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계가(計家) (7)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은 전각의 바로 아래였다.
한빈은 전각의 입구에서 손을 털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 한빈의 모습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모두의 말에 지붕 위에 있는 암제도 아래를 내려다봤다.
잠시지만 애타게 찾던 한빈이, 모습을 감췄다가 바로 발밑에서 나타나자 암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목격한 보법은 검에 담겨 있는 비급이 분명했다.
떨리는 암제의 눈빛에 한빈이 외쳤다.
“뭘 그리 놀라? 영감!”
“대체 지금 그것은 무슨 무공이냐?”
“무공은 무슨…….”
“그것도 비밀이더냐?”
“비밀은 아니야. 내가 사라진 자리를 잘 봐.”
“네가 사라진 자리를 보라니? 그게 무슨 말이…….”
암제는 말을 맺지 못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을 집중해서 보자,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수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친 것이다.
고개를 돌린 암제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세상의 모든 분노를 한곳에 모은 듯한 암제의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구멍으로 사라진 줄은 몰랐을 거야.”
한빈은 얄밉게 웃으며 지붕 위를 가리켰다.
“네놈은 대체!”
암제가 이를 악물었다.
한빈은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한빈이 모두의 이목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전 한빈은 파편을 걷어차며 바닥을 디딘 발에 천근추의 기운을 실었다.
동시에 보기 좋게 바닥이 꺼진 것이었다.
워낙 동작이 은밀한 데다, 한빈은 사라지자마자 반박귀진을 썼다.
이것은 용린검법의 초식 덕분이었다.
하지만 암제는 한빈이 기척을 어떻게 감췄는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분할 뿐이었다.
암제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전각에서 뛰어내렸다.
그에 맞춰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 삭.
한빈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암제도 기세를 뻗는다.
그렇게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그 추격전을 지켜보던 제갈공민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분명히 암제는 자리를 피할 것이라 위협했었다.
암제처럼 자신이 도망갈 것이라고 위협하는 적은 무림 역사상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위협은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무림세가 가주들이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간다고 위협하던 암제가 지금은 한빈을 쫓고 있었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빈이 도리어 암제를 위협한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기회다! 모두 암제를 잡아…….”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당무천이었다.
당무천은 무림세가의 가주들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우리가 상대할 자도 아니거니와, 지금 저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암제를 상대하고 있소이다. 다른 신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방해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당무천의 입은 육중한 성문처럼 굳게 닫혔다.
그 상태로 무림세가의 가주들을 쏘아봤다.
그들은 호랑이를 본 강아지처럼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다.
당무천은 조용히 추격전을 바라봤다.
당무천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대체 무슨 보법이기에 저리 신묘할꼬…….”
딱히 답을 듣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작게 답했다.
“구걸십팔보입니다.”
“구걸십팔보라…….”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광개가 빙긋 웃고 있었다.
광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개방의 광개라고 합니다. 저 팽 공자와는 의형제 사이지요.”
“허, 그렇군.”
그때였다.
뒤쪽에서 악비광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팽 공자와 의형제 사이입니다.”
“저 아이가 좋은 친구들을 뒀군.”
당무천의 말에 광개와 악비광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당무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형제라면, 혹시 저 아이의 계획을 알고 있는가?”
말투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당무천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 계획이라니요?”
악비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대로라면 어떤 결과도 없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저 아이가 분명히 신호를 보내올 것이라고 생각하네.”
당무천은 신묘한 움직임으로 암제를 따돌리는 한빈을 가리켰다.
한빈은 막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상태.
멀리서 일어나는 먼지를 보면 계속 도망치는 것이 분명했다.
악비광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당무천은 광개를 바라봤다.
“자네는 아는가?”
“저도 잘…….”
광개를 말끝을 흐리며 먼지가 일어나는 곳을 바라봤다.
광개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중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천하 십대세가가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암제를 잡든가 죽이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 뒤통수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뭐, 구파일방이라고 해서 그의 손에서 무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를 잡지 못하면 중원의 정파와 사파 모두가 칼날 앞에 목을 드러내 놓고 사는 기분일 것이다.
그때 청화가 당무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그래, 청화야. 왜 그러느냐?”
“언니는 공자님의 계획을 알고 있을 거예요.”
청화가 힐끔 설화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설화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 내가 어떻게 공자님의 계획을 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니는 공자님의 오른팔이잖아요. 그 증거로 우혈랑검도 가지고 있잖아요.”
“아.”
