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전호후랑(前虎後狼) (1)
유생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 왜 문제인지는 간단하다.
한빈이 누구던가?
전생에 정의맹의 정보를 손에 쥐고 있던 귀검대의 대주였다.
한빈은 웬만한 관리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촌구석의 현령까지도 말이다.
지혜의 구결이 스무 개가 되자 기억이 완벽해진 것이다.
하지만 소호각에 있던 유생들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유생들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림 서원 출신의 유생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될까?
그것도 같은 기수의 유생이 모두 다 말이다.
바로 그것이 한빈이 느꼈던 찝찝함의 정체였다.
그때 어느새 한빈의 앞에 온 청화가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도 비밀이죠?”
“비밀은 아니고 시간이 흘러야 풀릴 문제라서 그런다.”
“시간이 흘러야 풀릴 문제요?”
“어떤 화공이 해변을 그리고 싶어 네게 물었다고 치자. 그런데 마침 밤이라서 해변에는 물이 가득 차 있지. 그런데 화공이 네게 해변을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테냐?”
“흠, 아침에 봤던 해변의 모습을 설명해 줘야겠죠.”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해가 뜨고 물이 빠질 때를 기다려서 해변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지.”
“아.”
청화가 탄성을 터뜨렸다.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석상이 되었다.
뒤쪽에 있던 설화가 달려와서 청화의 얼굴에 손을 내저었다.
미동도 없는 청화의 모습에, 설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청화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설화는 다급했다.
깨달음이라는 게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는 무인도 부지기수다.
깨달음이란, 앞에 놓인 경지의 벽을 깨는 과정.
설화는 친동생과 같은 청화가 무아경지에 빠진 것 같아 보이자 다급해졌다.
반면 한빈은 조용히 청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청화를 살피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자.”
“아무래도 호법을 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과정에 들어선 것 같지는 않은데.”
한빈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청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뭔가 잡힐 듯한데 잡히지 않네요. 거기에 자꾸 몰입하다 보니 배가 고파서 갑자기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깨달음은 아닌 것 같아요. 헤헤.”
“아, 놀랐잖아.”
설화가 눈매를 좁히자 청화가 웃었다.
“헤헤, 죄송해요. 언니.”
“그러고 보니 공자님 말씀이…….”
말끝을 흐린 설화가 재빨리 보따리를 풀었다.
“붓이 어디 있지?”
“언니, 왜 그래요?”
청화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설화가 붓을 찾아서 들고는 말했다.
“이런 건 적어 놔야지.”
“저도 적을래요.”
청화도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군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게걸음으로 한빈에게 다가갔다.
“공자님, 저도 지금부터 공부할래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책이라면 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으냐?”
“그게 사실…….”
소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그 책이 너무 어려워서 그러는 것이냐?”
“맞아요. 역시 공자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네요.”
“흠.”
“사실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글자를 못 읽는 것은 아니지만, 사서삼경은 제게 너무 힘들어요. 소군이도 이제는 솔직해질래요.”
“그래, 그럼 내가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기초를 다질 책을 보내 달라 부탁해 놓으마.”
“고, 고마워요. 공자님, 이제부터 저도 언니들처럼 밤새워서 공부할래요.”
“설화와 청화가 밤을 새워서 공부했다고?”
“네, 원래는 번갈아 가면서 경계를 서다가 어느 순간부터 언니 둘 다 밤을 새워 서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소군이도 언니들을 본받을래요.”
소군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것은 소군의 진심이었다.
소군은 오늘 소호각에서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들 일행에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무공에서 학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한빈과 그에 버금가는 두 명이었다.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소군은 이러다가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군이 보기에 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한빈의 곁이었다.
여기에서 버림받는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한빈의 옆에서 버티려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군은 결심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짓는 소군이 이해가 안 되었다.
한빈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소군을 살피던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설화가 종이 위에 조그마한 붓으로 방금 한빈이 한 말을 열심히 옮겨 적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한빈은 방금 소군이 한 말을 떠올렸다.
잠시도 쉬지 않고 서책을 봤다니!
어쩐지 그들에게 지(智)의 구결이 들어왔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도 벌게져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도 있겠지만,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한빈은 품 안에서 푸른 대나무 통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대나무 통의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덕분에 붓을 놀리던 설화와 청화도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 청아한 향기의 정체는 대나무 통에 담긴 약이었다.
약의 이름은 극양단으로, 천수장의 특제 단약이라고 보면 되었다.
극양지기를 담은 천수장의 무를 백 일 동안 말려 그것을 각종 약제와 함께 섞은 환약이었다.
극양지기를 한계까지 담은 무는 천년하수오에 버금갈 만한 약효가 있었다.
어찌 보면 저잣거리에 나뒹구는 환약이라 생각할 자도 있겠지만, 극양단 한 알이면 죽어 가던 소도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극양단은 설화와 청화도 잘 모르는 약이었다.
이번에 천수장에 들러서 극양지기를 한계까지 품은 무를 손에 넣은 덕분에 만들 수 있던 환약이었다.
