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내가 누군지 알아? (1)
그릇을 두러 소군에게 갔던 청화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잠이 깊이 들었나 봐요. 대답도 안 하네요.”
“그냥 놔두고 우리 먼저 먹자.”
한빈의 말에 모두가 식사를 시작했다.
한참을 먹던 설화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달이 밝네요.”
“보름이잖아요, 언니.”
그들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던 소군이 눈을 살짝 떴다.
달 때문일까? 아니면 모닥불 때문일까?
소군의 눈은 마치 붉은색 비단을 씌워 놓은 것처럼 붉었다.
소군은 계속 보름달을 응시했다.
계속 눈 속의 붉은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의 눈은 대장간의 붉은 쇳물처럼 묘한 기운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 기운은 모닥불이 일렁이는 기운보다 몇 배는 밝았다.
순간 그 빛이 점점 작아졌다.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는 좁쌀 크기의 붉은빛만 남겼다.
점점 입꼬리를 올리는 소군.
그의 얼굴에는 순수함은 사라지고 묘한 표정만이 남았다.
소군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제까지의 기억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안개처럼 희미했다.
소군은 분명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자신은 신교의 소교주였다.
교내에서는 소마군이라 불린다.
친한 이들은 소군이라 부르기에 뇌리에 소군이란 호칭이 남아 있었던 것.
어린 나이에 소교주의 자리를 약속받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백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마령지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반쪽짜리 마령지체였다.
이 때문에 마령지체로 모아 놨던 마기를 다 쓰고 나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거기에 기억까지 잃게 되는 것.
지금 떠오른 기억도 일부분에 불과했다.
자신이 신교의 소교주라는 것.
자신이 마령지체를 타고났다는 것.
자신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
이 세 가지 이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군은 눈이 뚫어져라 보름달을 바라봤다.
그가 보름달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보름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기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소군의 눈앞에 보름달만큼 하얀 얼굴이 들어왔다.
동시에 소군은 숨을 참으며 눈을 다급하게 감았다.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너구나.”
“…….”
소군은 모른 척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모른 척해?”
얼굴까지 쓱 내밀며 달빛을 가리자, 소군은 더는 자는 척할 수 없었다.
소군은 눈을 비비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답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
소군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흠, 이제는 막 나가는구나.”
“아, 공자님. 제가 정신이 없어서 다른 사람으로 오해했어요. 죄송해요.”
소군이 고개를 크게 흔들자 상대가 물었다.
“왜 자는 척했지?”
“자는 척한 게 아니라 진짜 자고 있었어요.”
“그게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까?”
“제가 어떻게 해야…….”
소군은 말끝을 흐리며 상대의 눈치를 봤다.
물론 여기서 상대란 한빈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답 대신 손을 뻗었다.
픽.
손을 뻗은 한빈은 정확하게 소군의 어깨를 눌렀다.
순간 소군은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그 자리에서 뻗었다.
마혈과 아혈을 그대로 제압당한 것.
소군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문득 자신이 마기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령지체의 마기는 평범한 무사들은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가 평범한 무사가 아니라면?
하긴, 저 공자라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하도 찾지 못하고 신교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대로 죽는 것일까?
소군의 머릿속에는 몇 안 남은 흐릿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설화가 다가왔다.
“공자님, 왜 그래요?”
“없어진 네 당과 말이야. 알고 보니 요 녀석이 가져간 것 같은데, 시치미를 뗀단 말이지. 여기 봐. 꼬치가 떨어져 있잖아. 꼬치 주변에 개미가 꼬이는 것을 보면 당과 꼬치가 확실하고…….”
“공자님, 당과 하나 가지고 조그만 애를 점혈까지 하시면 어떻게 해요?”
“설화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건 강호의 오랜 진리다. 그런 면에서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하지 않겠니?”
“그래도 너무해요. 혈도는 제가 풀게요.”
설화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소군의 점혈을 풀기 위해 손을 썼다.
순간 소군은 어이가 없어 기혈이 역류할 뻔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줄 알았는데 어이없게도 당과 하나 때문에 이렇게 제압하다니!
거기에 자신은 당과를 먹지도 않았다.
이것은 모함이었다.
소군은 억울한 마음에 점혈이 풀리면 바로 소리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점혈이 풀리기는커녕 몸은 점점 굳어졌다.
소군은 눈동자를 돌려서 설화를 바라봤다.
시야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혈도를 풀려 애쓰는 설화의 모습이 보였다.
픽, 픽.
설화는 연신 혈을 찔러 대며 소군의 마혈과 아혈을 풀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화가 손을 쓰면 쓸수록 소군의 몸은 굳어졌다.
소군은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소군의 외침에도 설화는 땀을 흘리며 혈도를 풀려 애썼다.
한참을 애쓰던 설화가 한숨을 쉬며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님, 아무리 해도 해혈이 안 되네요.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자꾸 남의 영업 비밀을 훔치려고 하지 마라, 설화야.”
“그래도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그건 나중에……. 그리고 이 아이는 평생 몸을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르겠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제압한 혈도를 네가 흩트려 놓은 덕분이야.”
“저 때문이라고요?”
