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 그게 바로 접니다 (5)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때 현무각주가 끼어들었다.
“접객당주님이 시력이 나쁘다고요? 생각해 보니 저도 접객당주를 따라 서명했는데…….”
말을 마친 현무각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주작각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워낙 꼼꼼한 분이시니, 저도 마찬가지로 접객당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럼 저희 모두 눈이 잘 안 보이는 접객당주님을 믿고……. 허.”
누군가가 한숨을 쉬자 주작각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혹시, 막내 공자의 간계가 아닐까요?”
“설마요…….”
모두는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물론 한빈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아침부터 한빈의 처소에서는 주향(酒香)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한빈과 팽혁빈 두 형제가 술잔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
팽혁빈은 백아주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한빈을 바라봤다.
팽혁빈은 동생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막내야.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그때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원로들에게 너무 강압적이었던 게 아니더냐?”
“아닙니다. 옛말에 수신제가가 먼저라 하지 않았습니까?”
“가문을 다스리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종이 한 장으로 가능하겠느냐?”
“종이 한 장으로 그들의 마음을 품을 수는 없지만, 가문의 균열을 막을 수는 있지요.”
“허, 네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구나. 솔직한 네 마음을 들었으면 좋겠다!”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는 얼마 전부터 동생 한빈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동생 바보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일을 크게 벌였다.
그때 한빈이 술을 들이켜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하얀색 신형이 한빈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신형은 한빈과 팽혁빈 앞 탁자에 멈췄다.
누군가 미소를 지으며 두 형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보따리를 들고 있는 설화였다.
순간 팽혁빈이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형님, 갑자기 왜 그리 놀라십니까?”
“내가 이제까지 생각 못 한 게 하나 있다.”
팽혁빈이 미간을 좁혔다.
팽혁빈은 지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대체 설화와 청화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동생아.”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지금 설화의 걸음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봤다면 이형환위로 착각할 수준의 경공술이 아니더냐!”
팽혁빈의 질문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야, 구걸십팔보를 익혔으니까 그렇죠.”
“그것뿐이 아니다. 지금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밖에서 들었다는 것은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이라도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흠.”
한빈은 팔짱을 끼고 팽혁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자신의 형인 팽혁빈이 설화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느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질문은 이미 한 번은 나왔어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설화나 청화의 사정에 대해서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급 살수였던 설화의 전직을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천독의 행동대장이었던 청화의 전직도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설화와 청화는 실제 나이보다 외모가 많이 어려 보였다.
만약에 이걸 밝힌다면?
아마 하북팽가가 뒤집힐 소란이 일어날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강철은 두드리면 강해지는 법입니다.”
“…….”
“설화와 청화는 강철에 가까운 아이들입니다. 강철은 강철에 맞게 단련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럼 설화와 청화를 네가 저리 만들었다는 말이더냐?”
“참, 제가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체…….”
“홍칠개 사부님이 한 말입니다.”
한빈은 모든 것을 홍칠개에게 돌리기로 했다.
근거는 있었다. 구걸십팔보는 홍칠개의 무공이었다.
홍칠개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면 누구도 깊이 물어보지 못할 것이었다.
자신이 이리 단련시켰다고 한다면 모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법.
한빈은 팽혁빈에게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
팽혁빈은 탄성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설화를 바라봤다.
물론 무인이라면 감탄하겠지만, 팽혁빈이 보기에 설화는 한창 또래와 어울려야 할 나이였다.
그런데 무가의 여식보다 더 혹독한 수련을 이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설화나 청화, 둘 다 이제는 당씨 성을 쓰는 처지였다.
한빈의 옆에서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 조금 걸리기도 했다.
이건 어찌 보면 사천당가와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팽혁빈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설화와 청화가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설화가 말했다.
“저는 공자님을 돕는 게 좋아요.”
“허허.”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팽혁빈은 표정으로 한빈에게 마치 ‘참 복도 많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설화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순간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대나무 통이 굴러떨어졌다.
도로록.
보따리의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본 팽혁빈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무엇이냐? 설마…….”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이 많은 전서 통을 왜 준비했단 말이냐? 이 많은 전서를 어디로 보낼 예정이냐?”
“이건 제가 보낼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낼 것이 아니라고 했느냐?”
“네, 맞습니다. 하북팽가를 중심으로 십 리 안에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모두 잡았습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요.”
“흠.”
“참고로 어젯밤 사이에 잡은 비둘기의 다리에는 이렇게 전서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전서 통을 꺼냈다.