물론 한빈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천수장의 전속 의원인 장자명이 고심 끝에 완성한 단약이었다.
한빈이 꺼낸 대나무 통을 본 설화가 눈을 반짝였다.
“공자님, 그게 뭐예요?”
“이건 너희의 공부를 도와줄 총명단이란다.”
“총명단이요?”
“이름만 들어도 입맛이 당기지?”
한빈이 대나무 통을 들자 모두가 눈을 빛냈다.
한빈은 그중 세 알을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극양단은 백발백중의 효용을 담고 셋에게 날아갔다.
휙. 휙. 휙.
설화와 청화는 날아오는 극양단을 부드럽게 낚아챘고 소군은 날아오는 극양단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순간 극양단이 소군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소군은 본능적으로 뱉어 내려 했다.
하지만 한빈이 백발백중의 효용을 담아 날린 환약은 목구멍으로 정확하게 넘어갔다.
“켁.”
뱉으려 했지만, 바로 환약은 바로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녹아들었다.
당황하는 소군의 등을 설화가 두드렸다.
설화는 한 손으로 소군의 등을 두드리며 한 손으로는 환약을 입 속에 넣었다.
소군은 그 모습에 뱉어 내려던 동작을 멈췄다.
갑자기 환약이 날아오자 의심했지만, 설화가 먹는 것을 보고 의심은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그것도 잠시, 소군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살짝 감겨 오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해졌으며 마음마저 평온해졌다.
정확히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 어떤 영약보다도 효과가 탁월하다고 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구대문파의 대표 영단에 버금가는 것 같았다.
물론 소군이 그것들을 먹어 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몸이 그렇게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소군은 자신의 출신이 천마신교라는 것도 잠시 잊은 채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문파의 몇 개월 운용비에 버금갈 만한 영단을 일개 시녀한테 준다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빈은 관음보살의 현신이 맞았다.
소군은 한빈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이제부터 소군은 한빈을 믿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 한빈을 믿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때 설화가 조심스럽게 한빈에게 물었다.
“공자님, 이런 걸 막 써도 돼요? 총명단이 아니라 영약 같은데요.”
“뭐, 공부에 도움만 되면 됐지.”
“이거 귀한 거 아니에요?”
“그것도 비밀이다.”
“아, 저희에게 부담을 안 주시려고…….”
설화가 말끝을 흐리자 뒤쪽에 소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군의 눈빛은 점점 강렬해졌다.
물론 청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빛을 뒤로한 채 한빈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효과가 뛰어난 천수장의 특제 약은 맞았다.
하지만 귀한 것은 아니었다.
천수장에서 남는 것이 극양지기를 빨아들인 무가 아니던가?
다만 손이 가는 바람에, 하루에 스무 알 정도밖에는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 흠이었다.
하루에 스무 알이면 백일이면 천 알 정도가 나온다.
한빈이 천수장에 복귀할 때쯤에는 어느 정도가 쌓여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때까지 장자명이 쉬지 않고 극양단을 만들고 있을 테니까.
* * *
저녁 식사가 끝난 식당의 뒤뜰.
소호각의 강론에 참여했던 유생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물론 한빈 일행과 양석봉은 빠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최유지가 주축이 된 유생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 눈을 끔벅였지만, 정작 입술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최유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치를 볼 뿐 먼저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유생 하나가 최유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유생은 잠시 최유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한 움큼 뱉어 냈다.
“휴우.”
“홍금호 유생,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게. 괜히 뜸 들이지 말고.”
최유지는 홍금호를 바라봤다.
홍금호는 유생 중에도 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퉁퉁한 체격에 하얀 얼굴.
걷지도 못할 만큼 체력은 부실해 보였다.
오직 서책만을 잡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체격과 외모가 바뀐 것이었다.
어찌 보면 평균 밑의 외모였지만, 그를 무시하는 유생은 없었다.
그는 최유지와 양석봉의 뒤를 잇는 유생이었다.
집안 차이는 크지만, 홍금호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었다.
홍금호는 이인자 중에서도 가장 학식이 뛰어난 유생이었다.
사실, 그가 최유지 쪽으로 붙으면서 유생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런 홍금호의 존재를 최유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시선을 받은 홍금호가 말을 이었다.
“내 솔직히 물어보겠네. 혹시 양석봉과 짰는가?”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을 해 보게. 내가 알기로 팽한빈이라는 작자는 하북팽가의 직계일세. 그것도 눈 밖에 난 볼품없는 자로 알고 있네.”
이것은 한빈의 활약이 아직 유림 쪽에는 흘러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흠.”
최유지의 눈썹이 꿈틀댔다.
‘팽’이라는 성씨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그였다.
최유지도 홍금호의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지만, 무가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변변한 무공조차 없었다.
뭐, 무가 쪽 소식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 학식이라면 하북에서 튀어도 진작에 튀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하필 유림 서원에 와서 그 재능을 드러낸다고?
아니, 그뿐 아니라 그의 시녀까지 낭중지추의 모습으로 세상에 학식을 드러낸다?
이런 우연은 말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