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96화 (496/621)

496. 전호후랑(前虎後狼) (3)

최유지의 물음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최 유생.”

“오늘 연회에는 흥을 돋우고자 가문에서 가져온 술을 한 병씩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술이라……. 술은 이미 서원에 반납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몰래 가져온 술이 한 병 정도는 있지 않습니까?”

“뭐, 있긴 하지만…….”

한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최유지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그냥 형식적인 거니 아무 술이나 들고 오셔도 좋습니다.”

“네, 그러지요.”

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시진 뒤에 뵙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터놓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하.”

최유지가 안심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한빈도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차 한 잔을 마신 최유지가 자리에서 떠났다.

방을 나간 최유지는 연신 헛기침을 해 대며 점점 멀어져 갔다.

그의 기척이 사라지자 뒤쪽에서 서책을 보던 소군이 조용히 다가왔다.

“공자님, 저 사람 말이에요. 왠지 수상한데요.”

“하하, 네 눈에도 그리 보였구나. 그런데 어디가 그렇게 수상했지?”

“딱 봐도 억지로 웃고 있잖아요. 많이 부자연스러워요.”

“하하, 소군이가 눈썰미가 좋구나.”

한빈이 소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소군이 감격한 듯 입술을 앙다문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설화가 피식 웃었다.

“우리 소군이가 많이 컸네.”

“원래 컸거든요, 언니.”

소군이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서책을 들었다.

누가 본다면 평범한 문사 집안의 일상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 * *

식사를 마친 유생들은 죽림칠회가 열리는 만월경(滿月鏡)으로 향했다.

만월경이란 유림 서원의 명물 중 하나였다.

만월경은 동그란 연못이었는데, 그 주변으로는 대나무숲이 둘러싸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동그란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였다.

하얀색 바위가 정확하게 연못의 중앙에 자리 잡은 모습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맑디맑은 물에 그보다 더 순수하게 보이는 흰색의 점 하나를 찍어 놓은 모습.

그 모습을 위에서 본다면 거울 속에 달이 떠 있는 듯한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연못은 만월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게 만월경의 유래지. 이백이 물에 비친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는 것도 알고 보면 여기라고 하지.”

한빈은 나란히 걷고 있는 설화와 청화에게 설명을 마쳤다.

설화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공자님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누군가가 전해 줬다.”

이건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안 것이 아니었다.

만향각의 금미랑이 전해 준 이야기였다.

이곳 군자현의 하오문 책임자인 금미랑의 정보는 생각보다 방대했다.

이곳에 새로 생긴 화장실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요?”

“그러니까…….”

한빈이 답하려는데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언니!”

“앗,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언니가 그러셨잖아요.”

“내가 뭐라고?”

“공자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니,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요.”

“아.”

설화는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화가 얼마 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청화가 그 말을 기억해 뒀다가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청화는 지나가는 이야기까지 모두 기억해 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성격이 바뀐 걸까?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쪽에서 뭔가를 적고 있는 소군을 바라봤다.

소군은 가끔 멈춰서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이건 일주일 전부터 보인 변화였다.

천자문부터 공부하고 싶다고 했던 소군이었기에 시간 날 때마다 글자를 쓰는 연습을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심각할 정도였다.

잠시도 붓을 놓는 적이 없으니, 이러다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이제까지 한빈은 소군이 공부할 때면 녀석의 곁으로 다가간 적이 없었다.

물론 방해될까 봐서였다.

오늘은 소군이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한빈은 기척을 죽이고 뒤쪽에 쪼그려 앉아 있는 소군의 뒤쪽으로 갔다.

“소군아, 지금 뭐 하는 거지?”

“앗, 공자님.”

소군이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종이를 뒤로 숨긴다.

하지만 그 종이는 이미 한빈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종이를 낚아챈 한빈은 조용히 내용을 살폈다.

한빈은 종이와 소군을 번갈아 봤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들이 평상시 나눴던 대화였다.

어찌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소군은 왜 진땀을 흘리면서 적고 있었을까?

한빈은 그것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이런 쓸데없는 걸 왜 옮겨 적는 거지?”

“그, 그게…….”

“아니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그게 아니라……. 언니들이 시켰어요.”

“설화와 청화가?”

한빈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설화가 번개처럼 한빈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건 나중에 다시 정리할 대화록이에요.”

“대화록? 그게 왜 필요한 거지?”

“나중에 어록을 만들 거라서요.”

“어록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상세히 말해 봐라.”

“그냥 직접 보여 드릴게요.”

설화가 청화를 바라보자 청화가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청화는 말없이 그 서책을 한빈에게 건넸다.

서책을 건네받은 한빈은 책의 표지부터 확인했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황당한 서책의 제목 때문이었다.

-진룡어록(眞龍語錄)

“대체…….”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설화가 어색하게 웃자 옆에 있던 청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빈도 그제야 기억났다.

