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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40화 (526/621)

540. 외유내강(外柔內剛) (5)

천수장의 앞에 도착하자 적혈맹호대의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오더니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

뿔피리 소리에 거대한 천수장의 정문이 열렸다.

드드득.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수장의 문이 활짝 열리자 장유중은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그의 반응과는 다르게 나머지 유생과 서기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천수장의 정문이 성문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천하십대세가라고 하는 하북팽가에서 느꼈던 분위기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누가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저런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자라면 천하 백대 고수의 경지에 이른 고수에 속하는 무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장유중은 그 고수가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문 너머에 있는 것이 한빈의 무공 스승인 홍칠개라 확신하고 있었다.

홍칠개의 괴팍한 성격은 관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지만, 그의 옳곧음은 학문을 정진하는 자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한빈을 만난 후 그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분명 한빈의 성품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천재 유생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한빈을 키워 내는 데 일조했다는 말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었다.

유생들이나 서기들은 사실 무림인들이 두려웠다.

거기에 이 정도의 기세를 피워 내는 무림인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말보다 주먹이나 검이 먼저 나오는 상황은 책을 가까이하던 서기들의 처지에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서기들이 한껏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열린 문틈으로 까무잡잡한 여인이 달려 나왔다.

“주군!”

여인은 마치 헤어졌던 가족이라도 본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외침에 한빈이 웃었다.

“심 부대주. 잘 있었어?”

“네, 그럼요. 참 보고드릴 것이 있어요. 주군.”

달려온 여인은 다름 아닌 적혈맹호대의 부대주인 심미호였다.

순간 서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북팽가 소속의 무사들만큼은 서기들도 두렵지 않았다.

무림인이 예의가 없다고는 하지만, 똑같이 하북팽가의 밥을 먹는 처지였다.

하북팽가의 가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심미호는 차갑기는 해도 하북팽가 내에서 사고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심미호를 바라보던 서기 장문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문 뒤에서 절정의 고수에 버금가는 기세를 뿜어내던 무인이 바로 심미호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적혈맹호대가 공을 세우긴 했지만, 심미호가 절정 고수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일류, 그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무위를 지녔던 심미호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기연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

장문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죽어도 한빈의 옆에서 그 기연을 쟁취할 것이라는 결심을 굳혔다.

물론 다른 서기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무공이 되었든 학문이 되었든 한빈을 최고의 스승이라고 있었다.

서기들의 결의에 찬 눈빛에도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심미호를 바라봤다.

“보고라……. 그럼 편하게 말해 봐. 심 부대주.”

한빈 특유의 허물없는 말투에 심미호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부탁해 놓으라고 한 지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해 놨어요.”

“역시 심 부대주는 빨라서 좋아.”

한빈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뼉을 치자 심미호가 말을 이었다.

“음식도 준비해 놓고 싱싱한 놈으로 풀어 놨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심미호가 자신 있다는 듯 어깨를 쫙 폈다.

자신 있는 심미호의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한빈의 웃음을 조용히 퍼져 나갔다.

장유중도 웃었고 유생들도 말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서기들은 안도했다.

장문수와 조일순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조일순은 고개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오면서 막내 공자 한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하였던가?

그 의심이 지금은 눈이 녹듯 사라졌다.

노예 계약서에 가까운 사제 계약서에 대한 의구심 따위는 훌훌 털어 버릴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치를 보니 자신들을 위해 음식도 준비해 놨다고 한다.

거기에 싱싱한 놈으로 들여놨다고 하니, 머릿속에는 지글지글 익는 고기가 떠올랐다.

그는 조용히 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이제 하북팽가에서 허락된 시간 동안 이곳에서 편하게 학문에 열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서기들을 불렀다.

“다들 이쪽으로 오게.”

한빈의 지시에 서기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들은 기대감 가득한 눈을 빛냈다.

비록 병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군기도 들어 있는 듯 보였다.

한빈은 그들의 바라보며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한빈과 서기들 사이에는 봄날 꽃향기보다 더 진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한빈이 조일순을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조일순이 서기들의 대표가 된 상황.

“참, 소개부터 해 줘야지. 여기 있는 심미호 부대주는 잘 알지?”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잘 안다니까 다행이군, 오늘부터 임시 교관이 되어 줄 심미호 부대주이니 다들 인사 나누게.”

“교, 교관이라니요?”

조일순이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말했다.

“참, 교관은 한 명이 아니니 안심하게.”

“아.”

조일순이 탄성을 흘릴 때였다. 정문 쪽에서 무사 두 명이 뛰어왔다.

그들은 마치 표범처럼 날랜 동작으로 한빈의 앞에 섰다.

“주군 오셨습니까?”

“준비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두 명의 무사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무사와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무사가 같이 나란히 서서 한빈에게 예를 취하고 있었다.

