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진정한 승자 (3)
물론 그들이 이렇게 활기를 띠는 것은 한빈이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악비광은 비무대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한빈과 마주 보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은 한빈을 처음 마주했던 비무대 위에서의 표정 그대로였다.
창을 쥔 채 악비광이 외쳤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형님!”
“비광아, 너는 그 창 좀 놓고 얘기해라. 비무대에서부터 잡고 있던 창으로 누굴 죽이려고 그렇게 꽉 잡고 있어?”
“아, 죄송합…….”
악비광은 재빨리 창을 수습했다.
그때 광개도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니, 왔으면 미리 말 좀 해 주지.”
“광개는 일단 씻고 오고.”
“허허.”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현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의 현문도 제갈공민과 마찬가지로 한빈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살짝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 대화를 들어 보니 한빈은 역시 한빈이었다.
현문의 옆에 누군가가 소리 없이 앉았다.
현문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매화검협이라 불리는 서재오였다.
서재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문 어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문이 손을 들었다.
“그냥 선배라고 부르게.”
“앗, 배분이 있는데 어떻게…….”
“어차피 팽 공자와 엮인 사이 아닌가? 자네가 먼저 엮였으니 어찌 보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럼 선배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현문 선배님, 그런데 저 사람이 팽가의 사 공자가 분명합니까?”
“분명하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아까 비무대 위에서 보여 줬던 분위기도 그렇고. 전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나도 비무대 위해서 보여 줬던 묘한 분위기를 알고 있네. 마치 다른 사람 같더군,”
“다른 건 다 이해하지만, 비무대에서 팽 공자가 보여 줬던 행동은 이해가 안 됩니다.”
“행동이라…….”
“네. 예전의 팽 공자였다면 그렇게 하북팽가가 십대세가의 수장이 될 기회를 걷어찼을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게 악랄하게…….”
서재오는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멀리서 한빈이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오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어쩐지 전과 달라진 것이, 분위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현문이 말을 이었다.
“깨달음을 얻었나 보군.”
“귀가 밝아진 게 어떻게 깨달음입니까?”
“하하, 그거 보게. 하나도 안 변하지 않았는가?”
“뭐가 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분명 아까 비무대에서 승부를 양보하는 모습은 전에는 못 보던 모습입니다. 어떻게 맹수가 바로 앞에 있는 먹이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그때였다.
서재오의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서재오는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한빈이 웃고 있었다.
한빈과 서재오의 사이에서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탐낼 만한 먹이가 아니었어요, 서 대협.”
“팽 공자, 그게 무슨 말인가?”
“십대세가의 수장 말입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팽 공자, 십대세가의 수장이 어떻게 먹이가 아니라는 말인가? 십대세가라면 누구든 노리는 것이 바로 그 자리 아닌가?”
“그건 빼먹을 게 있을 때고요.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죠.”
“상황이 바뀌었다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서 대협.”
한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서재오도 한빈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살폈다.
서재오는 한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황폐해진 사천당가.
문제는 사천당가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무림세가에서 배신자들이 나왔다.
지난 싸움에서 무림세가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서 대협이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이제부터 한 오 년 정도는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짐을 가장 앞에서 짊어져야 하는 게 바로 십대세가의 수장이고요.”
“허, 그 정도면…….”
“일단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어느 가문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저곳에서 회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빈은 십대세가 수장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 * *
한빈이 가리킨 곳에서는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아직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구대세가였다.
십대세가 중 위씨세가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나머지 아홉 개의 가문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갈공민이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입을 뗐다.
“비무는 이렇게 무산되었으나, 일단 십대세가의 수장은 정해야겠습니다.”
“어느 가문이 좋겠소?”
남궁장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제갈공민이 하북팽가의 팽대위를 바라보며 답했다.
“아무래도 하북팽가가 좋겠습니다. 어떠십니까? 팽 대협.”
“하북팽가는 아직 부족합니다.”
“음.”
제갈공민은 살짝 침음을 삼켰다.
그 모습에 팽대위가 말을 이었다.
“비무 대회는 무산된 것이 아닙니다. 사천당가만이 결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머지 가문은 비무를 포기했으니…….”
팽대위는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무천을 번갈아 보았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당무천에게 모였다.
그때 남궁장천이 말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용봉지회의 승자는 사천당가입니다.”
“음.”
