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급보(急報) (2)
설화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서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는 숫자와 매화라는 글자밖에 없었다.
다른 서찰을 열어 보니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매화가 아닌 모란이라 적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뒤로 펴 본 서찰도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자 가만히 있던 소군도 호기심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설화의 옆에 붙었다.
서찰을 본 소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한빈과 서찰을 번갈아 봤다.
그 표정을 본 청화가 물었다.
“혹시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거야?”
“그게…….”
소군은 슬쩍 한빈의 눈치를 봤다.
한빈은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허공을 바라보던 한빈의 시야에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그 새는 하오문의 영물인 조조였다.
어느새 한빈의 옆에 선 설화가 조조를 받았다.
설화가 전서 통을 한빈에게 내밀었다.
“공자님, 여기요.”
“고맙구나, 설화야.”
한빈은 재빨리 통을 확인했다.
가느다란 대나무 통 위에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급(急)]
한빈은 미간을 좁히며 재빨리 쪽지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한 한빈은 잠시 근래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고는 일목요연을 실행했다.
순간 근래의 기억과 맞물린 장면들이 시간순으로 펼쳐졌다.
잠시 무아지경에 들었던 한빈이 눈을 떴다.
설화가 한빈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여기 직접 보는 게 좋겠구나.”
한빈이 쪽지를 펼쳤다.
[경계(儆戒) - 정(正), 마(魔)]
짧은 문장이었지만, 기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마교면 마교고 정의맹이면 정의맹이지, 둘 다 조심하라니요?”
“이건 조금 이상한데요. 미랑 언니가 잘못 보낸 거 아니에요?”
청화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소군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한빈의 시선에 소군이 어깨를 움츠렸다.
한빈은 겁먹은 소군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구나.”
“시작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군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너는 다시 남장을 해야 할 것 같다. 실시!”
한빈이 소군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설화와 청화가 소군의 팔짱을 끼더니 옆방으로 데려갔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울려 퍼지더니 설화가 소군을 데려왔다.
소군은 울상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완벽한 변장을 위해 머리까지 짧게 잘랐다.
설화는 울상이 된 소군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머리는 금방 자랄 거야.”
“저도 언니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었는데…….”
소군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단호하게 손바닥을 보였다.
“그건 나중에!”
설화가 소군을 한빈의 앞으로 밀었다.
소군이 다가오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마교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쓸 모양이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하오문에서 이런 쪽지를 내게 보낼 리가 없지.”
“그럼 어떻게 해요? 공자님.”
“걱정할 거 없어. 오히려 좋아!”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제 발로 온다는 거니……. 이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지.”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악당도 울고 갈 미소였다.
그 웃음 뒤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기다려 보면 연락이 올 거니, 우리는 잠시 쉬고 있자.”
“누구에게 연락이 오나요? 혹시 마교인에게서요?”
“아니, 정의맹에서!”
“정의맹에서 왜 연락이 와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하오문의 정보는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으니까. 대충 상황은…….”
한빈은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설명했다.
대략적인 내용은 정의맹에서 영웅 대회를 열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늘어놓았다.
설명을 듣던 설화가 손을 번쩍하고 들었다.
“그렇게 많은 전서구가 필요하다고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렇게 많은 계약서가 필요하다고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이번에는 마인들에게도 받아 내야 할 수 있으니까.”
“앗!”
설화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놀람도 잠시, 설화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한 말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하긴 했지만, 한빈이 말한 내용은 분명 앞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한빈이 말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려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소군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소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아까 저 서찰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설화가 가리킨 것은 유생들이 두고 간 서찰이었다.
그 서찰은 본 소군이 말했다.
“이건 공자님의 혼처가 적힌…….”
“혼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앞에 쓰여 있는 건 태어난 일시(日時)이고요, 뒤에 있는 건 화초. 화초를 넣은 것은 그 화초와 닮았다고 외모를 묘사한 거예요. 예를 들어 매화는 매화를 닮은 처자라는 것이고 난이라고 적힌 것은 난처럼 가냘프단 거고요. 한마디로 이건 매파를 보내기 전에 상대의 의향을 떠보기 위한 서찰인 것 같아요.”
“대체…….”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이것은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기 위해 떠보는 서찰이었다.
이름이 나와 있지 않기에 상대가 거절해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승낙한다면 상대 가문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매파를 보내도 된다.
한빈은 그 서찰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명문가들이 자신을 혼인으로 엮으려고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빈은 설화에게 말했다.
“그 서찰은 다 묻어!”
“네?”
