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 판단 (1)
제갈공려의 지시는 유생들에게 청천에 날벼락이었다.
그들은 동료 유생이 쓰러진 이유가 향로에 독이 있어서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은 불안한 듯 눈치를 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향로로 모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양석봉이 다시 물었다.
“대체 저희에게 왜 그런……?”
양석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장유중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이번 학기의 시험은 이것으로 대신한다!”
장유중이 향로를 가리키자 유생들이 점점 향로 쪽으로 다가왔다.
유생에게 시험이란 절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몇몇 유생은 머뭇거렸다.
눈썰미가 좋은 제갈공려가 유생들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순간 몇몇 유생과 제갈공려 쪽 유생이 갈리기 시작했다.
제갈공려는 바로 검을 뽑았다.
스릉.
순간의 실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상대 쪽에서도 바로 반응했다.
스릉.
그들도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장유중이 놀라 물었다.
“대체 저들이 왜 검을……?”
“강호의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죠.”
제갈공려가 장유중을 막았다.
* * *
한편 한빈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발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갈지(之)자로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일 성의 구걸십팔보이기에 한빈의 모습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한빈이 음양쌍마가 있는 쪽을 지나갈 때였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손을 뻗었다.
수하의 정혈을 뽑아 막 회복을 마친 음양쌍마가 동시에 자리에서 쓰러졌다.
털썩!
한빈이 그들의 마혈을 제압한 것이다.
한빈과 동수였지만, 앞에 나타난 금의위 복장의 무사들에게 신경을 집중한 음양쌍마는 손도 못 쓰고 쓰러졌다.
한빈은 혈녀의 앞에 전서 통 하나를 던졌다.
휙!
백발백중의 수법으로 쏘아 낸 전서 통은 혈녀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한빈은 몸을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은 금의위 복장을 한 무인의 앞에 섰다.
한빈은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했다.
“금의위에서 오셨군요. 저는 유림 서원의 유생인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저는 금의위의 마원입니다.”
“마원 대협이셨군요.”
“대협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금의위의 마원이 손을 내저었다.
한빈의 시선은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마치 신기한 듯 고개를 돌리는 한빈의 모습에, 마원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한빈은 계속 마원을 훑어봤다.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덜미와 이마 그리고 손이었다.
이 세 곳은 변장할 때 강호인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곳이다.
서른 중반도 안 되었는데 손등에 주름이 잡혔다든지, 목덜미에서 나이가 느껴진다든지…….
혹은 이마 부근에 접착의 흔적이 남아 있다든지 하는 실수는 제법 흔했다.
이런 달빛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한빈은 예외였다.
변장과 독술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한빈이었다.
조그마한 실수도 한빈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목덜미를 본 한빈은 오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이대가 같은 사람으로 변장했을 경우는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마도 마찬가지였다.
최고급 변장 도구를 썼는지는 몰라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손등에 난 상처가 문제였다.
손등에 난 상처의 흔적을 자세히 보던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팔짱을 꼈다.
경계심을 늦추려는 방법이었다.
“혹시……. 강유찬 대인은 잘 계시오?”
“잘 계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팽 공자의 안부를 묻더이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마원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원 대협.”
“왜 그러시오?”
“이마에 풀이 제대로 붙지 않은 것 같소. 흠.”
능청스럽게 헛기침하는 한빈의 모습에 마원의 미간에 골짜기가 생겼다.
덕분에 이제까지는 안 보이던 변장의 자국이 드러났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한빈.
마원은 자신의 상태도 모른 채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이마에 인피면구가 잘 붙지 않았소. 아까는 안 보였는데……. 인상을 쓰니 티가 나는구려.”
“대체 뭔 말인지 모르겠소.”
“그리고 그 허리띠 말이오. 가짜 티가 너무 나오. 금의위의 허리띠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물건이지요. 그 재료는 북경의 한 포목점에서만 취급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 재료를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
“사람들은 그 재료를 비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순백의 면을 노란 색소로 물들인 허리띠이지요. 중요한 것은 노란 색소에 금가루를 섞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그게 진짜 금이라고는 생각을 못 하죠.”
“…….”
“그런데 사실 나는 상관없습니다.”
“흠.”
“저는 마교인이라고 해서 낯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대체 지금 뭐라 하는 것인가?”
마원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하지만 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마교든, 정체불명의 세력이든 관계없소.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오.”
한빈의 말투가 딱딱하게 바뀌자 마원이 눈썹을 꿈틀댔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까부터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소.”
“…….”
마원이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소개를 다시 해야겠군요. 저는 아까 엿들은 대로 진룡소협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진룡이라…….”
“아무래도 소개에 인색한 것 같으시니, 제가 아는 대로 읊어 보겠습니다. 마교 서열 십이 위인 잔혈마도와는 의형제를 맺고 있고…….”
한빈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마원의 입에서 저절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음.”
“정파에서는 잔혈마창이라 불린다지요? 안 그렇습니까? 마원 대협.”
말을 마친 한빈은 빙긋 웃었다.
웃음도 잠시,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익힌 무공은 십칠수라창법으로…….”
그는 한빈이 전생에 알고 있는 마인이었다.
