 판단하십시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제갈공민의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제갈공민이 재빨리 외쳤다.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팽대위도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서 남궁장천을 따라잡았다.
백 걸음 앞에서 멈춰 있는 남궁장천과 십대세가의 대표들을 발견한 제갈공민은 잠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천천히 가시죠.”
“알겠소이다.”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궁장천과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멈춘 곳은 사천당가를 감싸고 있는 뒷산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산이 사천당가의 장원을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그 덕분에 사천당가는 사천 제일의 요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외세가 침략해 오면 사천당가 자체가 요충지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깎아지르는 절벽이 늘어선 뒤쪽에서 계속 웃음소리가 울렸다.
“껄껄.”
하지만 남궁장천과 세가의 대표들은 그 웃음을 더는 쫓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는 깎아지르는 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벽은 화경의 고수라도 오르기 힘들어 보였다.
그 절벽의 꼭대기에서 어스름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남궁장천과 세가의 대표들은 은은하게 달빛이 비치는 절벽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순간 달빛이 살짝 밝아졌다.
밝아진 달빛 덕분에 모두는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인이 호리병을 들고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황금빛 장포를 펄럭이며 여유 있게 호리병을 들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그 목소리에 남궁장천이 물었다.
“어느 고인이시기에 우리를 이리 부르신 것이오?”
남궁장천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황금색 장포의 사내가 답했다.
“대단하군. 역시 남궁가주의 배짱은 대단하외다. 껄껄.”
그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자 십대세가 대표들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때 황보만청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긴말 말고 누군지 정체를 밝히시오.”
황보만청이 나서자 남궁장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황보가주, 여긴 내가 맡겠소.”
“알겠소이다.”
황보만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하나, 세가의 대표는 여럿이었다.
갑자기 모두가 나서면 자칫 그것이 자충수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럴 시간이 있으시면 이리로 올라오시죠. 내 한잔 올리리다.”
“…….”
“뭐, 가만히 계신다면 제가 삼배를 올려야 하겠지요.”
사내는 어디선가 술잔 하나를 꺼내더니 호리병에 있는 술을 부었다.
그는 잔을 세 번 꺾는 시늉을 하더니 그것을 아래로 던졌다.
달빛을 받은 잔의 주변에는 투명한 기운이 일렁인다.
그 모습에 남궁장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무공을 겨루자는 도발이었다.
남궁장천은 날아오는 잔을 향해 뛰어올랐다.
절벽의 중간쯤에서 남궁장천이 막 잔을 잡았을 때였다.
위쪽에서 거대한 물체 하나가 떨어졌다.
남궁장천은 잔을 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커다란 나무통이었다.
잔을 잡은 채 하강하는 남궁장천.
그리고 남궁장천의 머리로 떨어지는 나무통.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그 나무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정도는 남궁장천이 혼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하고 십대세가 대표들을 가로질렀다.
쉭!
그들을 가로지른 은빛 섬광은 정확히 나무통에 박혔다.
푹!
은빛 섬광은 나무통의 방향을 바꾸었다.
나무통은 남궁장천과 십대세가의 대표로부터 멀어졌다.
나무통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은빛 섬광보다 몇백 배는 강한 섬광이 그들을 덮쳤다.
번쩍.
이어서 울리는 굉음.
쿠아앙!
십대세가 대표들은 재빨리 그들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절벽의 위쪽에서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껄껄.”
남궁장천을 비롯한 모두가 그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황색 장포의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외쳤다.
“머리를 자르고 가야 다음 수가 편했는데……. 안타깝구료!”
황색 장포의 사내는 호리병으로 남궁장천을 가리켰다.
그때였다.
남궁장천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는 뒤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제갈공민이었다.
그는 부채를 쫘악 펼치고 신선처럼 고고하게 남궁장천의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황금색 장포의 괴인을 바라봤다.
“머리라 하면 나를 말하는 것이오? 아니면 남궁세가의 가주를 말하는 것이오?”
“…….”
“뭐, 덕분에 내 판관필에 묻은 내는 벗겨 냈구료.”
제갈공민이 벽에 박힌 판관필을 가리켰다.
남궁장천을 비롯한 십대세가 대표들은 그제야 자신을 구한 것이 제갈공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때 제갈공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파괴력을 보아하니, 강호에서 쓰는 벽력탄이 아닌, 황실에서 빼낸 진천뢰로 보이오만…….”
제갈공민은 방금 폭발이 일어난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진천뢰라면 그것을 쓴 단체는 역적으로 몰린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진천뢰를 썼다는 것은 딱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적벽대전이라…….’
제갈공민은 재빨리 팽대위가 준 쪽지의 전언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은 적벽의 밑에 자신이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