“아버님 보시기 전에 묻어야 우리가 편할 거야.”
“헤헤, 알았어요.”
설화가 서찰을 챙겼다.
이 서찰을 귀찮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가주 팽강위 때문이다.
이 서찰을 가주 팽강위가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사실 무림세가는 무가와 무가 간의 혼약보다는 무가와 고관대작을 배출하는 명문가와의 혼약을 더 선호한다.
그것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란 속담 때문이다.
강호에 생각지도 못한 혈겁이 들이닥쳐도 고관대작이 버티고 있는 집이 처가라면?
그 혈겁을 살짝 비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 서찰을 보낸 유생들의 집안은 양석봉을 비롯해 최유지 그리고 홍금호 등 지금 실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이었다.
아마도 이 서찰을 보는 즉시, 한빈의 혼처를 정하기 위해 원로 회의를 소집할 것은 안 봐도 훤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한빈은 하루하루 시달려야 했다.
그때였다.
서찰을 모두 챙긴 설화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귀찮은 일은 저희가 다 막을게요.”
“저도 한 손 보탤게요, 공자님.”
청화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해를 잘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빈이 막 다시 설명하려는 순간, 설화와 청화가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사사 삭.
물론 소군도 둘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 * *
다음 날 오후.
하북팽가의 가주전에 모인 원로와 각주 들은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수뇌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찰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살폈다.
그곳에는 영웅 대회의 일시 그리고 장소만이 나와 있었다.
장소는 무당산.
그리고 개최 일시는 바로 두 달 뒤였다.
급박한 일정에 뜻하지 않은 영웅 대회였다.
무림세가의 모임인 무가지회가 끝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 영웅 대회라니!
거기에 무당산이라는 장소도 다소 의아했다.
보통 정의맹에서 개최하는 무림 대회는 서안에서 열렸다.
화산파와 종남파 그리고 정의맹의 본단이 있는 곳이 바로 서안이었기 때문이다.
태사의에 앉은 팽강위가 턱을 괸 채 집법당주 팽대위를 바라봤다.
“동생의 생각은?”
“뭘 고민하십니까? 일단 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입니다.”
“역시 동생은 간단해서 좋군.”
“지금 하신 말씀 말입니다. 혹시……. 칭찬입니까?”
팽대위의 얼굴에 남은 흉터가 살짝 흔들렸다.
기대하고 있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칭찬이네, 동생.”
팽강위가 턱을 괴었던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태사의에서 내려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영웅 대회와 무당파라……. 자네들은 무슨 의도라고 생각하나?”
누구 한 명을 꼭 지정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질문을 받은 수뇌부는 서로 눈치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강호는 폭풍이 쓸고 간 평야처럼 고요했기 때문이다.
영웅 대회를 개최하려면 폭풍의 전조가 보일 때가 적기였다.
그런데 폭풍이 다 지나간 후에 개최한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원인을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주작각의 가기군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나왔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말했다.
“가기군 각주, 할 말 있는가?”
“제 생각에는 사 공자를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막내를 부른다고?”
“한바탕 폭풍이 쓸고 지나간 다음 열리는 영웅 대회입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는 사 공자가 있었던 게 사실 아닙니까? 이런 중요한 사안이라면 사 공자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호, 그게 좋겠군. 역시 가기군 각주가 머리가 좋단 말이야.”
접객당주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빈이 가주전에 도착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도착한 한빈은 먼저 서찰부터 살폈다.
서찰을 본 한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물었다.
“행간에 깊은 뜻을 읽은 것이냐?”
“아닙니다. 서찰에 숨은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근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느냐?”
“이제까지의 영웅 대회가 열렸던 직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빈은 잠시 말을 끊었다.
중간에 끼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팽강위는 턱짓하며 한빈에게 설명을 계속하라 재촉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영웅 대회가 개최되고 나면 무림에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때 접객당주가 기척을 냈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턱짓했다.
발언권을 준 것이다.
발언권을 받은 접객당주가 말했다.
“사 공자, 말씀 중에 죄송한데 순서가 바뀐 것 같습니다. 무림의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기에 영웅 대회를 개회한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웅 대회가 일을 키운 걸 수도 있지요. 십 년 전에 일어난 사파와의 분쟁만 보더라도…….”
한빈은 논리 정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는 한빈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말한 핵심은 간단했다.
모든 충돌은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것.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한빈의 설명이 계속되자 가주를 비롯한 수뇌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한빈의 설명만 들어서는 마치 상호작용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실 한빈이 아니라 다른 자가 이런 의견을 냈다면 다들 헛소리라 했을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