“이제는 누가 와도 이 아이를 정상적으로 돌리지 못해.”
“헉.”
설화가 입을 막았다.
소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기억도 돌아오기 전에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소군은 조용히 보름달을 바라봤다.
순간 기억이 하나 더 추가됐다.
자신이 왜 신교에서 나왔는지 기억난 것이다.
기억이 돌아온 소군은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그 외침에 산새들이 날아올랐다.
푸드덕.
순간 설화는 소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이제 혈도가 풀렸네.”
“…….”
소군은 자신의 입을 다급하게 막았다.
그때 설화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생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면서요?”
“물론, 내가 없다면 말이지…….”
“앗, 공자님, 애가 놀랐잖아요.”
설화가 조심스럽게 소군을 가리켰다.
한빈은 설화를 무시하고 쓱 소군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네가 누군지 아느냐고?”
“그, 그게…….”
소군은 말을 맺지 못했다. 기억도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당황한 소군의 모습을 보던 한빈이 팔짱을 끼더니 소군을 쓱 살폈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소군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일단 여기에서 벗어난 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맞았다.
그때 청화가 끼어들었다.
“공자님, 제가 심문할까요?”
“혹시 독으로 심문하려고? 그러다 애 잡지. 아서라, 아서.”
한빈이 손을 흔들며 돌아서자 청화가 눈을 찡긋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서 모닥불로 향하던 한빈은 조용히 보름달을 바라봤다.
한빈이 느낀 기운은 분명히 마기였다.
그것도 고도로 정제된 순수한 마기.
문헌에 의하면 그런 마기를 지니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어찌 보면 앞으로 일어날 정마대전의 열쇠를 손에 쥔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이 열쇠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였다.
그 열쇠의 성질에 따라 강호의 흐름이 바뀔지도 몰랐다.
일단은 이 아이의 마음을 여는 것이 먼저였다.
* * *
이틀 후.
유림 서원이 있는 군자현.
유림 서원 때문인지 이곳 거리에는 유생들에게 필요한 도구를 파는 가게들이 제일 많았다.
거리를 둘러보던 한빈이 한 가게로 들어갔다.
한빈은 거침없이 붓과 종이를 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의 앞에는 붓과 종이가 한가득 쌓였다.
가게 주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빈에게 말했다.
“유생 같아 보이오만, 이렇게 많은 종이와 붓은 필요 없소. 유림 서원에 들어가면 기본적인 물품은 제공된다오.”
가게 주인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의 앞에 은전 몇 개를 올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아니, 나야 팔면 좋지만, 그리 많은 종이는 필요가 없다고 해도…….”
가게 주인은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뒤쪽에 있던 설화가 순식간에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마 모자랄지도 몰라요.”
“허허, 공부에 필요한 물품은…….”
“이건 공부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거든요.”
“종이와 붓이 공부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라면 대체…….”
“아저씨, 그건 비밀이에요.”
설화가 눈을 찡긋할 때, 한빈은 벌써 가게 밖으로 나간 후였다.
“흠.”
가게 주인은 조용히 건네받은 은전을 품속에 넣었다.
설화는 보따리에 종이와 붓을 넣더니 소군에게 건넸다.
“소군아, 이거 받아.”
“이걸 왜 제가 들어요?”
“너도 이제 밥값 해야지. 어차피 유림 서원에 같이 들어갈 거잖아? 그러면 너도 일을 배워야 하지. 안 그래?”
“저는…….”
소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이곳을 떠나서 갈 곳도 없었다.
유림 서원이라면 그야말로 가장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였다.
가게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림 서원에는 처음인가 본데…….”
“왜 그러시죠? 저희에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가게 주인이 말했다.
“유림 서원에는 남녀 시종 중 한 성별만 데리고 들어갈 수 있소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사내아이고, 그쪽은 여아가 아니요?”
“음, 그렇긴 하네요.”
“아마도 방을 배정받는 데 곤란을 겪을 것이외다. 내가 알기로는 여자 시종보다는 호위 무사를 대동하고 들어가는 유생들이 많았소. 참견하려는 것은 아니고 정문에서부터 곤란을 겪을까 봐 이야기해 주는 것이오.”
“고마워요, 아저씨.”
설화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나왔다.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소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때가 되면 이 무리에서 탈출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여기에 숨는 것이 정답이었다.
설화는 나와서 한빈에게 가게 주인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하지만 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공자님, 왜 웃으세요?”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뭘 그리 걱정해.”
“해결책이요?”
“그냥 변장시키면 되잖아.”
“변장시키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나 여자나 둘 중 하나로 통일시키면 되잖아. 설화와 청화가 남자로 변장하든가, 아니면 소군이 여자로 변장하든가.”
“와, 공자님은 천재세요.”
설화는 손뼉을 치며 소군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들이 묵던 객잔에서는 소군의 비명이 울렸다.
“악!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군의 목소리에 한빈은 피식 웃었다.
똑같은 외침을 몇 번을 들었는지 몰랐다.
그때였다.
소군이 들어갔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러고는 변장을 끝마친 소군이 나왔다.
그런데 설화와 청화의 표정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