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이삭 줍는 공자님 (3)
나머지 강남사호는 만일에 대비해서 영호 일행의 탈출 경로를 막기 위해 움직일 예정이다.
즉 이호와 삼호 그리고 사호는 어제 임무에서 실패했던 자객들을 끌고 포위망을 구축할 것이다.
영호는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휘릭.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은은히 풍겨 오는 고기 굽는 냄새.
목표의 모닥불 주변에서 붙어오는 냄새가 맞았다.
일호는 자신의 코끝을 슬쩍 건드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일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첫 번째 목표인 영호의 위치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일호는 목표가 은신한 장소를 향해 은밀하게 걸어갔다.
점점 강해지는 영호의 몸 냄새.
그는 숨을 멈추고 영호가 은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바라봤다.
일호는 검을 감싼 천을 풀었다.
순간 그는 눈썹을 꿈틀했다.
은신한 영호의 뒷모습에서 자연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람의 기운이 아닌 자연의 기운.
체향이 아니라면 다른 이라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
영호는 검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고민도 잠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검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룬다 해도, 자신이 윗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연의 기운을 풍기는 것으로 봐서 운기조식 중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재빨리 달려들어 검을 그었다.
휙!
달빛을 가를 것 같은 예기가 밤하늘을 갈랐다.
일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손끝에 목표를 베었다는 감각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휴.”
그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처음에는 만만히 봤는데 지척에서 느낀 기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었다.
허물어지는 상대의 신형.
그때였다.
스르륵.
순간 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괴하게 반으로 꺾인다.
뭐지?
일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타닥.
물러나서 보니 쓰러진 것은 사람의 몸이 아닌 나무토막이었다.
순간 일호는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함정이었다.
일호는 재빨리 검을 고쳐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귓가에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삭.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일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일호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의 눈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분명 서생이었다.
자신이 보낸 자객들이 말했던, 서생 복장의 무인.
그가 일호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그린 서생이 말했다.
물론 서생은 한빈이었다.
“자꾸 새끼를 치네.”
“네놈이 명을 단축하는구나.”
“혹시 관상 볼 줄 알아?”
“관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보름 안에 귀인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상이야.”
“미친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그 관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이제부터 관이 누구 것인지 확인해 보자꾸나.”
“맘대로 하시게나. 셋을 세고 시작하도록 하지.”
한빈이 검집을 어루만졌다.
그 모습에 일호가 입을 열었다.
“하나!”
한빈이 외쳤다.
“둘!”
말을 마친 한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호가 외쳤다.
“비겁한 놈! 셋을 세고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나?”
“뒤통수를 치려고 하던 게 누군데?”
말을 마친 한빈이 검을 뽑으려 했다.
그 모습에 일호는 더욱 간격을 좁혔다.
그가 보기에 상대는 절정 정도의 무사가 분명했다.
절정에 오른 무사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속도가 빠른 자가 장땡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격이었다.
간격을 좁힌다면 검신이 기다란 검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것이 초절정인 일호가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그때였다.
스릉.
일호의 예상처럼 서생이 검을 뽑았다.
일호가 보기에 서생의 검으로는 초식을 펼칠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일호는 씩 웃으며 자신의 팔에 장착한 단검을 꺼내 그었다.
챙.
일호가 눈매를 좁혔다.
상대가 자신의 검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좁은 간격에서 평범한 검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간, 목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서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
그 말과 동시에 서생이 일호의 견정혈을 찍었다.
순간 일호는 숨이 막혔다.
털썩.
그 자리에서 쓰러진 그는 그제야 서생의 검을 보았다.
서생은 반 토막 난 검을 들고 있었다.
그 반 토막 난 검이 좁은 간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서생의 무공이 위씨세가의 무공과 흡사하다는 점.
지금 혈도를 제압한 수법은 분명 위씨세가의 독문 무공인 소호비초였다.
풀숲에서 호랑이가 뛰쳐나오는 듯 날랜 손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점혈법.
왜 저 서생이…….
일호는 생각을 맺지 못했다.
서생이 일호의 입을 벌리더니 단약을 입에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일호는 누운 상태로 멀뚱히 서생을 바라봤다.
서생은 다시 손을 뻗는다.
픽.
순간 막혔던 혈맥에 기운이 돌았다.
일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일호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왜 죽이지 않고 해혈을…….”
“이젠 적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내 수하가 되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무슨 약속을 했단 말이오?”
“지금 심인멸혼단(心印滅魂丹)을 먹었잖아.”
“심인멸혼…….”
일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심인멸혼단이라면 해독제가 없다고 알려진 절정의 독이었다.
다만, 목숨을 앗아 가지는 않는다. 그저 상대에게 고통을 줄 뿐이라 알려진 독이다. 문제는 그 고통의 정도였다.