당시에는 서로 병장기를 맞댈 정도로 한빈의 무위가 높지는 못했다.
상대는 극마의 고수.
정파로 치면 화경에 속하는 고수라는 말이었다.
조금 세분하자면, 극마에서도 오 급에 속하는 고수였다.
즉 마원은 화경 중 오경에 속하는 고수와 무위를 겨룰 수 있는 자였다.
귀검대주인 한빈은 멀리서나마 그의 약점과 정보를 취합해 정의맹에 보고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가 말한 마원이란 이름은 아마도 본명일 것이다.
잔혈마도와 비교하자면, 잔혈마창의 무공이 한 수 위였다.
한빈은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한빈의 발치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음양쌍마가 꿈틀대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대화를 길게 가져가는 것은 한빈에게 의도가 있어서였다.
먼저 첫 번째로 확인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 했다.
한빈의 입이 물레방아 돌듯 끊임없이 정보를 뱉어 냈다.
물론 말하는 도중에도 마원의 표정을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마원이 못 참겠다는 듯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음, 네놈이 진정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차라리 도망갔으면 편했을 것을!”
마지막 말에 주변의 돌덩이가 뒤쪽으로 튄다.
일부 돌덩이는 뒤쪽으로 쓰러져 있는 음양쌍마의 면상을 향했다.
한빈은 뒤쪽으로 한 발 물러서 음양쌍마 쪽으로 날아가는 돌조각을 가볍게 낚아챘다.
휙.
누가 봐도 음양쌍마를 챙겨 주는 모습.
한빈은 마원을 향해 다시 포권했다.
“저와 적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원하는 것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알아봤지?”
한빈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실수를 복기하려는 모습으로 봐서 상대는 훌륭한 무인이었다.
작은 웃음의 끝에 한빈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건 간단합니다. 바로 손등에 난 상처 때문이죠.”
“손등이라…….”
“손등에 난 상처를 자세히 보면 누구라도 잔혈마도의 도법에 의해서 난 상처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누구라도?”
“네, 누구라도요. 그걸 못 알아보면 눈이 삔 게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한빈은 영단산에서 잔혈마도와 검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 몸을 원 없이 썰어 댔으니 그 수법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잔혈마창 마원이 침음을 흘렸다.
“음.”
“그리고 금의위로 변장해서 오셨다면 시간을 좀 더 끌었어야 했겠지요. 진법이 풀리자마자 이렇게 들이닥치면 미리 기다린 꼴밖에는 더 되겠습니까?”
“위험한 놈이구나. 정체를 알았으면 죽어야지.”
마원이 창대를 꼬나 쥐었다.
창을 잡은 부분에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원 대…….”
한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마원의 창이 한빈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팡!
둔탁한 파공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한빈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대나무로 만든 전서 통이 마원의 얼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슝!
마원의 창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전서 통을 갈랐다.
한빈의 수법은 본 마원이 미리 위험을 차단한 것이다.
전서 통에는 마원이 걱정하던 독 가루는 없었다.
대신 반으로 갈라진 쪽지가 낙엽처럼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마원의 창이 반쪽 난 쪽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꼬치로 고기를 꿰듯 아무렇지 않게 창끝으로 반쪽 난 쪽지를 낚아챘다.
마원은 창을 거두고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를 본 마원의 눈이 커졌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한기가 몰아쳤다.
스윽!
한빈이 있던 자리에 다섯 개의 핏빛 줄기가 마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팡!
마원이 공격을 쳐 냈다.
마원의 앞에는 음양쌍마가 꼿꼿이 서 있었다.
음양쌍마 중 혈녀가 눈을 크게 떴다.
“진정 마교의 놈들이더냐?”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음양쌍마구나.”
마원도 눈매를 좁혔다.
말을 마친 마원이 삼매진화로 오른손에 있는 쪽지를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바로 창대를 꼬나 쥐었다.
그는 창대를 높이 들었다.
붕!
그 소리에 뒤쪽 있던 마원의 수하가 창대를 땅에 꽂았다.
그 뒤쪽에서 박도를 든 금의위 무사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그들의 수장은 허리띠를 잡더니,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그들의 옷이 변했다.
마치 무대의 배우들이 변검의 수법으로 얼굴을 바꾸듯, 그들의 복장이 바뀌었다.
수장이 변장을 풀자 뒤쪽의 수하들도 복장을 바꾸었다.
달빛을 받은 그들의 모습은 핏빛 불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빈이 빠진 자리에 그들은 음양쌍마와 마주 섰다.
음양쌍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한빈은 몸을 숨긴 채 잔혈마창과 음양쌍마의 대화를 지켜봤다.
한빈은 뒤쪽으로 물러서며 음양쌍마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두 번째 확인을 위해서였다.
한빈은 잔혈마창 마원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아직 모른다.
일단 지금 대화로 봐서는 둘이 같은 패는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한빈은 먼저 마원이 적인지 아군인지를 밝혀내야 했다.
한빈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군을 죽이려 했던 마교인은 적일까? 아군일까?
바꿔 생각해도 된다. 마교인이 죽이려 했던 소군은 적일까, 아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