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 오비이락(烏飛梨落) (7)
하오문도 몇 명이야 자신의 손으로 찜 쪄 먹을 수 있지만, 좁은 통로로 다수가 밀려든다면 자신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강호 속담에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때 통로 쪽에서 기척이 울렸다.
터벅터벅.
그 기척에 영호는 자신의 검을 잡았다.
그러고는 언제나 발검할 수 있게 준비하는 동시에 발바닥에 진기를 모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무사님.”
“헉.”
영호가 바람 빠진 돼지 오줌보처럼 헛숨을 토해 냈다.
그 모습에도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영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선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움직이셔야죠.”
“어딜 말입니까?”
“이제 볼일을 봤으니 빨리 나가야죠. 너무 어두워서 그런지 답답하네요.”
한빈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영호는 기가 찼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누구 때문이라는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재촉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영호가 답하지 않자 한빈이 재촉하듯 말했다.
“출발 안 하시나요?”
“그럽시다, 공자. 휴…….”
긴 한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 한빈이 물었다.
“제가 많이 늦었죠?”
한빈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영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나는 공자가 사고라도 친 게 아닌가 했습니다. 늦게라도 와서 다행이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못 기다렸을 겁니다.”
반은 진심이었다.
상대가 일을 저질러서 하오문에 잡힌 것이라면 서생이 가지고 있던 돈은 영영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때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출발 안 하시나요?”
“하오문의 통로는 미궁과 같아서 그냥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공자.”
“그럼요?”
“아까 우릴 안내했던 점원이 올 겁니다.”
“그렇군요.”
한빈이 고개를 끄덕일 때 어느샌가 하오문의 점원이 와서 그들을 안내했다.
잠시 뒤.
한빈과 영호는 가게 앞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어느덧 해가 꼬리만 남기고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새들이 퍼드득거리며 한빈과 영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영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날이 저물었는데 웬 새들이…….”
“모두 제 갈 길을 가는 것이겠지요. 우리도 잘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혹시 아는 객잔 있으신가요? 무사님.”
한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는 급한 것 같더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영호가 쓴 쪽지 덕분에 상황이 바뀌었다.
상대의 수를 알았으니 그에 맞춰서 대비하는 것이 맞았다.
지금 머리 위를 지나간 수많은 새는 한빈의 계획을 전할 것이었다.
한빈은 하북으로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반면, 영호는 아쉬운 듯 한빈을 바라봤다.
영호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노숙을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서생의 혈도를 제압한 뒤 돈을 홈쳐 달아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며칠 정도 기다리려고 했지만, 서생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한 시진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룻밤을 묵고 가자니!
영호는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입구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저벅저벅.
고개를 돌려 보니 면사로 얼굴을 가린 남색 경장 차림의 여인이 영호 쪽으로 걸어왔다.
영호가 보기에 무공의 수위는 자신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묘하게 걸음걸이가 가벼워 보였다.
처음에는 발만 보던 영호는 여인의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인의 본능이었다.
순간, 영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풀거리는 경장 차림이긴 해도 이상하게 몸매가 드러났다.
아마도 살살 불어오는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몸매가 과히 환상적이었다.
영호가 잠시 넋을 잃고 있을 때, 그녀가 다가와 앞에 섰다.
영호는 왜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섰는지 알 수 없었다.
영호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모습에 영호의 고개는 더욱 기울어졌다.
그녀가 인사한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서생이었다.
서생이 가볍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긴 웬일로…….”
탐탁지 않은 얼굴의 서생.
그런데 여인은 상큼한 웃음을 깔고 말을 이었다.
“호호. 아까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하오문에서도 호위하기로요.”
“아, 그거 말이군요.”
서생이 말을 하자 영호가 재빨리 나섰다.
“호위라고요?”
“네. 그 많은 돈을 가지고 계신데, 무사님 한 분으로는 부족하죠. 그래서 하오문에서도 호위를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저는 미랑이라고 해요.”
흑미랑이 영호를 보며 웃었다.
영호는 표정을 수습 못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인과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 불편했고.
자신의 일에 하오문이 끼어드는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여기서 발을 빼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호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힘이 되는 법이지요. 저는 좋습니다. 그런데 저를 도울 호위는 어디 있습니까?”
“전데요.”
흑미랑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영호가 눈매를 좁혔다.
영호는 하오문에 이런 여인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들어 봤다.
거기에 이렇게 가냘픈 여인이 호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것도 잠시, 영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서생을 제압하는 일에 흑미랑이라 소개한 여인 하나가 끼어든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녀의 혈도를 제압하고 숲속에 버려두는 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양지로 나오기 위한 희생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여인이 서생을 보며 말했다.
“공자님은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하죠? 아까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한빈이라고 합니다.”
