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4)
한빈은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빈은 그들의 조심스러운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떡을 준다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으면 나중에는 탈이 나게 마련이었다.
무림에는 힘이 아니라 머리로 싸우는 부류들도 있으니 말이다.
잠시 흐뭇한 표정을 짓던 한빈은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품속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낸 한빈은 그것을 쫙 펼쳤다.
한빈은 펼친 두루마리를 그들의 눈앞에 갖다 댔다.
갑자기 들이밀어진 두루마리에 가기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뭡니까? 공자님.”
“이건 속가제자를 허락한다는 확인서입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답하자 가기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속가제자라면…….”
“여러분은 제 제자나 마찬가지니 구걸십팔보를 전수해도 상관없는 것이지요. 속가제자의 속가제자도 개방의 제자이니 말입니다.”
“개방에 속가제자가 있었습니까?”
가기군은 온몸을 엄습하는 통증도 잊어버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방에 속가제자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속가제자는 도교나 불교를 기본으로 하는 문파들에나 있었다.
가기군의 질문에 다른 각주들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빈을 바라봤다.
개방의 속가제자라는 말에 그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도교의 성지에서 도인으로 수련하는 무인과, 세속에 내려와서 생활하는 속가제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제도였다.
물론 소림사 같은 불교 중심의 문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개방은 어떠한가?
속세 속에서 동냥 그릇을 내미는 것이 바로 개방도였다.
일반 백성과 이미 섞여 있는데 무슨 속가제자가 있단 말인가?
이건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확인서였다.
“피 같은 돈을 들여 산 확인서이니 믿어도 됩니다.”
“그럼 아까 피 같다고 하셨던 건?”
“당연히 돈이지요.”
“헉, 대체 공자님과 홍칠개 어르신은…….”
가기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한빈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말이 없자 한빈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 피 같은 돈을 여러분께 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꼭 살아남으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밤 죽으면 저는 슬퍼할 겁니다.”
“자, 잠시만요. 공자님. 저희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추룡산맥의 초입에 왜 산짐승들이 없는 줄 아십니까? 주작각주님.”
“그야, 산세가 험해서 그런 게 아닙니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한빈이 눈을 빛내자 가기군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수풀로 가려진 곳곳에 낭떠러지가 있고, 낭떠러지를 피하면 수렁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산짐승들도 없다고……. 그럼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말입니까? 공자님.”
“사실 추룡산맥의 초입에는 맹수조차 두려워하는 친구 하나가 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독각서우(毒角犀牛)라는 영물을 들어 보신 적이 있을는지요?”
한빈의 말에 달빛을 받은 가기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그는 머릿속으로 끔찍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았다.
가기군의 표정에 담천호가 눈썹을 꿈틀댔다.
악필승도 턱짓하며 아는 것을 대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표정에 가기군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독을 먹고 자란다는 무소라고 들었습니다. 맹독을 먹고 자란 덕분에 뿔에 독기가 모여서 마치 창을 달아 놓은 것같이 보인다는 전설의 짐승이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게 바로 독각서우지요. 조금 더 얘기를 덧붙인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도검으로는 죽일 수 없이 가죽이 딱딱하다고 해서 독각 대신 불사(不死)라는 이름을 앞에 붙이기도 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각서우는 남만야수궁에서 신성시하는 영물 중 하나가 아닙니까? 저희가 남만야수궁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혹시 무당이 아닌 남만야수궁이 저희의 목적지라면…….”
가기군은 혼란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그는 한빈의 평소 성격을 떠올렸다.
항상 비밀을 중시하는 한빈이었다.
그렇다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두를 속였을 수도 있었다.
가기군은 독각서우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빈의 말대로 독각서우는 남만야수궁의 영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의 삼대영물 중 하나였다.
이 부분에서 가기군은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곳은 남만야수궁이 있는 운남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운남의 영물이 하북 지역까지 올라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기군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한빈은 웃었다.
“독각서우는 남만야수궁이 아닌 이곳에 있습니다. 아마도 독각서우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이십 년 전일 겁니다.”
“독각서우가 이곳에 있다고요?”
가기군이 눈을 크게 떴다.
독각서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무소라도 이곳에 있을 리는 없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놈은 남만야수궁의 독각서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
“조금 더 뿔이 많고 약간은 성질이 더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각서우가 조금 있으면 이곳에 도착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각불사는 각주님들을 노릴 겁니다. 그놈을 피하기 위해서는 구걸십팔보가 필요합니다. ”
“독각서우가 왜 저희를 노립니까?”
“검상에 가장 좋다는 약초가 뭔지 아십니까?”