설화는 작게 탄성을 흘리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우혈랑검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청화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언니, 그렇지요?”
“뭐, 나한테 부탁한 게 있긴 한데…….”
“그런데요?”
“비밀이야.”
“앗.”
청화가 입을 벌리자 설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청화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가주전이 있는 곳이었다.
둘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화가 왜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가주전과 그 옆에 있는 붙어 있는 작은 별채.
바로 자신의 처소였다.
그곳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가주전을 바라본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설화가 청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때가 된 것 같네, 천천히 가 보자.”
“네, 언니.”
청화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와 청화가 가주전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당무천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더욱 쌓여 갔다.
설화와 청화의 걸음걸이를 보면 그다지 급하지 않다는 듯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당무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제갈공민도 가주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도 당무천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이 어떤 일을 벌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남궁장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제갈 군사.”
역시 모두의 관심사는 같았다.
그의 질문에 제갈공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제갈공민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가주전을 가리키는 남궁장천의 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민이 재빨리 물었다.
“남궁 가주님, 왜 그 먹물은 안 지우셨습니까?”
“먹물?”
남궁장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답했다.
“지워지지 않더군. 그건 제갈 군사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네?”
눈을 크게 뜬 제갈공민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남궁장천과 마찬가지로 손은 먹물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잘 안 지워질걸요.”
제갈공민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의 수하인 심미호가 있었다.
먹물에 손도장을 찍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건 흑유(黑油)거든요.”
흑유는 해남 땅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검은 기름이었다.
게다가 값도 만만치 않은 물건.
그렇게 비싼 흑유로 손도장을 찍게 했다니?
제갈공민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 * *
한빈은 적토마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었다.
파바박.
한빈은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암제가 쫓아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를 보면서 한빈은 조용히 암제가 가지고 있는 내공을 계산했다.
한빈이 이렇게 그를 끌고 다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상대의 내공을 소모시키기 위함이었다.
경공의 고하를 논할 때 빠지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속도와 지구력이었다.
빠른 속도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내공이다.
그렇다면 지구력은 어떠한가?
지구력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은 일정한 시점에 내공을 모두 회복시키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암제는 그렇지 않았다.
절대적인 내공의 양은 암제가 많지만, 한빈은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그것은 암제가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암제는 자신이 위험하다고 느끼면 언제든 이 자리를 벗어나서 숨을 것이다.
그 뒤 상황은 암제가 예고한 대로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암제에게 자신도 숨을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사실 한빈의 진심은 아니었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삶인데, 숨어서 지낸다는 말인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는 인간은 절대로 살려 둘 수 없었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불안한 상태로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었다.
물론 죽는다는 선택지는 한빈에게는 없었다.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암제의 속도가 살짝 느려지기 시작했다.
만약 초반에 격장지계로 암제의 속을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구걸십팔보를 극성으로 펼치고도 따라잡힐 수도 있었다고 한빈은 판단했다.
그만큼 암제의 보법은 대단했다.
파박.
뒤쪽에서는 암제가 기세를 뿜어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암제가 원하는 것은 아마 용린검일 것이다.
뭐, 용린검을 얻는다고 해도 암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강호에서 용린검의 주인은 한빈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전 깨달음으로 암제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도 대충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용린검의 검집인 화룡편을 오랫동안 수중에 가지고 있던 암제였기에 얻을 수 있는 기연이었다.
하지만 암제의 운은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한빈은 꼭 그렇게 만들 것이라 다짐하며 담장을 뛰어넘었다.
파박!
담장을 뛰어넘은 한빈의 시야에 심미호가 파 놨던 통로의 입구가 들어왔다.
한빈은 그 입구로 두더지가 숨듯 모습을 감췄다.
사삭.
눈 깜짝할 사이에 아래쪽으로 내려온 한빈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시간이 되자 한빈은 입구 쪽에 마련된 탁자 위에 있는 바가지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품속에서 은침을 꺼내 들었다.
바가지 속에는 심미호가 무림세가 사람들에게 손도장을 받기 위해 마련해 놓은 먹물이 담겨 있었다.
한빈은 그 바가지를 망설임 없이 뒤쪽으로 던졌다.
동시에 앞으로 손을 뻗었다.
‘백발백중!’
양손에서 바가지와 은침이 양쪽으로 날아갔다.
한빈의 손을 떠난 은침이 통로를 밝히고 있는 횃불에 명중했다.
투둑.
툭.
순간, 눈앞에 보이는 횃불이 한꺼번에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