한빈은 그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장삼, 조호! 그만 고개를 들지 그래. 이건 너무 예가 과하잖아.”

한빈이 그들을 보며 씩 웃었다.

장삼의 주름진 입가를 살짝 올린 채 말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주군을 오랜만에 봤으니 그렇죠. 진짜 보고 싶었습니다.”

주인과 수하의 깍듯한 관계지만, 그들의 모습은 마치 가족 같았다.

그 모습에 유생들과 서기들이 감복한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미호는 재빨리 한빈의 옆에 붙었고 장삼과 조호가 앞장섰다.

그들이 향한 곳은 천수장의 뒷산이었다.

천수장의 내부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가끔씩 수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풀벌레 소리와 나무 위에서 들리는 산새 소리만이 아니라면 시간이 멈춰있다고 느낄 정도로 고요했다.

뒷산의 입구 쪽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여러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는 각각 청색과 적생이 반반이었다.

그 상자를 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때문에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흘러나오는 냄새 덕분에 내용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 상자는 심미호가 말했던 음식이 분명했다.

흘러나오는 향기 덕분에 사람들은 한빈이 산해진미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모두 상자 하나씩을 짊어졌다.

꽤 커다랗게 보이는 상자였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산에 올랐다.

터벅터벅.

마치 군대가 행군하는 것처럼 그들이 발소리가 산자락에 울렸다.

이렇게 발소리가 커진 것은 그들이 지쳤다는 증거였다.

천수장의 뒷산이 그리 높지 않다지만, 평생 글과 씨름하던 유생과 서기에게는 조금 벅찼다.

그들이 헐떡거리며 산에 오르자 절벽 하나가 나타났다.

그 절벽 아래에서 한빈이 말했다.

“잠시 여기서 쉬어 가시죠.”

“허허, 그게 좋겠군.”

장유중이 허허롭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한참을 둘러보던 장유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대체 무엇인가? 팽 유생,”

장유중이 가리킨 곳은 절벽의 중간이었다.

장유중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절벽 중간에 현판이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 현판에 적힌 필체가 너무 익숙했다.

아무리 봐도 한빈이 적은 필체였다.

마지막으로 현판의 이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판에는 분명 ‘사신대’라 적혀 있었다.

뱀을 나타내는 사(蛇)와 몸을 나타내는 신(身)으로 이루어진 글자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기는 수련을 위한 장소입니다.”

“수련하는 장소라…….”

장유중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 수련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등짐을 짊어진 무사들의 표정이 환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는 의문이 쌓여 갔다.

적혈맹호대로 소개한 무인들 모두 사신대라는 현판을 바라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물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장유중을 제외한 다른 유생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다.

아마도 숨이 가빠 다른 이의 표정까지 살필 여력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장유중은 사실 음식 보다 저 위에서 한빈이 어떤 놀라운 행동을 보여 줄지가 궁금했다.

장유중이 한빈을 천재 유생이라 판단한 이유가 학문의 성취만은 아니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거기에 문제가 앞에 놓이면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장유중이 가장 궁금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빈은 이곳에 오면서 장유중의 동생이 남긴 흔적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곳에 동행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저 서기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이냐였다.

장유중은 그 문제로 한빈과 내기까지 했다.

내기에서 진 자가 승자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장유중은 이번 내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천재를 왜 천재라고 하는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인재이기 때문이다.

서기들이 향시를 포기하고 무림세가에 몸을 담은 것은 그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빈은 딱 한 달 만에 서기들이 향시에서 붙은 정도의 실력까지 올려놓기로 했다.

장유중의 미소가 점점 진해질 때였다.

한빈이 멈췄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장유중 일행이 식사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한빈이 눈짓하자 적혈맹호대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예상한 대로 산해진미가 쌓여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자에 상을 차렸다.

상을 모두 차리고도 상자는 반 정도가 남았다.

재미있는 것은 적혈맹호대가 열어서 음식을 차리는데 쓴 상자는 모두 청색이라는 점이다.

이제 남은 상자는 적색만 남았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적혈맹호대가 남은 적색 상자를 매고 뛰어 내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색 상자를 맨 강호인이 사라지자 장유중이 물었다.

“대체 저 상자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저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물건입니다. 학장님은 저하고 내기를 하셨죠?”

“그랬지.”

“저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내기는 제가 이길 겁니다. 제일 중요한 건 내면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외유내강이란 말이군. 하지만, 실망은 하지 말게.”

장유중이 한빈을 보며 웃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타고난 그릇은 바뀔 수가 없었다.

이것은 유림서원에서 수재들을 가르치면서 터득한 깨달음이었다.

장유중은 자리에서 사라진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을 바라봤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물건이라니?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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