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 판돈의 주인 (2)
서기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유중이 눈을 빛냈다.
붓을 든 서기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전에 보이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유림 서원에서 강의할 때같이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하북팽가의 서기들을 바라보는 장유중의 태도는 진지했다.
물론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장유중이 인정하는 것은 서기들이 시험에 임하는 태도였다.
그중에서도 하북팽가 서기들의 표정이었다.
장소와 상관없이 붓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저리 행복해할 수 있다니!
다른 응시생들은 시제를 확인하고는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떨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붓을 쥐고 있었다.
장유중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하나 있었다.
노력하는 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어떤 분야든 즐기는 자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들은 이번 향시를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서기들의 모습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의 표정과 흡사했다.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진리를 얻은 동방의 고승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저런 냄새나는 곳에 있으면서도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게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이 한빈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했다.
“지금 결과를 보기보다는 그릇을 만들었다는 건가…….”
장유중은 조용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천수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유중의 착각이었다.
서기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편하게 앉아 있다는 그 자체였다.
거기에 더해 그들은 시제를 보는 순간 어렵지 않게 문장을 떠올렸다.
그동안 수련을 하며 머릿속에 욱여넣었던 사서삼경과 정책론 속의 문장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서기들은 웃음기를 지웠다.
자신들의 변화를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들은 멀리 걸린 시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동시에 답지 위에 문장을 써 나갔다.
스스슥.
이제 다른 응시생들도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치열한 표정으로 붓을 놀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시험장에 광풍이 몰아쳤다.
휘휘 잉!
마치 말이 투레질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시험장을 쓸고 가는 바람에 서생들은 깜짝 놀랐다.
어떤 이들은 부랴부랴 날아가는 시험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고, 어떤 이는 깜짝 놀라 붓을 놓쳤다.
다만, 구석에서 시험을 치르던 하북팽가의 서기들만은 행동의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붓은 조용히 종이 위를 누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묵묵히 붓을 놀리는 서기들의 모습에 장유중이 눈을 빛냈다.
비록 채점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장유중은 항상 시험에 임하는 태도부터 채점하는 사람이었다.
저 정도의 침착성이라면 상, 중, 하의 점수 중에 상을 줘도 될 정도였다.
그때 장유중이 눈매를 좁혔다.
어떤 서생이 붓을 들고 바람에 날리는 시험지를 붙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유중은 그 서생을 보며 혀를 찼다.
그 주변에 있던 서생들은 재빨리 자신의 답문지를 가렸다.
그 서생이 엿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붓을 들고 날뛰는 바람에 먹물이 튈 염려도 있었다.
모두가 인상을 찡그린 가운데, 이리저리 날뛰던 서생이 답문지를 잡고 자리에 겨우 앉았다.
멀찌감치 일어난 일이지만, 장유중은 그 서생의 답지 앞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답지는 자(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다른 이라면 그 문장을 못 보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장유중이 누구던가.
시력 하나만은 강호인만큼 발달한 자였다.
만류귀종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다른 학자들은 이 나이면 눈이 침침해지지만, 장유중은 도리어 눈이 밝아졌다.
장유중이 낸 시제는 왕에서부터 신하 그리고 자식의 도리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느냐의 관계론이었다.
얼핏 본 첫 문장은 정답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장유중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을 모았던 서생은 겨우 답지를 잡았다.
그 서생은 답지를 바닥에 내려놨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사람들은 눈을 돌렸다.
답지를 내려놓은 그 서생은 붓을 놨다.
누가 봐도 포기한 모습이다.
근처에서 지켜보던 관졸조차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조소를 보냈다.
하지만 그 서생 앞에 있는 답지에는 이미 문장이 빼곡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서생은 바로 한빈이었다.
한빈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답지를 바라봤다.
답문지가 허공에 흩날리는 순간 한빈은 붓을 놀려 문장을 작성했다.
바람에 날리는 종이 위에 문장을 적는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에 수를 놓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빈은 순수하게 전광석화만을 사용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문장을 답지 위에 적었다.
모든 것이 유유자적의 효용성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한빈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이런 소란을 피웠는데도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관청에는 절정의 고수도 두 명 있었다.
이곳의 호위를 위해 현감이 의뢰한 자들이었다.
그들조차 한빈이 무공을 쓴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빈은 소란을 피우면서 유림 서원의 유생들이 담장 너머에 있다는 사실도 알아챘다.
