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전호후랑(前虎後狼) (9)
장혜화가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던 장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어떤 흔적도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동생.”
제갈공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제는 편하게 언니와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한 둘이었다.
장혜화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제갈공려의 눈빛도 살짝 흔들렸다.
장혜화와 제갈공려는 한빈의 부탁으로 이곳 주변에 임시로 진법을 펼쳤다.
비록 진법의 효력은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있지만, 아직 진법은 깨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빈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빈이 신출귀몰한 경공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갈공려도 알고 있었다.
만약 한빈이 진법 밖으로 나갔다고 하면 장혜화가 알아차려야 했다.
장혜화는 이 진법의 주인이었다.
즉 이 진법 안의 공간은 장혜화의 것이라고 봐도 되었다.
아무리 경공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방문을 열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지 않은가?
한빈은 지금 방문도 열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아니면 이곳에 몸을 숨겼든가.
하지만 한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만월경을 중심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공간까지.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는 생각보다 좁았다.
아무리 봐도 숨어 있을 곳은 없었다.
당황한 장혜화가 제갈공려를 바라봤다.
“혹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동생.”
“팽 유생 말이에요. 혹시 자기만 살자고 튄 건 아닐까요? 언니.”
제갈공려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그는 다른 이를 저버리지 않아요.”
“그래도…….”
“도망갈 기회가 있어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제갈공려는 귀락천에서부터 사천당가로 이어진 전투를 떠올렸다.
마주 보던 장혜화도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빛냈다.
장혜화는 자신의 품속을 매만졌다.
안에는 한빈이 줬던 돈이 들어 있었다.
“네. 저도 팽한빈 유생의 성품은 알고 있어요, 언니.”
장혜화와 제갈공려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믿음의 원인은 서로 달랐다.
제갈공려가 입을 열었다.
“오죽하면 하북에서는 생불이라고 불릴까요? 생불이라고 하면 하북 사람들 모두가 알아요.”
“호, 혹시……. 천수장의 생불이라는 사람이 팽한빈 유생이었어요?”
“네, 맞아요. 그 이름을 동생이 어떻게 알고 있어요?”
“천수장의 생불은 군자현에서도 유명해요. 사람들이 천수장의 생불 좀 닮아 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걸요. 그런데 그게 팽한빈 유생이었다니!”
장혜화가 입을 벌렸다.
“뭐, 생불이라는 칭호를 듣는 사람이 우리를 버릴 수는 없죠.”
“네.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뭐가 이상한가요? 동생.”
“저쪽을 보세요. 저 유생들은 팽한빈 유생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저리 태평하죠?”
제갈공려는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설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 꼬치를 굽고 있었다.
청화나 소군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유생들도 아무렇지 않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금 유생들이 우왕좌왕한다면 한빈이 돌아오더라도 대비할 수 없을 터였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토끼는 보호할 수 있어도, 우리를 뛰쳐나온 토끼를 맹수로부터 보호할 수 없는 법이었다.
보호한다고 해도 전부를 보호할 수는 없다.
우왕좌왕 숲으로 흩어진 토끼를 무슨 수로 보호하겠는가?
유생들을 바라보던 제갈공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유생들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갈공려는 유생들의 눈을 자세히 바라봤다.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유생들이 당황하지 않은 이유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유생들은 아직도 미혼산의 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제갈공려는 한빈의 말을 그제야 떠올렸다.
한빈은 이곳 유생들의 상태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굳이 해독하려고 하지 말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만약 미혼산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저렇게 태연히 꼬치구이를 먹을 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설화가 뿌리는 양념에 미혼산이 소량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미혼산에 당하지 않았던 유생들조차 태연하게 음식을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웃음소리가 제갈공려의 상념을 깨웠다.
껄, 껄!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제갈공려는 주변을 살폈다.
설화와 청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유중도 아무렇지 않게 소군의 옆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소군이 아닌, 처음 보는 유생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때 장혜화가 다급히 말했다.
“진법이 거의 파훼됐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적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진법이 이렇게 힘없이 깨질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진법의 기둥이 멀쩡한데 버틸 수 있는 수명이 줄어든다는 게 조금 이상해요.”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아요.”
“흠.”
“조금 있으면 적의 모습이 보일 거예요.”
“그럼 적의 모습을 확인하고 갈 테니, 먼저 피하세요.”
“아니에요. 다 같이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겠어요.”
