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93화 (493/621)

493. 낭중지추 (3)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빈이 손을 흔들자, 지켜보던 유생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껄끄러웠을 터.

오직 최유지만이 한빈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마주하고 있긴 하지만, 최유지의 눈빛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았다.

그의 시선은 한빈과 청화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한빈은 그 시선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때 청화가 족자를 들고 뛰어왔다.

“공자님!”

“청화야, 수고했다.”

“여기 선묘도 있어요. 저 잘했죠?”

청화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한빈을 바라봤다.

청화에게 꼬리가 있다면 아마도 마구 흔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빈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오늘 네가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아직 강의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달려오면 제갈 학사님의 꼴이 뭐가 되겠느냐?”

“아.”

청화가 입을 벌리자 뒤쪽에서 제갈공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괜찮아요. 강론이라는 게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니, 서로 얘기를 나눠도 괜찮아요.”

그 목소리에 청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표정에 한빈도 웃었다.

“제갈 학사님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셨으니 이제 자리로 돌아가야지.”

“네, 공자님.”

살짝 고개를 숙인 청화가 바로 자리로 돌아갔다.

유생들의 시선이 청화를 따라 이동하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유생들의 시선은 꽤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경외심은 어디로 가고 그들의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도 일개 시녀한테 무시당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한빈이 어이없어 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청화가 일개 시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문파는 과연 어느 곳일까?

백이면 백, 모두 사천당가를 꼽을 것이다.

무력으로 따지면 무당이나 소림을 꼽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왜 사천당가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바로 사천당가의 독문 무공이 독과 암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독과 암기라면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을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당했는지,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는데 관무불가침이란 조항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사천당가의 독이면 상대가 이유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게 만들 수도 있었다.

용한 의원이 온다고 해도 그것이 독이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거기에 더해 사천당가의 인물은 괴팍한 성격으로 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관리들은 대대로 사천당가를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사천당가는 품에 안은 고슴도치였다.

평상시에는 괜찮다가도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털을 곤두세워 자신의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천당가였다.

뭐, 중앙 정계에 있는 관리들의 해법은 간단했다.

바로 사천당가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에 능한 관리들의 해결 방법이었다.

덕분에 중앙 정계에서 사천당가 출신의 관리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무림과는 상관없다는 듯 묵묵히 나라의 일을 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사천당가를 후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증오와 멸시를 담아 사천당가의 직계를 바라본다라?

아마 그들이 청화의 정확한 신분을 안다면 뒷골이 서늘해질 터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제갈공려가 못 느낄 리 없었다.

유생들의 표정을 확인한 제갈공려가 헛기침했다.

“흠.”

작지만 내공이 담겨 있는 소리였다.

내공이 담긴 헛기침은 바로 유생들의 고막을 자극했다.

작은 헛기침 한 번에 소호각의 내부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제갈공려가 말을 이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

하지만 답하는 이는 없었다.

내공이 담긴 헛기침 때문에 다들 놀란 분위기였다.

제갈공려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예요. 아쉽지만 제 밑천이 다 떨어졌네요.”

말을 남긴 제갈공려는 조용히 소호각을 떠났다.

제갈공려가 사라지자 한빈은 조용히 설화와 청화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소호각을 떠나야 할 때였다.

그때 날카로운 시선이 한빈에게 다시 꽂혔다.

한빈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턱짓했다, “이제 돌아가자.”

“네, 공자님.”

“네.”

설화와 청화가 동시에 답하고 옆에 있던 소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도 돌아서 소호각을 빠져나왔다.

* * *

소호각을 빠져나와 식당으로 걸어가던 한빈은 조용히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자신이 빼먹은 것 같아서였다.

지혜를 십팔까지 높였는데도 이렇게 찝찝한 게 있다는 것은, 아직도 지식의 수준이 한참 모자란다는 의미였다.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유생들의 신상을 모두 파악하고 나서였다.

유생들의 가문은 정파, 사파, 마교 그 어느 곳과도 연관이 없었다.

그리고 유생들의 생활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지만, 망나니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했다면 분명 마음이 더 편해야 했다.

그런데 계속 뭔가 빠뜨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의 시간에 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이 찝찝함을 해결해 줄 정답을 찾아내기에는 지혜가 모자란 것 같았다.

지혜를 나타내는 구결인 ‘지(智)’를 어떻게 하면 한계까지 채울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강의가 지나가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찝찝함의 정체를 지금 알고 싶다는 점이었다.

그때 족자를 옆에 끼고 걸어가는 한빈의 옆으로 청화가 붙었다.