그들이 자신의 명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얼핏 지나가는 말로는, 그것으로 어록을 만들 것이라 했다.

그때는 단순한 장난인 줄만 알았다.

한빈의 심각한 표정에, 설화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하지 말까요? 공자님.”

“아니다. 계속해도 좋다. 가능하면 멋지다고 생각하는 말을 위주로…….”

“진짜로요?”

“대신에 밖으로 새어 나가도 될 얘기만 적도록!”

“네, 공자님.”

설화가 밝게 웃자 옆에 있던 청화가 손뼉을 쳤다.

그들의 모습은 소군에게 낯설었다.

세상에 자신의 어록을 만들겠다는데 저리 뻔뻔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붙어 있어야 했기에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사실 소군은 손목이 빠질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붓을 놀려 대니 몸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 딱 사흘 만에 천자문을 완벽하게 익혔다는 점이다.

거기에 글을 쓰는 속도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빨라졌다.

대충 중요한 내용만 적으라고 했지만, 그들의 대화 중 무엇이 중요한지 소군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모든 대화를 다 종이에 옮겨 적었다.

이곳에 있다가는 유명한 서예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소군은 생각했었다.

소군은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인제 그만 적어도 된다. 아마도 언니들이 천자문을 빨리 익히게끔 배려한 것 같구나.”

“언니들이요?”

소군이 고개를 돌려 설화와 청화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설화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와, 공자님은 진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네요.”

“뭐, 그렇지.”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사실, 한빈은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찌 자신이 세상일을 모두 알 수 있단 말인가?

한빈은 조용히 만월경을 향해 올라갔다.

만월경에는 이미 많은 유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석봉은 손을 흔들며 한빈을 불렀다.

“여기일세. 내가 자리를 잡아 놨다네.”

“고맙네.”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설화에게 눈짓을 했다.

누가 봐도 편히 쉬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하지만 설화는 눈을 빛냈다.

설화는 조용히 청화와 소군을 이끌고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그것도 잠시, 설화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군만이 구석에 앉아서 만월경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월경을 보고 있는 소군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이곳은 흔히 볼 수 있는 연못이 아니었다.

연못이라면 물의 흐름이 멈춰져 있어야 하지만, 만월경의 물은 가장자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실제로 만월경에 있는 나뭇잎은 마치 흐르는 강물 위에 놓인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흰색 돌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보니, 마치 소용돌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만월의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느리게 도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유생들의 말을 들어 보니 이곳은 몇몇 행사에만 개방되는 것이 분명했다.

유생들도 신기한지 연못의 가장자리에 떠다니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유생들이 웅성이는 가운데 최유지가 일어났다.

“죽림칠회는 여러 유생들은 모시고 문장을 뽐내는 자리입니다. 오늘만은 숨겨 뒀던 실력을 마음껏 뽐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서체를 겨루겠습니다.”

최유지가 말을 끝내자 유생들의 호위들이 그들의 옆에 지필묵을 준비했다.

모두는 과거 시험에 임하는 자세로 지필묵을 앞에 두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힐끔 뒤를 돌아보고 청화를 향해 손짓했다.

청화는 그제야 기억났는지 재빨리 보따리를 들고 한빈에게 달려갔다.

“공자님, 죄송해요. 여기 준비했어요.”

청화는 보따리를 풀고 지필묵을 꺼냈다.

본래 설화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녀는 지금 한빈의 지시로 사라진 상태였다.

설화는 이 일을 청화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만월경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다 보니 깜빡한 것이다.

뒤쪽에 있던 소군은 얼떨결에 따라와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한빈이 소군을 바라봤다.

“소군은 여기에 앉아라.”

“네?”

“내가 팔이 불편하니, 여기에 앉아서 내 대신에 문장을 써 봐라.”

“네? 제가 어떻게…….”

“그동안 노력하지 않았느냐?”

“딱 일주일인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생들의 눈이 커졌다.

유생들이 웅성대자 최유지가 나섰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팽한빈 유생.”

“무슨 짓이라니요? 제 시녀, 아니 호위들도 장유중 학장님으로부터 유생의 자격을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그건 수업에 참여하는 자격을…….”

“장유중 학장님이 말씀하시기를, 유림 서원의 모든 행사는 학업의 연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흠.”

“그럼 불만 없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

최유지는 아무 말 못 하고 한빈을 바라보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말을 이었다.

“그럼 벌주도 이 아이가 마실 겁니까?”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유지가 소군을 바라봤다.

“흠, 술도 못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참에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 무슨 내기를 한단 말이오?”

내기라는 말이 나오자 전에 한번 데었던 기억이 있던 최유지가 말을 더듬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지난 번에 그 계약 말입니다. 이 아이가 벌주를 마실 일이 생긴다면 그 계약서는 깨끗하게 없애 드리겠습나다.”

“오, 그 말이 진짜요?”

“네, 대신!”

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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