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백독지회(白毒之會) (3)
그때 수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팽혁빈은 수레가 왜 이리 늦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수레에는 대충 봐도 엄청난 짐이 쌓여 있었다.
팽혁빈이 가지고 온 짐의 양과 비교한다고 해도 적지 않았다.
그가 하북팽가에서 가지고 나온 짐은 수레 네 대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레도 네 대였다.
수레를 모는 마부에 그 옆에는 호위가 타고 있었다.
적잖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새로 온 수레의 깃발을 보니 천리 표국의 표사들이었다.
순간 팽혁빈의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 여정에 가문에서 지원해 준 자금은 모두 팽혁빈의 주머니에 있었다.
그런데 천리 표국의 표사까지 동원해서 이 많은 짐을 챙겨 온다고?
대체 막내는 그런 돈을 어떻게 마련했단 말인가?
팽혁빈은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문에서나 무가지회 등의 행사에서 내기의 판돈을 한빈이 쓸어 간 것은 팽혁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천수장 또한 그랬다.
아니 그 전에 천수장을 사들인 후 멀쩡한 장원으로 만들어 놨다. 그 후 주변에 사람을 모아 정상적인 마을로 만들었다.
이 모든 일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성과를 혼자 힘으로 이루었다면,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 승승장구한 것이 맞았다.
가문이 직접적으로 지원해 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의술과 독술뿐 아니라 상술까지도 뛰어난 것인가?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가문의 도움도 없이 자신이 이룬 성과를, 가문에 이리 내놓는다는 것은…….
팽혁빈은 한숨을 삼켰다.
한빈의 희생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귀여운 동생으로만 봤는데, 가문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빈이 어깨에 짊어진 것은 강호일 수도 있었다.
팽혁빈의 묘한 눈빛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얼굴 닳겠습니다.”
“아니, 이건 얘기하는 것이 좋겠구나.”
“말씀하시죠, 형님.”
“혼자 많은 짐을 지려 하지 말거라. 짐이 무거우면 나눠 들어야 하는 법이다.”
“네, 그러지 않아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빈이 웃었다.
한빈은 팽혁빈이 어떤 착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난다면 한빈은 청구서를 쫙 돌릴 예정이었다.
이자까지 쳐서 말이다.
그게 이권일 수도 있었고 현금일 수도 있었다.
물론 무가지회에 온 무림세가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미리 서약서를 받아 놨었다.
문제는 투자한 효과가 나올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이번에 투자한 비용은 못 건질 수도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담보로 조금 더 많은 이에게 손을 벌려야 할 수도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주변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차질 없이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준비하고 있다고?”
“네, 무당파로 가면서 나눌 예정입니다.”
“허허, 계획은 내게도 비밀이겠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루 이틀의 여정이 아니잖습니까? 형님.”
“그래, 네 말이 맞다.”
팽혁빈이 끄덕일 때였다.
맨 앞쪽의 수레에서 한빈과 하남정가로 갈 때 동행했던 표두 윤용호가 걸어 나왔다.
그는 팽혁빈과 한빈의 앞에서 작게 포권했다.
그들도 마주 포권할 때였다.
뒤쪽에서 장자명이 뛰어나왔다.
그는 한빈과 팽혁빈을 지나쳤다.
그는 바로 뒤에 있던 현문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어르신! 같이 가시지, 그렇게 뛰어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발 빠른 나를 탓하는 겐가?”
“그건 아니지만, 저만 달랑 두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다가 산적이라도 만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이 약초가 어디 한두 푼입니까!”
“자네는 천리 표국을 못 믿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어르신이 제일 고수 아닙니까?”
그들의 대화에 팽혁빈이 눈을 크게 떴다.
“장 의원! 지금 약초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공자.”
“혹시 뒤쪽 마차 세 대에도 약초가 실려 있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어떤 약초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 대부분이 희귀한 약초인데 그중에는 금양초와 한미초…….”
장자명은 자신이 싣고 온 약초들에 대해서 대충 읊었다.
팽혁빈의 눈은 점점 커졌다.
장자명이 말한 약초는 보통 약초가 아니었다.
상처 회복이나 해독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약초.
저 정도를 긁어모았다면 하북에 있는 약재상을 탈탈 털었다고 봐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우가 가문과 강호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판단은 바꿔야 했다.
짐을 짊어진 게 아니라 강호라는 커다란 바위에 눌려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이건 희생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강호의 평화를 지키려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아우를 저리 만들었을까?
천수장 주변 사람들이 아우를 생불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삼황초를 구할 방법과 저 약초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뒤따랐다.
아무 대책 없이 현문에게 태극검제에 대한 안전을 약속할 한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팽혁빈은 자신을 자책했다.
아우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장자명과 현문의 합류로 그들은 행렬을 정비해야 했다.
약재가 실린 수레를 중간에 놓고 간격을 벌렸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봐도 약재였다.
팽혁빈은 한빈이 구해 온 약재를 애지중지 다루었다.
약재의 위를 덮은 기름종이를 몇 번씩 확인했으며 천리 표국의 표사들에게도 별도로 부탁했다.
정비가 끝나고 나자 한빈이 장자명에게 손짓했다.
신호를 받은 장자명이 앞으로 나와 자신 있게 말했다.