그들에게조차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것.
강호인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도 숨어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증명을 마친 한빈은 이곳에 더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옆쪽에 보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답문지에 올려놓은 한빈은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삭.
한빈은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 동작이 어찌나 은밀한지 한빈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빈이 있던 자리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잠시 후, 향시가 끝나 가고.
답문지를 제출한 응시생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먼저 나오는 서생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써낸 문장에 자신 있는 서생들은 몇 번씩 다시 답을 검토하기 마련이었다.
그때였다.
하북팽가의 서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났다.
담장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유림 서원의 유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마조마했는데 무사히 끝났군.”
“그래, 무사히 끝났어.”
“저런 대우를 받고도 신경질 한 번 안 내다니, 역시 수련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군.”
유생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오는 서기들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답문지를 낸 시점이 너무 빨랐다.
거기에 더해 그들은 동시에 답을 제출했다.
즉, 그저 시험을 봤다는 구색만 갖췄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라도 나길 바랐습니까?”
그 목소리에 유생들의 눈이 커졌다.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양석봉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양석봉은 입을 크게 벌렸다.
상대는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한빈이 그들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던 것.
양석봉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앗,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허허, 누가 보면 나는 여기 오면 안 되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그, 그게 아니라…….”
“표정을 보니 꼭 무슨 음모를 꾸미다 들킨 사람 같습니다?”
“허허, 벼락 맞을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팽가의 서기들을 응원하러 왔다네.”
“하하, 저도 농담입니다. 저 앞쪽에 음식을 잘하는 곳이 있으니 요기나 하고 가시지요.”
“그럼 체면 차리지 않고 얻어먹겠네.”
“점심은 제가 살 테니 이따 참은 양 유생님이 사시지요.”
“좋네.”
양석봉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는 하북팽가의 서기들을 맞았다.
* * *
잠시 후.
관청에서는 관졸들이 응시생들이 낸 답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먹이 잘 말랐는지를 확인하고 낸 순서대로 쌓았다.
이번에 온 응시생이 꽤 많아서인지 그들이 모아 놓은 답지는 금세 산처럼 쌓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채점관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감을 바라봤다.
현감이 고개를 끄덕이자 채점관들이 미소로 답한다.
그들은 뽑아야 할 응시생 중 반수 정도의 이름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그 반수를 뽑고 나서 나머지 인원에서 실력순으로 뽑으면 되었다.
장유중은 그들의 무리에 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답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장유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넓은 관청 마당에 팔랑거리는 종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관졸을 불러 그 답지를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확인은 하지 않았다.
관졸이 산더미처럼 쌓인 답지 위에 그 답지를 올려놓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잠시 숨을 돌린 채점관들은 조용히 답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채점 방법에 장유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누가 봐도 기준점 아래인 답지의 경우 불통(不通)이라 표시해서 탈락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답지를 걸러 낸 후에야 남은 답지 중 우열을 가린다.
그때부터는 세세하게 점수를 매겨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답지는 확인도 하지 않고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아마 확인했다면 겨우 이름 정도만 확인했을 시간이었다.
뭐지?
장유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였다.
채점관들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매의 눈으로 답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정상적으로 채점이 들어갔다.
당연히 떨어뜨려야 할 답지에는 불통을 주어 따로 보관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은 지금 상황을 눈치챘다.
급제시켜야 할 응시생부터 추려 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장유중은 더는 이번 향시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품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한빈이 준 백아주였다.
일단 자신이 한빈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자 한빈이 술수를 부리지 않은 것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장유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현감이 다급히 달려왔다.
“어딜 가십니까?”
“오랜만에 구경 잘했네. 나는 그만 가 보겠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 답지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모든 답지를 한번 살펴봤던 그였다.
관졸이 답지를 정리할 때 이미 장유중은 채점을 끝냈다.
머릿속에는 장원부터 마지막 급제자까지 모든 이름을 넣어 놓은 상태.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비교해 보면 될 터였다.
“그냥 가시면 서운…….”
현감은 말끝을 흐리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때였다.
채점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아니, 이런 답지가 어디서…….”
말을 맺지 못하던 채점관들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같은 시각, 천수장 아래의 주루.
하북팽가의 서기들은 눈앞에 나온 요리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지금 나온 음식들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중원에서 맛볼 수 있는 요리는 한곳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