혼이 사라질 정도의 처절한 고통을 준다고 강호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때 한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단전에서부터 세 뼘 위를 만져 봐.”
한빈의 말에 일호는 슬쩍 그곳을 더듬어 봤다.
순간 일호는 비명을 질렀다.
“으억!”
하지만, 비명은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다 말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
그러자 한빈이 일호의 입 속에 다시 환약 하나를 털어 넣었다.
순간 일호가 눈에 생기를 찾았다.
일호가 정신을 차리자 한빈은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일호가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대협.”
“동료들 있지? 일단 데리고 와.”
“…….”
일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나는 그냥 가 볼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리는 한빈의 모습에 일호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동료를 배신할 수는 없소!”
“알았어. 나중에 보자고.”
한빈이 손을 흔들자 일호가 놀라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협.”
일호는 지금 일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알았다.
상대는 마교나 사파의 인물이 분명했다.
그것도 그들 중에서도 절대고수로 군림하는 이가 분명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위상호가 지금의 상황을 모르고 보냈을 것 같아?”
“네?”
“너희 가주 말이야.”
“…….”
“너 같으면 좋은 반찬이 나오는데 나눠 먹겠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영호가 진짜 배신한 거로 보여?”
“그렇다면…….”
“토사구팽.”
“헉.”
“나도 위씨세가에 당한 게 있기에 알고 있지.”
한빈이 씩 웃었다.
마치 자조하는 듯한 그 웃음은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한빈은 실제로 이 순간, 전생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맹주였던 위상호에게 토사구팽당했으니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호도 몇 년 후면 토사구팽당한다는 점이다.
한빈의 말에 일호는 입을 딱 벌렸다.
“허, 그럴 수가…….”
생각해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음지에서 박박 기던 영호가 위씨세가를 배신한 다라?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거기에 이런 고수가 버티고 있는데 위상호가 몰랐다고?
그것도 말이 안 되었다.
일호는 이를 꽉 깨물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은 위씨세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일호는 갑자기 의심 하나가 생겼다.
“대협은 누구십니까?”
“그건 비밀이고. 일단 동료들부터 불러와 봐. 내가 시켰다고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 뒤쪽을 가리켰다.
일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흑미랑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왜 안 죽이는 건가요? 공자님.”
“이용 가치가 있습니다.”
한빈이 씩 웃으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호는 실제 마교와의 전쟁에서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는 귀검대 소속은 아니었지만, 한빈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주인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몇 번씩 위상호를 위기에서 구해 줬던 인물.
한빈의 계획은 위상호의 팔다리를 자르기보다는 그 팔이 그의 목을 겨누도록 설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무공이었다.
한빈은 위상호가 마지막 남은 암제의 잔당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 윗줄을 만날 수도 있는 법.
한빈은 지금부터 은밀하게 자신만의 칼을 준비해야 했다.
강남사호는 그 첫 번째 칼이 될 수도 있었다.
흑미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에게 도망가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한빈은 일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웃었다.
흑미랑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기척이 들려오자, 한빈은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떨어진 이삭을 주워야 할 때였다.
* * *
다음 날 아침.
영호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헉, 또 잠들다니!”
영호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영호는 간밤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휘둘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살폈다.
다행히 검에는 사용한 흔적이 없었고, 다른 곳도 멀쩡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복을 확인하고는 입을 탁 벌렸다.
자신의 의복이 앞이 완전히 잘려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호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히도 몸은 상처 없이 멀쩡했다.
이쯤 되자 자신이 남을 해하는 것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정도 증세라면 자신의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몰랐다.
그때 한빈이 쓱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사님.”
“제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제가 어제 사라졌습니까?”
“저는 모르지요. 무사님은 어제 바깥쪽을 경계한다고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걱정돼서 이렇게 찾아 나선 겁니다.”
“헉.”
영호는 입을 벌렸다. 그제야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는 자신이 은신하고 있던 장소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린 의복을 확인한 영호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검을 사용한 흔적은 없지만, 어젯밤에 자신이 한바탕했음이 분명했다.
영호는 이제 임무가 문제가 아니었다.
영호의 표정을 본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 몽검이라는 걸 없앨 수도 있습니까?”
“기연인데 왜 없애려고 하십니까? 제가 방법을 알고 있긴 한데…….”
“정말입니까? 공자.”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걸 드시지요.”
한빈은 영호에게 환약을 하나 건넸다.
그때 뒤쪽에서 흑미랑이 다가왔다.
한빈과 영호의 대화를 듣던 흑미랑은 입을 딱 벌렸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약은 한빈이 일호에게 먹였던 환약이었다.
놀란 것은 흑미랑뿐이 아니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네 쌍의 눈동자가 비둘기 날갯짓하듯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