“팽 공자, 저는 준비됐습니다.”
“그럼 안내 부탁드립니다.”
“네. 지름길로 가면 오 일이요, 관도를 통하면 열흘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름길로 부탁드립니다. 이게 다 수련이니까요.”
“흠, 괜찮으시겠습니까?”
“왜 저한테 묻습니까? 저 뒤의 각주들에게 물어봐야지요.”
“허허, 표정을 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지요.”
한빈이 손을 내밀자 장자명이 자연스럽게 가장 앞쪽에 섰다.
그 모습에 뒤쪽에서 현무각주 담천호가 다급히 뛰어나왔다.
“호위를 맡기시겠다는 절세고수는 어찌 된 것입니까?”
“그건 바로 전데요.”
한빈이 절세고수가 자신이라 밝히자 담천호가 웃었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공자님.”
“농담이 아닙니다, 현무각주님. 제가 바로 그 고수입니다. 제가 왜 고수인지는 물론 비밀입니다.”
“그게 대체…….”
담천호는 고개를 돌려 팽혁빈을 바라봤다.
확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팽혁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담천호의 눈은 한없이 커졌다.
당황한 담천호는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가장 이상한 것은 분위기였다.
각주들을 제외한 모두가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가장 뒤쪽에 있는 적혈맹호대의 심미호는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피워 내고 있었다.
심미호가 누구던가?
각주들 사이에서는 냉미호라고 불리던 여인이었다.
그것은 차디찬 그녀의 성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관으로서 피도 눈물도 없었다.
사실 눈물을 흘릴 때는 있었다. 그건 바로 지루해서 하품할 때였다.
고된 수련에 각주들이 죽어 나가도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소리치며 하품하던 것이 바로 심미호였다.
각주들은 심미호가 절대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다음 날.
산서와 하북의 경계에 있는 추룡산맥의 초입.
추룡산맥은 하북과 산서의 경계를 기점으로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이었다.
다만, 북쪽의 용의 머리로 보이는 지형이 험해서 용의 앞에 추할 추(醜)를 붙였다.
산세가 험한 관계로 맹수가 산짐승조차 꺼려 한다는 산맥이었다.
물론 초입에 한해서였다.
아래쪽으로 가면 갈수록 산세가 여느 다른 산과 비슷하기에, 남쪽에는 약초꾼도 제법 드나든다.
문제는 북쪽의 험한 산세 때문에 상인들도 추룡산맥을 타는 것을 꺼려 한다는 점.
시간을 절약하려다가 이승에 있는 시간까지 단축시킨다는 동네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추룡산맥의 초입에 도착하자 앞서가던 수레가 멈췄다.
수레에서 내린 장자명이 두 손을 교차시켰다.
멈추라는 표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추룡산맥은 마차와 수레가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뚫려 있지 않았다.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의 오솔길만이 뚫려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한 자는 없었다.
그들은 장자명이 자신 있게 이곳으로 안내했기에 뭔가 뾰족한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장자명이 수레에서 내렸다.
그는 뒤쪽에 팽혁빈과 한빈이 있는 곳에 와서 추룡산맥의 초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길이 없습니다, 팽 공자.”
“고생했습니다, 장 의원.”
“뭐, 여기서부터는 산자락을 따라서 남쪽으로만 가면 됩니다.”
장자명은 길이 없는 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추룡산맥의 초입을 가리켰다.
그들의 말에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길이 없다니요?”
“팽한빈 공자께서 지름길로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아우와의 대화는 들었습니다. 그럼 이쪽에 장 의원만 아는 길이 있는 겁니까?”
“길이라니요?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허.”
팽혁빈은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
일단 한빈과 장자명을 믿고 있지만, 길이 없는 곳인지 알면서 이곳으로 안내했다는 말이었다.
이건 말도 되지 않았다.
그때 한빈이 조용히 천리 표국의 수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빈은 안면이 있는 천리 표국의 표사 윤용호 표두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리 표국의 마부들과 표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쟁자수들은 약초 더미를 모두 내려놨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약초 더미를 내려놓고 수레를 몰고 떠났다.
남은 표사들은 하북팽가에서 가지고 온 수레 옆에 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적혈맹호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북팽가에서부터 마차와 수레를 몰던 적혈맹호대 대원이 일제히 짐을 내렸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도 각자 짐을 챙겨서 한빈의 앞에 왔다.
난데없는 상황에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우야.”
“여기서부터는 걸어갈 겁니다.”
그때였다.
자리에 남아 있던 천리 표국의 표사들이 하북팽가의 마차와 수레를 몰고 떠났다.
팽혁빈이나 각주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수레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팽혁빈이 물었다.
“그럼 무당산까지 걸어갈 셈이냐?”
“설마요. 그 길이 얼마나 먼데 걸어갑니까?”
“그럼 마차는 왜 보낸 것이냐?”
“저 마차는 화련산 남쪽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다릴 겁니다.”
“화련산이라…….”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화련산은 추룡산맥의 가장 남단에 붙어 있는 산이었다.
산세는 험하고 맹독을 가진 산짐승과 벌레가 가득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덕분에 약초꾼들도 이곳은 피해서 간다.
그런데 화련산으로 간다고 하니 고개를 갸웃한 것이다.
한빈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저희는 백독지회에 참석할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