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98화 (498/621)

498. 전호후랑(前虎後狼) (5)

한빈은 조용히 유생들을 바라봤다.

유생들은 불길함의 정체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구결 획득이 아니라면 이곳까지 와서 죽림칠회에 참가할 필요도 없었다.

지(智)의 구결을 이 정도로 모았으면 그들의 장단에 맞춰 준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만월경을 관리하는 일꾼이 배를 멈췄다.

길었던 첫 번째 승부가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서체를 확인하는 일이다.

일꾼들은 배에 들어 있던 문장을 뒤쪽 공터로 옮겼다.

공터에는 수십 장의 종이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최유지가 말했다.

“이제부터 최고의 서체를 뽑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변을 바라봤다.

순간 최유지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일꾼들은 약속했다는 듯 유생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었다.

일꾼들이 나누어 준 물건은 다름 아닌 하얀 바둑돌이었다.

그 돌을 받은 한빈과 모두는 뒤쪽을 바라봤다.

그들의 뒤쪽에는 연못, 즉 만월경이 있었다.

바둑돌은 만월경의 상징인 하얀 바둑돌과 똑같이 생겼다.

한빈은 바둑돌과 연못 한가운데 바위를 번갈아 봤다.

바둑돌은 만월경의 가운데 자리한 바위의 축소판이었다.

만월경과 배 그리고 바둑돌이라…….

순간 한빈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묘도와 만월경 그리고 바위가 머릿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서로 관련이 없을 듯 보였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전에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는 아직 찾을 수 없었다.

한빈이 조용히 손에 쥔 바둑돌을 바라볼 때였다.

최유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학우 여러분들은 마음에 드는 서체의 아래에 바둑돌 하나를 올려놓으시오. 승부는 그것으로 정하겠소.”

그들은 조용히 문장이 적힌 종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빈은 바둑돌을 든 채 조용히 유생들을 바라봤다.

유생들은 천천히 문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먼저 도착한 유생들은 멈칫하며 바둑돌을 놓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문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한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누구를 뽑겠다고 이미 정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먼저 도착해서 멈칫하는 유생들은 모두 술에 취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등하는 문장 중 하나의 주인은 바로 소군이었다.

그들은 최유지와 소군의 문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소군의 문장은 미리 약속한 그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 뛰어났다.

사실 소군이 이렇게 유려한 필체를 가지고 있을 줄은 한빈도 몰랐었다.

한빈은 이곳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야 소군의 진가를 알아봤다.

사실 마령지체의 소유자가 서예의 대가라고?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소군이 완벽하게 기억을 찾은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필체는 걸음걸이와도 같았다.

기억이 지워져도 몸에 새겨져 있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억이 지워졌다고 걸음걸이까지 까먹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억은 지워졌지만, 천자문을 익히면서 자연스레 몸이 반응한 것이다.

소군의 필체를 보면 두 명에게 배운 것이 분명했다.

어떤 획은 주작이 날개를 편 것처럼 정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또 어떤 획은 용사비등(龍蛇飛騰)의 생동감을 담고 있다.

그런 필체를 보고 반하지 않을 유생이 있던가?

정상적이라면 소군의 필체에 바둑돌을 올려놓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유지와 약속한 바가 있었다.

문제는 그들 중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다는 점이다.

술에 취한 이유는 간단했다.

순번이 돌다 보니 벌주를 마시게 된 것은 소군이 아닌 나머지 유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망설이고 있는 몇몇 유생은 운이 좋게도 벌주를 피한 사람들이었다.

벌주를 마신 유생들은 휘청이고 있었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천천히 공터로 가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심하게 취한 것은 홍금호라는 유생이었다.

홍금호는 몸을 못 가누고 있었다.

사실, 벌주 몇 잔에 저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한빈은 최유지가 바가지에 술을 부으며 은근슬쩍 환약 하나를 넣는 것을 보았다.

그 환약의 약효가 계속 바가지에 남아 있었던 것.

그때 비틀거리던 유생들이 도착했다.

술에 취한 자들은 망설임 없이 한 명의 문장에 바둑돌을 올려놓았다.

투두둑.

툭.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던진 바둑돌은 정확하게 소군의 문장 위에 올려졌다.

최유지의 문장 위에 올려진 것은 불과 네 개밖에 없었다.

최유지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어떤 유생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그리고 어떤 유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그 유생에게 걸어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생은 양석봉이었다.

양석봉은 속으로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자신이 꺾지 못한 자를 최유지가 꺾는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하지만 중간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 승부의 결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도 못 할 결과로 이 승부는 허무하게 끝났다.

양석봉은 운 좋게도 벌주를 피했기에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도 최유지가 바가지에 환약을 넣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술에 취한 유생들의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허허, 방구석에서 글만 읽어서 그런지 다들 주량이 형편없군.”

