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사람을 남기는 장사 (9)
이것만은 묻고 마무리 지어야 했다.
표정을 수습한 위상호가 물었다.
“왜 사파가 정파의 일에 관여한단 말인가?”
“남이 잘되는 꼴은 이상하게 보기가 싫어서 그렇소만……. ”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위상호의 얼굴빛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주화입마에라도 걸린 것처럼 감정의 소용돌이가 표정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위상호의 앞에는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의 모습만이 보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소이다. 그러니까…….”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수수께끼를 내겠다는 것이었다.
입술로만 말하는 한빈의 모습에, 위상호는 미간을 좁혔다.
기가 찼지만, 위상호는 상대의 입술에 집중해서 그 뜻을 살폈다.
순간 위상호의 눈이 커졌다.
상대는 ‘지금까지 잘 있었소, 구 번 양반?’이라며 안부를 묻고 있었다.
‘구’라는 숫자는 위상호가 암상에서 쓴 숫자였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위상호의 검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인 격렬한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치가 떨린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위상호는 지금 치가 떨리는 것을 넘어서 검 끝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치솟는 이유는 간단했다.
암상에서 곡식 경매에 성공했지만, 당시 뒤끝이 찝찝했었다. 그 이유는 무리하게 가격을 올려 버린 경쟁자 때문이었다.
적룡대협이란 작자가 자신이 암상에서 쓴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로 적룡대협도 암상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매의 가격을 무한정 올려 버린 인물이 바로 적룡대협일 수도 있었다.
덕분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암상 주인이 주선한 자에게 빌렸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가문이 통째로 넘어가게 생겼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위상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누군가가 위씨세가를 옭아 넣기 위해 파 놓은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위상호는 분기탱천하여 상대를 바라봤다.
단전에서 가마솥이 끓듯 진기가 치솟아 올랐다.
갑자기 흥분하자 진기가 통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위상호는 재빨리 분을 삭이며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물어보시지요.”
“혹시 나에게 곡식을 팔았던 행수와도 관계가 있소?”
“나는 수레를 불태우는 그런 양심 없는 행수는 모르오.”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은 손을 휘휘 저었다.
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강하게 부정하는 한빈의 모습에 위상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네놈!”
딱 한마디였지만, 성벽에서 먼지가 떨어질 정도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강유찬마저 위상호의 사자후에 눈을 떴으니, 그 위력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한빈은 검도 뽑지 않고 묘한 동작을 취했다.
한빈이 귀를 막는 모습에 위상호가 잠시 멈칫했다.
한빈의 동작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한빈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 속았는가?”
순간 위상호는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이곳에서 너를 지울 테다!”
“얼마든지.”
한빈도 위상호에게 달려들었다.
용호상박의 기세.
누가 용이고 누가 호랑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기세가 모두의 살갗을 따끔거리게 했다.
오죽하면 옆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위지천과 위지약마저 자리를 피했다.
위상호와 한빈 간의 거리는 다섯 걸음.
위상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첫 번째 초식에 담겠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한빈은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왼팔에 만월은 숨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검집에 가 있을 때 한빈은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서로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지자,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허장성세.’
동시에 한빈이 외쳤다.
“이놈!”
그 외침에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함이 찾아왔다.
허장성세는 자신의 무공 수위보다 높다면 찰나의 효과가 있었다.
한빈은 그 순간을 파고들려 한 것이다.
허장성세의 효과는 순식간의 공간을 장악했다.
정신을 차린 강유찬까지 다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한빈은 재빨리 위상호를 살폈다.
위상호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분명 허장성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재빨리 만월을 들어 그의 목에 겨눴다.
그때였다.
위쪽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추가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몸을 회전시키며 한빈은 살기가 느껴지는 간격에서 벗어났다.
그때 한빈이 있던 자리에 굉음이 울렸다.
팡!
그곳에는 위상호가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가 검을 역수로 잡고 위에서 아래로 찍은 것이다.
한빈은 고민 없이 재빨리 성문 밖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위상호가 외쳤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내가 졌소!”
한빈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외치자, 위상호가 사자후를 내지르듯 외쳤다.
“뭐라 했느냐?”
한빈은 잠시 멈춰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졌다 했소. 나중에 봅시다.”
“이런 미친. 네가 그러고도 사파의 정신적인 지주 적룡이더냐?”
“그건 모두 허명에 불과하오. 그러니 내 별호는 신경 쓰지 마시오.”
한빈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위상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위상호는 순식간에 성문 앞 돌다리 위에서 나타났다.
돌다리 위를 지나려던 한빈은 재빨리 멈췄다.
한빈은 팔짱을 낀 채 위상호를 바라봤다.
한빈의 눈빛에는 처음으로 의문이 맴돌았다.
지금 한빈은 구걸십팔보를 거의 극성까지 펼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걸음을 따라잡는다고?
한빈은 본래 성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위상호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따라잡힌 것이다.