“저희 몸에 발라 줬던 한미초 아닙니까?”
“네, 독각서우가 가장 좋아하는 풀입니다. 그리고 한미초와 함께 썼던 불향각도 독각서우가 좋아하는 재료지요.”
한빈의 말에 가기군이 헛숨을 들이켰다.
“앗, 대체…….”
“각주님들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안 하면 아마도 구걸십팔보는 평생 익힐 수 없을 겁니다.”
“그냥 구결만 말씀해 주시면 될 걸 왜 이렇게까지…….”
“구결보다 절실함이 먼저 있어야 익힐 수 있는 것이 구걸십팔보니까요. 사실 무당파나 화산파의 수뇌부도 그 구결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익힐 수 없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개방에서도 절실함이 없는 자는 익힐 수 없는 경공술입니다.”
“대체 공자님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가기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선가 바닥을 짓이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쿵. 쿵!
그쪽을 힐끔 본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거의 도착한 모양입니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공자님.”
말을 마친 가기군이 마른침을 삼키자 한빈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구걸십팔보를 익히실 겁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
“…….”
한빈의 말에 가기군은 답하지 못했다.
한빈은 나머지 각주를 바라봤다.
그들도 이를 깨문 채 아무 말 없었다.
그때 악필승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저희가 구걸십팔보를 진짜 익힐 수 있는 겁니까? 공자님.”
“그건 장담하지요.”
“그런 저는 목숨을 걸어 보겠습니다.”
“오호.”
한빈이 의외라는 듯 악필승을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악필승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였다.
사실 악필승에게는 그 어떤 무공보다 구걸십팔보가 더 절실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악필승은 언제 목이 칼이 들어올지 모르는 강호가 싫었다.
지금만 해도 ‘악’ 소리 한 번에 여기까지 끌려오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게 힘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무공을 익혀서 힘을 기르기는 싫었다.
자신은 요리가 적성에 맞았으니까!
그런데 구걸십팔보만 익히면 언제든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림 최고의 경공술 중 하나인 구걸십팔보만 익힐 수 있다면?
조향각이 아니더라도 이 바닥을 떠나 완벽하게 잠적할 수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고 해도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이런 마음을 먹고 있으니, 악필승의 표정은 다른 둘보다 결연할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진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악 각주!”
“악!”
악필승이 이전 훈련 때의 구령으로 답했다.
물론 그냥 버릇처럼 튀어나온 구령이었다.
하지만 그 구령이 나머지 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특히 담천호의 경우는 마치 눈동자가 호롱불로 변한 것처럼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담천호는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외형적인 무공의 자부심뿐이 아니었다.
그는 내면적으로도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그런데 하북팽가에서 음식이나 관리하는 조향각주가 저리 용기를 내자, 담천호는 자신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담천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저도 목숨을 걸고 배우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한빈이 다시 묻자 담천호가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답했다.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가기군이 자신도 지지 않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저도 목숨을 걸겠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목숨을 걸겠다고 하는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구결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으십시오. 딱 한 번만 말해 줄 겁니다. 음식에는 귀천이 없으며…….”
“…….”
각주들은 답하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킨 채 구결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한빈이 설명을 이었다.
“날마다 몸이 새롭게 태어나니 걸음 또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새로울지다. 이 모든 것은 음식을 향한 간절함에서 나오니. 앞에 음식을 못 잡으면 죽음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
구결을 읊은 한빈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주들은 눈을 감고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독각서우라는 말도 안 되는 영물이 이곳에 들이닥친다고 하니 덜컥 겁도 났다.
하지만 지금 한빈이 불러 주는 구걸십팔보의 구결은 천고의 기연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목숨을 걸겠다고 하는 그들의 결심은 진심이었다.
하북팽가에서도 직계가 아니면 익힐 수 없는 무공이 부지기수였다.
익힐 수 있는 무공보다 익힐 수 없는 무공이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무공이요, 비급 아니던가!
그런데 구걸십팔보는 구파일방의 무공이었다.
구파일방의 무공 중에서도 최상급의 무공이었다.
이런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구결을 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달빛을 받은 하얀 신형이 한빈의 옆에 섰다.
물론 신형의 주인은 설화였다.
“공자님, 저희는 준비 다 됐어요.”
“형님이나 현문 어르신께도 전했지?”
“네, 모두 전했어요. 심미호 언니한테도 잘 말해 뒀어요. 신호만 보내면 돼요.”
“그래, 수고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때 각주들이 눈을 떴다.
그들은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그들에게 한빈이 말했다.
“그런 건투를 빌겠습니다.”
순간 세 명의 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