“그렇지요. 주도도 도(道)의 한 부분 아니겠습니까?”

난데없이 들어온 목소리에 양석봉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씩 웃고 있었다.

“헉.”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입니다.”

“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시오?”

“최 유생의 음모를 다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야…….”

“잘하셨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나설 수 없는 사정이…….”

“아니, 진짜 잘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덕분에 모든 상황이 잘 정리되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보십시오.”

한빈은 뒤쪽을 가리켰다.

만월경을 관리하는 일꾼 중 하나가 문장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

첫 번째 승부의 승자가 뽑힌 것이다.

펼쳐진 문장의 옆에 서 있던 최유지가 마지못해 첫 번째 승부의 우승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양석봉이 말을 이었다.

“대체 팽 유생의 호위들은 어떻게 된 것이오? 저 아이는 대체 어느 집안 출신이기에 저런 경지에 올랐단 말이오?”

양석봉은 소군을 가리켰다.

한빈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뭐, 비밀입니다.”

이건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교 출신이라고 하면 유림 서원이 뒤집힐 터였다.

양석봉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글씨는 처음 보오. 삼백 년 전의 양학선이 다시 태어난 듯한 착각이 듭니다.”

양학선은 삼백 년 전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였다.

그의 글씨체는 훗날 왕희지조차도 뛰어넘을 수 없는 서체라며 감탄한 바 있었다.

양학선을 비유한 것은 그만큼 양석봉도 감탄했다는 것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니요. 나중에 저 아이에게 한번 배우고 싶은데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겠소?”

양석봉은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리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헉, 대체 얼마면 되오?”

“오실 때 당과나 몇 개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헉.”

양석봉이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은 빙긋 웃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 손뼉을 쳤다.

짝. 짝!

뒤를 돌아보니 유림 서원의 강사 몇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가운데에는 유림 서원의 학장인 장유중도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장유중은 주변을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술이 어지간히 고팠던 모양이로군.”

“…….”

유생들은 답하지 못했다.

몇 잔 마시지 않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을 보면 분명 취한 것이 맞았다.

장유중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 보고 있었으니 솔직히 말해 보게.”

“…….”

유생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무엇을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하는지 아는 이도 없었다.

장유중은 웃음을 잃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뒤쪽에서 보니 누군가 술에 환약을 넣더군…….”

그 말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정신이 멀쩡한 유생 중의 하나인 양석봉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술에 독을 탔다는 말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장유중에게 쏠렸다.

장유중은 작게 웃었다.

“하하. 독은 아닐 터……. 독을 탔다면 자네들이 살아 있겠나?”

“그럼 무슨 약이라는 말입니까?”

“아마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미혼산 같다네.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그럼 누가 우리를 해코지하기 위해서 일을 꾸몄다는 말입니까? 혹시 이곳의 일꾼 중 하나가…….”

말끝을 흐린 양석봉은 눈을 크게 떴다.

학장 장유중이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리는 없었다.

장유중은 손을 내저었다.

“일꾼 중에는 없네.”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학장님.”

“자네 중 한 명일세.”

“우리 중 하나라니요? 혹시…….”

양석봉은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순간, 갑자기 유생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 미소를 잃지 않던 장유중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빈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쓰러진 유생은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건 한빈도 예상 못 한 상황이었다.

최유지가 환약을 넣은 것까지는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사람을 해칠 만큼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쓰러진 유생은 한눈에 봐도 위급해 보였다.

그 유생은 다름 아닌 홍금호였다.

홍금호는 지금 몸을 배배 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유생의 상태는 최유지와 무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한빈이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장유중이 다급하게 외쳤다.

“데려오너라!”

장유중의 말에 갑자기 일꾼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아무 힘도 없을 것 같은 일꾼의 태도가 달라졌다.

갑자기 눈을 빛내는 동시에 자세는 칼날처럼 각이 잡혀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몸에서 스멀스멀 기세를 피우고 있었다.

최소 절정의 수준으로 보이는 기세였다.

그들은 일제히 모두를 향해 기세를 뿜어냈다.

갑자기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세찬 기파가 유생들의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유생들은 눈을 크게 떴다.

묵묵히 유생들의 심부름을 하던 일꾼들이 기세를 뿜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일꾼 중 둘이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에는 최유지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은 최유지의 양팔을 잡았다.

순식간에 최유지의 마혈을 제압한 후 그들은 장유중의 앞에 섰다.

장유중이 턱짓하자 일꾼 중 하나가 그의 몸을 뒤졌다.

그러더니 품에서 가느다란 죽통 하나를 꺼냈다.

일꾼은 그 죽통을 열더니 환약을 확인했다.

“이게 원인인 것 같습니다, 어르신.”

“흠, 대체 왜 이런 짓을…….”

장유중은 말끝을 흐리며 최유지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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