순간 팽혁빈이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팽혁빈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전서 통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전서 통의 옆에 쪽지를 펼쳐 놨다.
쪽지의 내용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하북팽가의 소가주 무당산행!]
[팽가 소가주를 고수가 호위하기로 예정.]
모든 것이 가주전에서 논의되었던 회의 내용들이었다.
얼핏 봐도 전서 통은 스무 개가 넘었다.
팽혁빈이 분노한 듯 탁자를 내리쳤다.
탁!
그 소리에 한빈이 재빨리 손바닥을 보였다.
“형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가문에 배신자가 이리 많다니!”
“그건 형님의 오해입니다.”
“오해라?”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십 리 안에 날아다니는 전서구입니다.”
“네 생각은 무엇이냐?”
“이걸 마저 보시지요.”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이번에는 청화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팽혁빈은 안타깝다는 눈으로 청화를 바라봤다.
청화는 아무렇지 않게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공자님, 여기요.”
“그래, 수고했다.”
한빈은 쪽지를 팽혁빈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하북팽가의 오백 걸음 안쪽에서 잡은 전서구에서 얻은 쪽지입니다. 저는 원본을 얻고 그대로 베낀 쪽지를 전서구에 매달아 다시 날렸죠. 그 결과가 바로 여기 있는 스무 개가 넘는 전서 통입니다.”
한빈이 말한 핵심은 누군가 정보를 외부에 팔았고 이 차 가공된 정보가 하북 지역 밖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빈이 전서 통을 가리키자 팽혁빈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전서 통의 주인이 가문의 배신자라는 것이냐?”
“배신자까지는 아니고요. 부수입이 필요해서 정보를 넘긴 것이겠죠.”
“그럼 그자를 찾는 것이 먼저겠구나.”
“찾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뒤쪽에서 문서 더미를 꺼냈다.
한빈이 문서 더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팽혁빈이 물었다.
“이건 서약서가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이 서약서는 겸사겸사 받은 것입니다. 이 쪽지의 주인은 분명히 서약을 한 이 중에 있을 겁니다.”
한빈은 하북팽가 오백 걸음 내에서 구했다는 전서와 서약서를 가리켰다.
* * *
잠시 후.
팽혁빈은 한숨을 깊숙이 삼켰다.
“후.”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그가 가문을 배신할 줄이야.”
“그가 배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인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접객당주와의 일이었다.
한빈은 위씨세가가 수뇌부 중 누군가에게 손을 썼다고 확신하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씨세가가 모두 와해되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그 끈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눈여겨본 것이 바로 접객당주였다.
접객당주의 큰아들이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던 것이다.
위씨세가는 접객당주의 약점만 틀어쥔 채 사라진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접객당주의 마음을 얻었다.
그때 결심한 것이 바로 수신제가였다.
어떤 상황이 와도 가문이 흔들리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했다.
한빈은 접객당주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에 팽혁빈도 마주 웃었다.
“내가 아우에게 한 수 배웠다. 가문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피겠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꾸나.”
“네, 말씀하시지요.”
“나를 호위할 고수로 뽑을 자는 누군지 궁금하구나.”
“바로 접니다!”
“아……!”
팽혁빈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 한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형님, 저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팽혁빈은 한빈의 눈을 바라봤다.
한빈은 조금의 사심도 없는 맑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직 강호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팽혁빈의 착각일 뿐이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한빈에게 순수함이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한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 *
무당파로 떠나기 열흘 전.
하북팽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조용했다.
사 공자는 연무장에서 적혈맹호대와 수련을 할 뿐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았다.
지금 한빈의 모습은 각주들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영웅 대회로 가는 준비를 모두 한빈이 알아서 하겠다고 선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빈둥거리기만 했다.
전서구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긴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하북팽가로 오는 물건도 없었고 손님도 없었다.
평소에 왕래하던 상인들과의 거래도 더욱 줄었다.
큰일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에 가주 팽강위는 폐관 수련에 들었다.
수련에 매진할 테니 나머지는 소가주인 팽혁빈이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긴 상태였다.
문제는 팽혁빈도 이번 행렬에 대한 준비에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주작각주 가기군은 현 상황을 몇 번이고 팽혁빈에게 말했다.
하지만 팽혁빈은 기다려 보라고만 할 뿐,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주작각주 가기군은 다른 젊은 각주들과 함께 집법당주 팽대위를 찾아갔다.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그들은 팽대위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참다못한 젊은 각주들은 오늘 다시 현무각에서 모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