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천외천 (1)
한빈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어차피 길 가다가 주운 술일세.”
“백아주를 길 가다 줍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런 좋은 술을 넙죽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내게 필요 없는 술인걸…….”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백이라는 사내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의 의복도 그렇지만, 얼굴에도 속세의 티끌이 묻어 있지 않았다.
나이만 어리게 보일 뿐 신선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와 함께 배에 잠깐 오르시죠. 술을 못 드신다면 안주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안주라…….”
한빈이 고민하는 척 망설이자 백이 말했다.
“이런 좋은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혹시 압니까? 제 대접이 영감님의 기력을 찾아 줄 수 있을지요.”
백이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한빈은 이제 선택해야 했다.
한빈이 낚으려던 것이 바로 백경이었다.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미끼가 된 것이다.
이 나루터가 낚싯대요.
한빈이 미끼였다.
한빈은 백을 바라봤다.
사람 좋은 얼굴로 한빈을 초대했지만, 그는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멀리서 주향을 맡았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후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빈과 동류라는 것이다.
거기에 곧게 펴진 바늘을 봤다는 것은 한빈이 처음 낚싯대를 던질 때부터 유심히 봤다는 뜻이다.
또한 그 후 바로 온 것도 아니고 한 시진이 넘게 한빈을 관찰했다니, 상상도 못 할 시력과 더불어 끈기까지 남달랐다.
아직 백이라는 자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백경의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백경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는 것.
물론 백경이 한빈을 낚은 것일 수도 있었다.
백이라는 사내는 한빈의 변장한 얼굴 뒤의 모습을 알 수도 있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에 감사하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백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하얀 배가 나루터로 가까이 왔다.
하얀 배는 물살을 무시하고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더니 나루터에 무사히 접안했다.
움직임이 마치 게가 옆으로 기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배에서 발판이 내려온다.
스륵.
탁.
발판은 계단 모양으로 만들어져 노인이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듯싶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백을 따랐다.
백이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네.”
배 위에 오른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갑판까지 온통 하얀색이었다.
거기에 더해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쪽에는 돌로 된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돌로 만든 탁자마저 하얀색이었다.
마치 눈이 배 위를 덮은 것 같았다.
백이 돌로 된 의자를 가리켰다.
한빈은 그 의자에 앉았다. 백이 손뼉을 치자 기파가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짝.
내공을 담은 한 수였다.
백이 자신을 드러내 보인 첫수였다.
그 소리에 선실의 문이 열렸다.
선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지금 한빈이 변장한 노인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탁자로 다가온 노인이 백에게 포권했다.
“장주님을 뵈옵니다. 별일 없으셨는지요?”
“별일 없었다네. 여기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왔으니 기력을 회복할 다과를 내어 오게, 총관.”
“알겠습니다, 장주님.”
그들의 대화에 한빈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총관이란 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무당이나 화산의 장로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짜 기세를 세월의 벽이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저런 총관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면 백이라는 사내는 백경 내에서도 제법 지위가 높은 것 같았다.
백의 나이도 지금 그대로 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의 앞에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찻잔과 접시가 놓여 있었다.
찻잔과 접시조차 하얀색이었다. 다만 찻잔과 접시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빈이 접시와 찻잔을 유심히 보니, 백이 말했다.
“찻잔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문양이 신기해서 그러네. 나는 이런 문양은 처음 보네.”
“저희 문파 고유의 문양입니다.”
“문파라…….”
“백경이라는 문파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문파를 밝히는 백.
한빈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 문파도 있었군.”
“중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잊힌 문파지요.”
“그렇군.”
“노인장은 어느 도관의 고인입니까?”
“도관이라…….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도덕경 오천 자를 몸에 새기고 있는 도인이 어디 흔합니까?”
“도덕경 오천 글자라?”
놀란 듯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도덕경 오천 글자를 새긴다는 것은 등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백이 말했다.
“분위기가 그렇다는 겁니다. 첫눈에 저는 노인장의 정체를 알아봤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군.”
한빈은 남이 얘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백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호기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저는 노인장이 도를 깨달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려. 그럼 백경도 도가의 문파라는 말이오?”
“뭐 비슷합니다. 일단 드시면서 얘기하시지요.”
백이 접시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전병과 당과가 놓여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병과 당과조차 하얀색이었다.
한빈이 보고만 있자, 백이 백아주가 든 호리병을 들었다.
자신의 입에 백아주를 털어 넣은 백이 한빈을 보며 웃었다.
한빈이 전병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서로의 음식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일종의 관례.
포권이 상대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라면, 지금의 행동은 상대를 믿고 있다는 표시였다.
물론 한빈은 상대를 믿고 있지 않았다.
