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진정한 승자 (2)
한빈의 눈짓에 악비광이 재빨리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공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제갈공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긋날 뻔했던 무림세가의 화합이 위씨세가 덕분에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위씨세가의 위지천이 왜 양보했는지는 제갈공민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산동악가가 하북팽가에 양보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하북팽가가 용봉지회의 우승을 차지하고 하북팽가에서 십대세가의 수장이 나온다.
이것이 제갈공민이 예상하는 훈훈한 마무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산동악가의 악비광이 괴상한 표정을 짓자 제갈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것이다.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한 채 반대편을 바라봤다.
뭐지?
제갈공민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의 무인이 활짝 웃고 있었다.
설마…….
제갈공민의 가슴이 요동쳤다.
저건 분명히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사 공자가 어떻게 저기에?
혹시 쌍둥이인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어딘지 모르게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달랐다.
전에 한빈에게 느꼈던 분위기가 다소 가벼웠다면 지금 앞에 있는 한빈을 닮은 사내는 묘하게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일부러 기세를 피우지도 않는데 저런 중후한 분위기라니!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피워 올리는 저자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제갈공민은 일단 그의 무위를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자, 지금부터 비무를 시작하겠소.”
짝.
제갈공민이 손뼉을 한 번 친 뒤 물 찬 제비처럼 뒤쪽으로 물러섰다.
휙.
순간 비무대 주위에서 울리는 함성.
와아!
그들도 비무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산동악가가 하북팽가에 양보하고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북팽가가 수장의 자리에 오를 것이었다.
모두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소 문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소 문파의 무인들은 위씨세가의 모습에 살짝 실망한 상태였다.
위씨세가를 제외한다면 십대세가의 수장을 맡을 가문으로 누가 가장 적합할까?
그들은 하북팽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북팽가 사 공자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만은 아니었다.
십대세가 중에는 하북팽가가 가장 손실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비무대 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온 것이다.
동시에 악비광도 한 발 나온다.
악비광은 창을 앞으로 내미는 대신 창대를 바닥에 찍었다.
쿵.
상체를 기울이는 악비광.
누가 봐도 포권하려는 모습이다.
이것은 악비광의 진심이었다.
한빈의 생사와 관계없이 예를 표하고 싶었다.
사실 이전에는 한빈이 조금 얄미웠다.
하지만 암제를 끌고 동귀어진 한 한빈을 본 순간 그런 마음을 싹 날아갔다.
이제는 한빈에 대한 존경심만 남아 있는 악비광이었다. 악비광은 한빈이 무림세가를 위해 그렇게 희생을 할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강호를 어지럽히는 무리들과 맞서 싸우신 모든 무림세가를 위해 이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헉.”
악비광이 한숨을 터뜨렸다.
악비광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은 다시 몸을 돌렸다.
마치 공연이 끝난 예인처럼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포권했다.
비무대 아래는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역시 하북팽가다.”
“가만히 있으면 무림세가의 수장이 될 기회를 저렇게…….”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희생하는 것 봤잖아. 무공은 약해도 경공은 최고였어.”
“아, 그 사 공자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가슴이 울렁이네.”
“에휴, 죽은 사람은 잊어야지.”
“인재를 잃었으면 이득이라도 챙겨야 하는데 저리 양보를 하다니, 역시 하북팽가일세.”
비무대 아래의 끓어오른 분위기와는 달리 악비광은 어찌할 줄 몰랐다.
“혀, 형님, 그건 제가 할 말인데 먼저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뭐, 아무나 먼저 하면 어때?”
한빈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악비광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내공을 최대한 담아 외쳤다.
“산동악가도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하북팽가와 무림세가 여러분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어찌나 내공을 담았는지 비무대 바닥이 울릴 정도였다.
순간 웅성거리던 이들의 고개를 갸웃하고 비무대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러게…….”
그들의 말에 악비광은 다시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이 비무, 포기하겠습니다!”
그 말에 비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 당연한 말을 왜 저리 심각하게 외치나?”
“산동악가의 악비광도 수고했네!”
“그래, 수고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악비광을 향해 외쳤다.
악비광의 이마에 깊은 골이 생겨났다.
멋지게 양보를 하고 사람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독차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빈 때문에 존재감이 없어졌다.
그때였다.
제갈공민이 비무대의 가운데로 왔다.
그는 슬쩍 한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그의 심장이 다시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마무리 지으셔야죠, 군사님.”
“아, 그렇군.”
번뜩 정신을 차린 제갈공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공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는 제갈공민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제갈공민이 중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 승부는 둘 다 포기했기에 무승부요! 그럼 다음 비무는…….”
제갈공민은 말끝을 흐리며 본선에 오른 세가들이 적혀 있는 거대한 나무판을 바라봤다.
그곳에 남아 있는 승자는 사천당가밖에 없었다.
“대체 이걸…….”
제갈공민의 눈동자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제갈공민의 선언을 들은 좌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시만, 그럼 우리가 건 판돈은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판돈도 제법 크잖아.”
