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유림 서원의 천재 유생 (1)
마치 걸음마다 내공을 실은 느낌이었다.
쿵. 쿵.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 쪽으로 모였다.
그는 한빈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볼살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좋은 감정은 아닌 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그는 앉아 있는 경비 무사를 끌어냈다.
“자네는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게. 여긴 내가 맡겠네.”
“조장님, 이번까지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허허, 가 보래도.”
“아, 알겠습니다.”
경비 무사는 조장이라는 자에게 포권한 뒤 자리를 떠났다.
수하를 자리에서 밀어낸 조장은 대신 그 자리에 앉았다.
털썩 자리에 앉은 자는 조장은 팔짱을 끼더니 아래위로 한빈을 살폈다.
한참을 바라보던 조장은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천하 십대세가 중 하나라는 하북팽가 출신이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림세가 출신이 왜 여기에 온 거죠? 서류를 한번 보여 주시죠.”
조장은 손을 내밀었다.
한빈은 그의 손을 보고 그가 사파 출신임을 알았다.
보통 손을 보고 그의 출신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검을 쓰더라도 사파의 초식과 정파의 초식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사파의 초식은 괴랄하거나 변초가 많아서 굳은살이 박이는 손바닥의 부위가 정파보다 넓다.
그런데 경비 조장은 굳은살이 많은 데다 두껍기까지 했다.
검이나 도를 쓰는 자가 저리 두꺼운 굳은살이 박일 리는 없었다.
굳은살의 깊이로 보면 낭아봉을 쓰는 자가 분명했다.
사파가 이곳으로 와서 관에 몸을 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화산의 매화검수였던 강유찬도 금의위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은가?
정파나 사파나 황제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 같은 무림인이었다.
한빈은 다시 경비 조장을 바라봤다.
사파 중에서도 강북 세력에 몸담고 있는 자가 분명했다.
강북의 사파라면 살짝 한빈과 연결 고리가 느슨한 곳이다.
강북 사도련과 강남 사도련은 아직도 대치 중인 상태.
정치적인 이유로 한빈을 적대시하는 것 같았다.
뒤쪽을 보니 설화와 청화가 살짝 움찔한다.
한빈은 귀를 기울였다.
지금 진사쌍검이 작게 검명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낮에 뱉어 내는 검명은 밤보다는 작았지만, 귀가 밝은 한빈은 분명히 들었다.
진사쌍검의 효능을 이렇게 증명할 줄은 몰랐다.
경비 조장의 등장이 조금 못마땅하지만, 시간을 절약한 것은 맞았다.
한빈은 설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화야, 입학 허가서 좀 가져와 봐.”
“네, 공자님.”
설화는 바람처럼 달려와서 경비 조장 앞에 섰다.
아무렇지 않게 보따리를 풀어 놓고 입학 허가서가 담긴 서찰을 꺼내자, 경비 조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용을 살폈다.
사실 이 서류는 잘못될 일이 없었다.
서류는 황궁에서 바로 내려왔으니.
경비 조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서 패 두 개를 꺼냈다.
“이건 배정된 방입니다.”
“감사합니다.”
“흠, 지금 시녀가 세 명입니까?”
경비 무사는 한빈의 옆에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한빈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녀가 아니라 셋 다 제 호위입니다.”
“아, 호위군요…….”
살짝 말끝을 흐리는 경비 조장.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경비 조장이 아쉬워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무기를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호위 무사밖에 없었다.
유생이나 시녀는 무기를 들고 갈 수 없는 것이 서원의 규칙.
경비 조장의 질문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으면 진사쌍검과 월아를 모두 압수당하게 된다.
이건 한빈에게 낭패를 주려는 유도신문이었다.
하오문의 정보에 의하면 경비 무사들은 권한이 막강했다.
이곳 유림 서원의 경비 무사 삼 년이면 평생 먹고살 돈을 번다는 것이 금미랑의 얘기였다.
겉보기에는 고생만 하는 경비 무사의 권력이 강한 것은 유림 서원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퇴교 시 혹은 이 년마다 한 번씩 오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예외는 항상 있는 법.
그 예외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경비 무사들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경비 조장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처소가 좁을 수도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럼 그만 가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시지요.”
한빈은 뒤쪽을 돌아보고 턱짓했다.
이제 들어가자는 신호였다.
처소가 좁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이른 시일 내에 무림 칠대기보 중 하나를 찾아야 한다.
물건을 찾으면 고민 없이 이곳을 떠날 터.