경공만 보면 위상호가 암제보다 위였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한빈은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갑자기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드르륵.
육중한 성문이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닫혔다.
성문이 닫히자 한빈은 뒤쪽에 손짓했다.
“매화검협, 뒷일을 부탁하오.”
“알겠소이다.”
성벽에서 우렁찬 소리와 함께 누군가 손을 흔든다.
그의 소매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마치 매화를 수놓은 깃발을 흔드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한빈이 다시 앞을 바라봤다.
“성문은 화산파가 가져갔군.”
한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이것은 한빈의 계획이었다.
계속 지켜본 위상호는 전생의 기억보다 더 위험한 자였다.
일단은 그의 손과 발을 끊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손과 발이란 가문의 식솔들.
성문을 걸어 잠그면서 위씨세가의 식솔은 성안에 갇히게 되었다.
성 위에 있던 매화검수는 매화검협 서재오였다.
한빈은 미리 서재오와 약속해 두었다.
한빈의 신호 덕분에 서재오는 허장성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그는 한빈과의 약속대로 성문을 닫았다.
한빈의 뜻을 알게 된 위상호는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따위 성문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다 보느냐?”
“저 성문을 부수면 내란죄에 기물 파손까지…….”
“놈!”
위상호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것은 살기를 담은 미소였다.
마치 혈향까지 풍기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빈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쿵. 쿵.
한 걸음 한 걸음에 실린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에 익은 무공이었다.
쿵. 쿵.
지금 그가 밟고 있는 것은 바로 태극검제가 주고 간 태극칠성보였다.
완벽하게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운이 비슷했다.
태극칠성보와 저 보법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이 분명했다.
같은 뿌리에 태극칠성보에는 태극의 외형을 입힌 것이고, 저 무공은…….
아마 살기 가득한 혈향을 입힌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펼쳤다.
‘일촉즉발.’
한빈은 위상호를 향해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몸을 뒤로 날렸다.
일촉즉발의 기운이 만월에 맺힌다.
푸른 기운이 맺힌 만월과 한빈이 화살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때였다.
위상호의 마지막 걸음이 신묘하게 움직였다.
그 마지막 걸음은 한빈도 보지 못했다.
한빈은 재빨리 일촉즉발의 초식을 멈췄다.
돌다리를 벗어나려던 한빈의 몸이 낫처럼 꺾였다.
한빈은 가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위상호가 한빈이 날아가던 방향에서 나타났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팡!
튀어 오르는 파편이 분수처럼 흩어졌다.
파바박.
돌가루가 가라앉자 그곳에 위상호가 미소를 피우며 서 있었다.
한빈은 뒤로 물러나며 힐끔 바닥을 살폈다.
그것은 상대의 무공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두 번의 격돌로 한빈이 느낀 점은 하나였다.
위상호의 무공은 일반적인 정파의 무공과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용린검법의 무공과 닮아 있었다.
한빈은 본래 무공의 격차를 속도로 메꾸려 했다.
하지만 그 속도에서 상대가 위였다.
자칫하면 여기서 골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위상호가 물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사정을 봐주지는 않을 것이네.”
“…….”
한빈은 답하지 않고 움푹 파인 바닥을 만졌다.
위상호가 펼친 보법의 흔적이 남은 곳이었다.
태극검제가 보여 줬던 태극칠성보와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다른 보법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빈은 아예 쪼그리고 앉아 그가 남긴 흔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투 중에 바닥을 관찰하는 상대의 모습에, 위상호는 기가 찼다.
그에 대해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을 놓고 있는 상대의 목숨을 끊어 놓기는 아까웠다.
압도적인 힘에 눌린 상대가 살려 달라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위상호는 노기를 띤 얼굴로 물었다.
“적룡, 너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잠시만 기다리시오. 분석이 끝나 가오.”
“무엇을 분석한다는 말인가?”
“당신의 무공.”
말을 마친 한빈이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숨을 토해 냈다.
“휴……. 힘들군.”
“흠.”
“이제 당신에 대한 분석은 끝났어. 제대로 상대해 주지.”
“그럼 들어오너라.”
위상호가 손을 까닥이자 한빈이 손뼉을 쳤다.
짝!
짝!
손뼉 치는 소리는 제법 컸기에 성문 밖에서 경계하고 있는 금의위 무사들이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위상호가 코웃음 쳤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적룡대협이 싸움을 피하고자 꼼수나 쓰는 시정잡배였다니!”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한빈이 손을 내저을 때였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울렸다.
저벅저벅.
내공이 담긴 발소리였다.
그 소리는 한빈의 뒤에서 들려왔다.
한빈과 위상호가 동시에 그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남녀 한 쌍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남녀의 등장에 금의위 무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남녀의 정체가 적룡대협의 아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성 밖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금의위 무사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은 적룡대협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도하던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의위 무사 중 몇몇은 위상호의 표정을 똑똑히 봤다.
위상호는 걸어오는 남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누가 봐도 아군을 대하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