말을 마친 무사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본 곳은 저 멀리 담장 쪽이었다.
그가 담장 쪽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암제와의 격전 후 펼쳐진 이번 비무에는 내깃돈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십대세가 대표들의 선언 때문이었다.
한빈을 추모하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비무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천당가 담장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사천당가의 밖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판돈이 쌓이고 있었다.
무림세가 사람들은 대부분 사천당가의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판에 돈을 걸고 온 상태였다.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내기 판의 중심에는 하오문이 있었다.
사천당가의 담장 너머에서 하오문이 운영하는 도박장은 직접 판을 펼친 것이다.
* * *
하오문에서 제법 무공이 뛰어난 무사 하나는 담장 위에 걸터앉아 멀리 보이는 비무대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하오문의 무사가 마지막 비무 결과를 전했다.
“무승부입니다. 둘 다 포기했습니다. 무승부!”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 뭔가 김이 빠지네그려!”
“그러게 말이야.”
“그럼 우리 돈은 어떻게 된 건가?”
“승부를 맞힌 이가 없으니 다시 돌려받으면 되잖나.”
“아, 그렇군. 어떻게 무승부를 예측할 수 있었겠나. 자네 말이 맞네. 일 할의 수수료가 아깝기는 해도 잃는 것보다는 낫지.”
“그럼 판돈이나 돌려받으러 가세.”
그들을 담장 구석에 설치된 그늘막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하오문의 사천지부장이 부채 하나를 들고 있었다.
하오문 사천지부장의 이름은 백미랑.
사천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의 주인이자 스무 개가 넘는 도박장을 운영하는 여인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음지에 숨어 있는 하오문이지만, 사천에서만큼은 양지로 나와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양지로 나오게 되었을까?
그것도 사천당가와 청성파, 아미파 등 정파가 득세하고 있는 이곳에서 말이다.
그것은 백미랑의 교섭 능력 덕분이었다.
정파든 사파든 친구로 만드는 데는 삼 일이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삼일랑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별호를 갖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돈이 필요한 이에게는 돈을.
정보가 필요한 이에게는 정보를.
그녀에게 친구란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를 뜻했다.
필요한 것을 상대에게 던져 주고 나면 자신은 상대에게 항상 그 몇 배의 값어치를 받아 냈다.
지금도 사천당가의 아래에서 판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모두 사천당가의 원로들과 미리 협약된 사항이었다.
그녀는 그늘막에서 담장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백미랑은 담장 위에 앉아서 소식을 전하는 무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승부는 누가 이기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수수료였다.
백미랑은 이제까지 최대한 투명하게 판을 벌이고 투명하게 정산했다.
덕분에 백미랑이 관리하는 하오문은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백미랑이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대낮인데도 어깨선이 살짝 드러난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부채를 한번 부칠 때마다 상의가 살짝 들썩인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녀의 하얀 피부.
사람들은 백미랑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도 백미랑과 시선이 마주치면 슬쩍 고개를 돌리는 사내들이 대부분이었다.
백미랑은 그들의 시선을 즐긴다는 듯 부채질의 강도를 조절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백미랑이 부채를 접었다.
탁.
그러고는 눈매를 좁히며 상황을 살폈다.
그에 맞춰 수하 하나가 달려왔다.
“지부장님, 비무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래? 마지막은 하북팽가가 이겼겠네. 투쟁 없는 승리는 조금 시시하지. 꼭 주인 없는 꽃에 벌이 날아드는 것만큼 매력이 없어.”
“그, 그게 아니라…….”
“뭔데? 빨리 말해 봐.”
“하북팽가도 비무를 포기해서 무승부가 되었답니다.”
“그러면 다음 비무는 없는 건가? 이제 철수해야겠네. 나는 먼저 가 볼 테니까. 장 호위는 사람들에게 수수료 떼고 돈 돌려주는 거 확인하고 쉬어. 참, 사천당가와 위씨세가는 승부가 났으니 그쪽은 정산을 해 줘야겠지.”
“그게 아니라, 무승부를 맞힌 자가 있습니다.”
“뭐야? 몇 번째 비무를 맞힌 거야?”
“무승부가 만들어진 비무까지, 모두 맞혔습니다.”
“앗.”
백미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장부 줘 봐.”
“여기 있습니다.”
장 호위는 백미랑에게 장부를 건넸다.
장부를 건네받은 백미랑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승부의 결과를 맞힌 자가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백미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장 호위는 그런 백미랑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하오문의 사천 지부장 백미랑이 이렇게 당황한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 * *
모든 비무가 끝난 비무대 아래.
그곳에는 십대세가의 구성원들만이 남아 있었다.
제갈공민은 아직도 멍하니 무림세가의 이름이 적힌 출전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안 잡혔다.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백 걸음 정도 떨어진 전각 아래에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었다.
십대세가 대표들이 풍기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곳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