서생이 말하자 영호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한씨 성을 가진 서생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실수도 기억이 났다. 호위까지 하기로 하고 상대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영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빈 공자셨군요. 저는 영호라고 합니다.”
“영호 무사님, 반갑습니다.”
한빈이 해맑게 웃었다.
* * *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으로 들어가자 점소이가 나왔다.
점소이는 셋을 번갈아 보다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들, 죄송합니다요.”
“대체 무슨 일인가?”
영호가 눈매를 좁히며 나서자 점소이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방이 지금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라고 한다면…….”
영호는 한빈과 흑미랑을 번갈아 봤다.
한빈은 입 모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사님이 잘 좀 해 보세요.’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영호는 자신의 무위를 보여야 함을 깨달았다.
이곳은 평범한 객잔.
보통 무림인이 오면 없는 방도 만들어서라도 내오기 마련이었다.
영호는 살짝 기세를 피우기 시작했다.
“음, 그렇다면…….”
영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소이가 말을 이었다.
“인근 마을에 역병이 돌아서 상인들이 모두 이곳으로 건너왔습죠. 덕분에 다른 객잔을 찾으신다고 해도 방이 없을 겁니다요.”
순간 영호의 기세가 바람 빠진 것처럼 확 줄었다.
역병이라고 하면 모든 일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주문현의 반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문현으로 가는 상인들이 갈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방이 한 개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휴, 그렇게 된 일이군.”
영호는 한숨을 내쉬며 한빈과 흑미랑을 바라봤다.
한빈과 흑미랑이 실망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마치 무림인이 그런 일 하나 못 하냐는 책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할 수 없군요. 셋이서 한 방에 묵어야겠습니다.”
“뭐, 그렇다면……. 쩝.”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영호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는 사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미안해지는 이 분위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 * *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침상도 세 개.
탁자도 세 개였다.
영호는 침상에 누워 한 가지 계획을 짰다.
그것은 오늘 둘의 혈도를 제압하고 한빈이라는 서생의 품에서 전표를 가지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누구의 혈도를 먼저 제압하느냐였다.
한빈이라는 서생의 혈도를 제압하는 것을 하오문도에게 들킨다면?
아니면 반대로 하오문 여자 무사의 혈도를 먼저 제압할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찝찝함이 등골을 간지럽혔다.
호위를 한다고 나선 걸 보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인데…….
아무리 봐도 삼류 수준이었다.
하오문에서 호위로 붙여 줄 정도면 적어도 일류에 준하는 무사여야 했다.
그렇다면…….
영호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하오문에서 붙여 준 여인은 무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사 때문에 얼굴은 못 봤지만, 유명한 기녀일 수도 있었다.
서생의 수발을 들 기녀를 붙여 주고 비용을 받는다?
그리고 진짜 무사에게는 미행을 시키고.
이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딱딱 맞았다.
분명 근처에 호위 무사가 은신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호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호위라도 한숨도 안 자고는 버틸 수 없으니 말이다.
밤에 못 자면 낮에 따라오지 못하고 낮에 따라오면 밤에 잘 수밖에 없었다.
화경의 고수라도 잠을 안 자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영호는 정신을 또렷이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보통 잠이 가장 깊게 드는 시간은 눕고 나서 한 시진 후.
영호는 한 시진 후에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눈꺼풀에서 점점 힘이 풀렸다.
거기에 의식도 점점 희미해졌다.
‘제기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영호의 의식은 끊겼다.
순간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놨다.
차가운 밤공기가 창문을 통해서 들어와 실내를 차갑게 식힌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밖을 바라봤다.
흑미랑도 일어나 있었다.
그때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
한빈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들어오라 하십시오.”
한빈의 명에 흑미랑이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아까 그들을 안내했던 점소이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쪽지가 몇 개 들려 있었다.
점소이는 한빈의 옆에 있는 탁자에 그 쪽지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한빈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을 뵈옵니다.”
“대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그게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공자님.”
점소이가 고개를 숙이자 한빈이 쪽지를 펼쳤다.
대부분이 개방에서 온 쪽지들이었다.
한빈이 전서구로 날린 부탁에 대한 답이었다.
점소이가 나가고 흑미랑이 조용히 다가왔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공자님.”
“뭘 말인가요?”
“저자요. 언제까지 저렇게 재워 둘 수도 없고. 불편하잖아요. 그냥 목을 치시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요?”
“일단은 그냥 두시죠. 이용 가치가 있는 자입니다.”
한빈이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는 영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흑미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웃음은 적에게 보이는 웃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 *
같은 날 새벽.
위씨세가의 가주전.
위씨세가의 가주 위상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네 명의 사내를 바라봤다.
가주전을 단번에 박살 낼 것 같은 기세.
끓어오르는 듯한 눈빛.
모든 것이 위상호의 현재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