당무천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남궁장천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사천당가가 하북팽가의 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 걸리는군.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살아 돌아왔지만, 모든 무림세가가 그에게 빚을 진 것은 맞지 않나? 그렇다면 응당 하북팽가가 십대세가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보네.”
당무천의 말에 팽대위가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한빈이도 사천당가가 수장 자리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기도 하고요. 게다가 우리 하북팽가는 지금 그럴 여력이…….”
팽대위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을 보고 있자, 팽대위도 헛숨을 삼켰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모두 한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더니 정신이 없어 헛소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세가를 대표하는 수장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구대문파에서도 무시 못 한 자리였다.
무림세가 하나만 놔두고 본다면 거대 문파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대문파와는 머릿수가 달랐다.
무공을 쓰는 가문이 모인 것이 무림세가 연합이고.
무림세가 연합의 중심이 십대세가였다.
그 십대세가의 머리가 되라는 건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책임도 막중하지만, 그 권한도 막강했다.
하지만 한빈의 다음 행동에 팽대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의아해하는 팽대위의 앞에 서약서를 꺼내 놓았다.
생각해 보니 팽대위도 손도장을 찍고 사천당가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를 지났었다.
무림세가의 대표 중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지 않은 자는 없었다.
팽대위는 서약서의 내용을 보고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 서약서 자체가 십대세가의 수장이 가질 권한이었다.
책임은 없지만, 권한은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서약서였다.
그 서약서만 있다면 하북팽가가 십대세가의 수장 자리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단지, 믿을 만한 가문에게 넘겨주면 되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팽대위는 당무천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빨리 말해 보게.”
“당분간은 한빈의 치료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무천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보만청도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사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허허, 빨리 말해 보게.”
산동악가의 악소천도 재촉했다.
모두가 닦달하자 팽대위가 입을 열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자칫하면 무공을 영원히…….”
여기까지 말한 팽대위는 후기지수와 어울리고 있는 한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천운이지요.”
그의 말에 당무천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조심스럽게 팽대위를 바라봤다.
“사 공자를 내가 직접 봤으면 하네.”
“네, 알겠습니다.”
팽대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후기지수와 어울리는 한빈을 바라봤다.
사실 지금 한 말도 한빈이 전하라고 한 것이었다.
잠시 후.
한빈은 십대세가의 대표들 앞에 섰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살아 돌아왔을 때는 환호했지만,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듣자 걱정이 앞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들은 한빈에게만큼은 진심이었다.
이번 일도 일이지만, 이 중 한번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가문은 없었다.
당무천은 한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별일 아닙니다. 아래에서 갇히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어르신.”
“허허, 나를 치료해 준 것이 자네인데…….”
순간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황보만청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허, 그게 진짜였군.”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어린 나이에 그런 의술을 익히다니.”
악소천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한빈이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팽대위도 한빈이 왜 이러는지를 몰랐다.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전하라 했지만, 그가 보기에 한빈은 멀쩡했다.
갸웃하던 고개가 멈추고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대체…….”
당무천이 화들짝 놀라며 한빈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한빈의 오른팔에는 혈선이 거미줄처럼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린 것이 아니라, 흉터처럼 팔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정도 상처라면 근맥이 상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운명인 것이지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암제를 유인하고 저는 미리 묻어 놨던 폭약을 터뜨렸습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네.”
“저는 운 좋게도 미리 준비한 관 속에 들어가서 횡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기에 버티지 못하고 그만…….”
한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다시 당무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림세가를 구할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당분간은 힘쓰는 일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 머리라도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돕겠습니다.”
“허허, 하늘이 내린 인재로다.”
당무천은 한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빈은 자신의 부상을 확인시켜 무림세가의 대표들에게 다시 한번 빚을 상기시켰다.
한빈은 소매를 내리고 천천히 그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모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빈의 팔을 바라봤다.
한빈도 자신의 소매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부상을 입었다고 한 것은 거짓이었다.
오른팔에 돋아난 혈선은 용린검법이 알려 준 신검합일의 결과였다.
처음에 한빈은 신검합일이라는 네 글자를 그저 추상적인 의미라 생각했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초식일 것이라고.
하지만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용린검이 한빈의 오른팔에 흡수되었다.
용린의 기운을 흡수해서 내공을 만들고.
용린의 흔적을 찾아서 초식을 만드니, 용린검이 몸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오른팔에 흡수된 용린검 덕분에 땅속에서 나올 수 있었으니 그 힘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