여차하면 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 상대도 한빈을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이 그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저리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아쉬운 것은 한빈이었다.
이 배에 오른 것은 백경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문제는 지금 한빈이 본 것이라곤 다과와 접시 그리고 텅 빈 갑판밖에는 없었다.
잠시 시답지 않은 선문답이 오갔다.
그때 백이 눈을 빛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제가 심부름을 보낸 아이가 도착한 모양입니다.”
“나는 상관 말게.”
한빈이 손을 내젓자 백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한빈은 그런 백을 바라봤다.
한빈은 지금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점점 짙어지는 만리추종향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다가오는 자는 토끼 가면이 분명했다.
그 토끼 가면이 아니라면 그의 옷을 만진 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최소한 토끼 가면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만리추종향이 한빈의 코끝을 간지럽힐 때였다.
하얀 무복의 신형이 배 위에 내려앉았다.
배 위에 내려앉은 자는 여인이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외모는 화공이 정성 들여 그린 미인도와 흡사했다.
백이 그녀를 바라봤다.
“초아야, 왔느냐?”
“네, 장주님. 시키신 심부름은 모두 끝냈고 왔어요. 신경 많이 쓰이셨죠?”
“벌레에 물린다고 신경이 쓰이겠느냐? 다만 간지러울 뿐이지.”
“그런데 저분은 누구세요?”
초아라 불린 여인이 노인으로 변장한 한빈을 가리켰다.
백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내 손님이다.”
“손님이요?”
“그나저나 힘을 다 썼구나.”
“네. 쥐새끼가 얼마나 날쌔던지, 힘을 다 썼어요.”
“일단 요기부터 하거라.”
백이 말하자, 초아가 한빈이 앉아 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백이 한빈에게 물었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나.”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완벽한 변장술이었다.
당시에는 토끼 가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목소리만 듣고 노고수라 판단했었다.
이런 여인이라고는 한빈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너도 앉거라, 초아야.”
백이 남는 의자를 가리키자 초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잠시 한빈을 바라보다가 전병에 눈을 돌렸다.
백과 초아의 관계는 마치 한빈과 설화의 관계와 비슷해 보였다.
초아는 시녀라기보다는 백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인 것 같았다.
한빈은 그들의 대화에서 쥐새끼가 적룡대협을 뜻하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쥐를 잡았다는 것은 적룡대협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백이 다시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돛이 올라갔다.
발판이 배 위로 딸려 들어왔다.
스르륵.
배가 나루터에서 떨어졌다.
오룡강의 거센 물살을 타고 배가 하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빈이 백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슨 짓인가?”
“원하시는 곳에 내려 드리겠습니다. 제 호의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백이 환하게 웃자 한빈이 물었다.
“원하는 곳이라니……?”
한빈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백이 말을 끊었다.
“노인장께서 원하시는 곳은 아마 삼도천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삼도천이라?”
“이 배에 올라올 때는 삼도천을 건널 결심을 하셨을 것이 아닙니까? 청운사신.”
그는 마지막 청운사신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한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청운이라…….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군.”
“아까 운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운이라는 이름에 푸른 무복이면 청운사신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쨌든 알아봐 주니 고맙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중원의 말이 있듯, 지금 이 자리에서 삼도천을 건넌다고 해도 아쉬움은 없으실 테죠.”
“내가 아쉬운 것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뜨는 것일세.”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한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지막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대체 백경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냥 하늘이라고만 알아 두십시오.”
“…….”
한빈은 조용히 백을 바라봤다.
백은 더는 대답해 줄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백이 고개를 돌리더니 초아를 바라본다.
“준비됐으면 일어나거라.”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았네요, 장주님.”
“받거라.”
백이 하얀 호리병을 던졌다.
그것을 받은 초아가 호리병을 열었다.
호리병을 기울이자 조그만 환약 몇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들의 행동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초아라는 여인의 무공이었다.
초아에게는 분명히 토끼 가면에 묻혀 놨던 만리추종향의 향기가 난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무공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도 저 환약이 그 의문을 풀어 줄 것만 같았다.
초아라는 여인이 환약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순간 초아의 기세가 바뀌었다.
쏴아아!
점점 강해지는 초아의 기세.
마치 둑이 무너져 물이 한 번에 쏟아지듯 기세를 뿜어냈다.
이제 당시 토끼 가면의 무위가 느껴졌다.
환약이라?
의문이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졌다.
하늘이라 한 백경.
거기에 무공을 높여 주는 환약.
그것도 일류 무사를 화경의 경지로 올려 주는 환약이라…….
한빈이 놀란 표정을 짓자 초아가 검을 뽑았다.
스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