장혜화는 정자가 있는 앞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진법의 정문이었다.
물론 진법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구도 있었다.
모든 진법이 그렇듯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보통은 빠져나가는 문을 쪽문이라 부른다.
하지만 바로 진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쪽문 뒤에 적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공려는 한빈이 위험에 벗어날 해답을 가지고 오리라 믿었다.
쿠아앙!
다시 폭발음이 울렸다.
순간 정자 쪽에서 희미하게 적의 신형이 드러났다.
적은 아직은 진법의 안쪽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진법 안에서만 밖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제갈공려가 날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진법이 거의 파훼되었다.
덕분에 밖에 있는 자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산적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겉에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지만, 복면을 쓰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다만 둘만이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쌍의 남녀였다.
여자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며 남자는 청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무복도 아니고 행사 때나 입는 비단옷이었다.
얼핏 봐서는 서른 안팎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였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외모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양쌍마(陰陽雙魔)예요.”
“…….”
제갈공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웃고 있었다.
사라졌던 한빈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빈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양쌍마가 분명하네요. 저런 옷에 화경의 고수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음양쌍마밖에 없잖아요.”
“팽 공자, 음양쌍마라면 전대의 인물이 아닌가? 그럼 마교가?”
“마교에서도 낙인찍혔던 고수들이죠. 삼십 년 전에 마교에서 뛰쳐나온 뒤에는 정, 사, 마,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인데…….”
한빈은 그들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살피던 한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튄다고?”
“네. 일단 다들 이쪽으로 오시죠.”
한빈은 제갈공려와 장혜화를 모닥불 근처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한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자는 말이었다.
이상한 것은 비상식량을 챙기라는 지시였다.
조금 전 향로에서 꺼낸 물건 중 비상식량의 역할을 할 건량이 꽤 많았다.
한빈의 지시에 모두는 비상식량을 챙겼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갈공려가 말했다.
“흔적은 내가 지우겠어요, 팽 공자.”
제갈공려가 가리킨 것은 모닥불과 향로였다.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흔적은 안 지우셔도 됩니다.”
한빈은 도리어 향로에 남은 향을 모두 넣고 불을 붙였다.
향로에 담긴 향은 마치 횃불처럼 타올랐다.
한빈이 손짓하자 장혜화가 앞장섰다.
진법의 쪽문으로 안내하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장 소저님, 그쪽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네? 이쪽이 맞는데요.”
“그쪽은 늑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빨로 봐서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전호후랑이라는 말이 있죠. 지금이 딱 그 상황입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계획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랑이와 늑대 떼가 모두 이곳을 노리고 있습니다.”
“음.”
“문제는 호랑이와 늑대가 한편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른다는 점입니다. 일단은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튀는 게 정답입니다.”
“여기에 그런 곳이 어디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한빈은 휘적휘적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한빈이 멈춘 곳은 바로 만월경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바위였다.
만월경의 가운데 있는 바위는 하얀색이지만, 그곳에 있는 바위는 검은색이었다.
한빈은 검은색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뒤를 따라가던 장혜화가 말했다.
“그쪽에는 길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색 바위 뒤에 처음 보는 작은 통로가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장혜화보다 이 유림 서원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의 진법을 모두 총괄하는 장혜화는 지나가다 차이는 돌의 변화까지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통로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한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은 이곳 통로와 상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혜화가 통로 앞에서 멍하니 있자 한빈이 말했다.
“뭐 하세요? 안 들어가고요?”
“여, 여기로 들어가라고요?”
“제일 안전한 방법입니다.”
“아, 알았어요.”
말을 마친 장혜화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통로의 안쪽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유지도 안쪽으로 들어갔고 양석봉도 그 뒤를 따랐다.
장유중은 왜소해 보이는 유생을 끌고 들어갔다.
한빈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유생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소해 보이는 유생은 한빈을 물끄러미 보더니 장유중에게 끌려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제갈공려와 설화 그리고 청화와 소소군이었다.
한빈은 그들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제갈공려 학사님도 들어가시죠.”
“내가 돕는 게 나을 텐데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강호 속담이 있잖아요.”
“백지장이 아니라 떨어지는 칼날입니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을지 피할지는 순발력이 필요하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둘의 뜻이 맞지 않는다면 아마 한 사람의 손은 두 동강 날 거란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이 조금 빠르니…….”
한빈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