방이 어떻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때 갑자기 경비 조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혹시…….”
경비 조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세요?”
“혹시 그 설산…….”
“설산이라니요?”
“혹시 사파의 영웅, 설산신녀님이 아니신가 해서 물어봤습니다.”
“제 별호가 설산신녀는 맞는데…….”
설화는 잠깐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별호가 설산신녀가 맞긴 한데, 누군가 이렇게 알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경비 조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옆에서 패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빈이 가지고 있던 패를 빼앗듯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설산신녀님의 일행분인 줄도 모르고……. 여기 방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널찍한 방이니, 친구분들을 데려오셔도 될 겁니다.”
한빈에게 말을 한 것처럼 보였으나, 경비 조장은 여전히 설화를 보고 있었다.
설화는 난데없는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설산신녀라는 별호가 마음에 들어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유림 서원에서 자신의 별호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지난번에 휴가를 나가면서 사천에 들렀습니다. 그때 나루터에서 신녀님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었죠.”
“아, 그러셨구나!”
설화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경비 조장이 말을 이었다.
“약한 자를 돕고 악인을 물리치는 그 모습에 감복했습니다. 혹시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네, 감사해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뒤로도 경비 조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화의 무공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뒤쪽에 있던 유생들은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경비 조장을 쏘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경비 조장 때문에 그들의 입소는 한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한빈이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살펴 들어가시지요.”
경비 조장은 손을 내밀었다.
물론 시선은 설화에게 고정된 채로.
경비 조장의 열렬한 환영을 뒤로하고 온 한빈 일행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들어갔다.
그때 청화가 말했다.
“언니가 엄청나게 유명해졌나 봐요.”
“아휴,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런데 왜 공자님은 못 알아보는 거지?”
“그러게요.”
청화는 한빈을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하던 청화는 뭔가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이제 알겠어요. 공자님이 외모가 변하셨잖아요.”
“아, 그러네.”
“거기에 소문을 들어 보니 강북 쪽에는 하북팽가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더라고요. 아마 강남과 강북의 사도련 간의 문제 같아요.”
“흠, 그것도 그러네.”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소군은 그들의 대화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쩌면 이들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설화가 한빈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은 지금 뭐 하세요?”
“…….”
한빈은 설화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조용히 좌우로 나 있는 숲속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설화가 우혈랑검을 잡고 물었다.
“적인가요?”
“아, 진정하자. 설화야.”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보신 거예요?”
“저기 봐 봐.”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토끼가 뛰어놀고 있었다.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로 빽빽한 숲속에서 토끼가 뛰어다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토끼잖아요.”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지 않아?”
“숫자요?”
되묻던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말대로였다.
토끼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유림 서원의 뒤쪽은 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토끼가 많을 수는 있지만, 이리 많은 토끼가 서원까지 내려와서 뛰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키운다는 것인데, 왜 키울까?”
말을 마친 한빈은 잠시 숲속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옮겼다.
* * *
다음 날 한빈은 첫 수업에 참석했다.
첫 수업에는 이곳의 책임자인 장유중이 나왔다.
장유중은 나와서 유생들을 바라봤다.
유생들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투에 모두가 회색 속건으로 두발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자신을 과시하려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온 이들은 모두 의복과 장신구를 압수당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장유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학장 장유중이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자네들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될 터이니 자세히 새겨듣도록. 흠.”
잠시 헛기침을 하던 장유중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유생 중 한 명을 바라봤다.
“자네는 학업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바로 근본입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에 군자는 근본에 힘쓰고 근본이 확립되면 인과 도가 생겨나니, 효와 제는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 근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
유생은 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근본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은 학자의 본분이지. 하지만 나 또한 근본이 뭔지에 대해서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근본에 다가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뭔지를 고민해 봤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장유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모습에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장유중은 유생들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라는 표정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장유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라는 것이다. 체력이 있어야 학문도 익히고 연구도 할 것이 아니더냐. 지금부터 자리에서 일어나라.”
난데없는 상황에 유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 상황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장유중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유림 서원에 학이편 일 장의 문구를 적어 놨다. 그것을 모아 오는 자는 이번 학기 내가 강의할 논어는 모두 합격으로 처리해 주마. 참, 이번 학기의 최우수 유생에게는 황궁에서 가져온 선묘도라는 족자를 내리도록 하겠다.”
선묘도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한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빈의 눈빛을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빈의 심장 소리를 들은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한빈은 재빨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장유중이 다시 외쳤다.
“모두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