한빈을 빤히 바라보던 청화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공자님, 선묘도의 비밀을 알고 계셨죠?”

“그건 비밀이다, 청화야.”

“에이, 그러지 말고 저한테만 가르쳐 주세요. 공자님은 제 스승이시잖아요.”

그때였다.

설화가 청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청화야, 잠시만…….”

“왜 그래요? 언니.”

“지금 공자님께 여쭤보는 건 실례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보고 한번 이렇게 물어봐.”

“뭐라고요?”

“당신은 지금 숨을 쉬고 있냐고 말이다.”

“에이, 그게 뭐예요? 숨을 안 쉬면 사람이 죽잖아요. 그런 건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요.”

“그래,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야. 지금 네가 공자님께 물어본 얘기는 똑같아.”

“똑같다니요?”

“공자님은 당연히 모든 걸 알고 계시니까!”

“네?”

“공자님은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누가 착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맞아야 할 사람인지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잖아. 그런데 선묘도의 비밀 따위를 모르고 계셨을 것 같아?”

“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청화는 한참을 입을 벌리고 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청화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한빈은 지금 상황이 조금 황당했다.

자신이 세상의 일을 어찌 속속들이 안다는 말인가?

설화와 청화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쳤기에 저런 말이 나오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청화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죄송해요.”

“뭔가 오해를 하고…….”

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화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봐서…….”

“…….”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화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청화의 시선은 마치 현신한 관음보살을 마주하듯 경건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설화, 청화 그리고 소군.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네, 경청할게요. 말씀하세요, 공자님.”

설화가 대표로 말하고 옆에 있는 청화와 소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계속 걸어가며 사람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다.”

“저도 알아요. 주머니 속의 송곳은 옷을 뚫고 삐져나온다는 말이잖아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들의 눈에 띄기 마련이라는 뜻이고요.”

설화가 거침없이 답하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구나. 설화가 공부를 많이 했구나.”

“아니에요. 우리가 낭중지추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뭐,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삐져나온 송곳을 본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라는 거다. 송곳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연 저 송곳을 어떻게 없앨까부터 궁리하겠지.”

“앗, 저희가 위험할까 봐…….”

설화는 말끝을 흐리며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비슷하다.”

한빈이 빙긋 웃었다.

설화의 대답이 사실 반 정도는 맞았다.

정확히는 상대가 위험할까 봐서였다.

설화와 청화에게 해코지라도 하려는 유생이 있다면 과연 그 목숨이 남아날까?

청화뿐 아니라 설화도 사천당가 소속이었다.

설화는 당대 제일의 독인인 당무천의 양손녀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뒤통수를 맞고 설화나 청화가 가만히 있을 인물이던가?

아마 관과 무림 사이에 피바람이 불지도 몰랐다.

거기에 한빈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 더 있었다.

“강호 속담에 힘의 삼 할은 숨기라는 말이 있지.”

“그거 삼 푼 아닌가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희는 강하니 삼 할로 하자.”

“아, 그렇게 깊은 뜻이……. 감사해요, 공자님.”

설화가 또 감격한 듯 포권하자 한빈이 미소로 답했다.

“아니다. 그럼 하던 얘기를 마저 하마. 강호와 마찬가지로 유림에서도 힘을 숨겨 놔야 위험할 때 쓸 수 있는 법이란다.”

“그러고 보니 다 저희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네요. 감사해요, 공자님.”

“그런데 내가 있을 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라는 주머니는 송곳이 삐져나오지 않을 만큼 튼튼하니까 말이다.”

“앗, 공자님.”

설화가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막았다.

옆에 있던 청화도 입술을 질끈 깨문다.

소군은 주먹을 꽉 쥔 채 눈물을 글썽였다.

한빈은 조용히 앞서 걸어갔다.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 무공이나 학문이나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때였다.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지(智) : 이십(二十)]

숫자가 올라가더니 이십에서 멈췄다.

갑자기 두 개나 올라간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설화와 청화를 바라봤다.

설화와 청화는 격해진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 들어온 구결은 설화와 청화로부터 온 것이 분명했다.

이런 게 바로 군중심리라는 것이었다.

옆을 보니 소군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소군을 본 한빈은 피식 웃었다.

세 개가 아니라 두 개인 이유는 아마 소군이 지(智)의 구결을 품을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들을 보고 미소 짓던 한빈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앞서 찝찝하다고 생각되었던 문제의 정답이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생들에 대한 전생의 기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생들에 대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머릿속이 명확해지고 나니 유생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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