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83화 (569/621)

583. 갈림길 (3)

얼음을 깎아 놓은 듯한 분위기는 착각이 아니었다.

거대한 얼음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빙공의 고수이자 독공의 고수.

여인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독호는 그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백룡의 이인자로, 별호는 빙설(氷雪)이며 이름은 여라희였다.

독호는 그녀의 나이조차 짐작이 되지 않았다.

외모만 본다면, 아마도 한 번쯤은 환골탈태를 하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그들이 백독지회를 앞둔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가 하는 점이었다.

독호는 일단 상대를 다독이는 것이 먼저라 판단했다.

그는 재빨리 허리를 굽히려고 했다.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마부가 바람처럼 여라희의 옆으로 날아갔다.

“단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너는 그냥 보고만 있거라.”

여라희의 말에 나서려던 마부가 그 자리에 멈췄다.

마부를 제지한 여라희가 독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살포시 포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짝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여라희의 모습에 독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백룡의 이인자가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는 건…….

독호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안 하던 행동을 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죽이려고 하든가.

자신이 죽을 때가 됐든가.

백룡이란 조직의 특성상 첫 번째일 가능성이 높았다.

독호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안전과 무파의 안전.

그리고 훗날까지도 상상하며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상대를 어찌 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여라희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독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시지요.”

순간 독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독재란 하독과 해독에 쓰이는 재료를 말한다.

하독을 하기 위함인지 해독을 하기 위함인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목적을 말했다는 것은 중요했다.

목적을 들어주면 살아날 가망이 있기 때문이다.

독호가 재빨리 말했다.

“일단 필요한 게 뭔지 말씀하십시오. 저희도 어찌 보면 먼 친척뻘이 아닙니까.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백독지회가 열립니다. 그때가 되면 천하의 도인들이 질 좋은 독재를 들고 이곳에 모일 겁니다. 그러니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

여라희가 품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말없이 독호에게 전했다.

독호는 재빨리 그 쪽지를 펼쳤다.

쪽지의 상단을 읽어 나가던 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구하기 힘든 재료는 아니었다.

이곳에 없는 것은 다른 독인들에게 서신을 띄워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되었다.

쪽지를 읽어 나가던 독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이, 이건 저희도…….”

“구하기 힘드신가요?”

“일단 저희의 창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외람되오나 이 독재들로 무엇을 하실 건지…….”

“해독제를 만들 겁니다.”

“흠, 일단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독호는 백독문의 안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여라희가 마부를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노인은 다시 날듯이 마차로 향했다.

마차에서 마부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물건을 꺼냈다.

순간 뒤쪽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부가 꺼낸 물건은 침상이었다.

만년빙옥으로 깎아 만든 커다란 침상을 마차에서 꺼낸 것이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그 침상을 들쳐 메고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부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백 근의 돌덩이로 찍은 것처럼 움푹 파였다.

마부는 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말을 마차와 분리하고 말고삐를 쥐었다.

타닥.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말고삐를 잡고 여라희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안내하는 독호의 심정은 복잡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재료 중에는 구할 수 없는 재료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이십 개였다.

하나도 구하기 힘든 것을 이십 개 구하라니!

독호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흔들었다.

백룡에서 온 마부와 여라희가 백독문의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

일단 모든 대비를 해야 했다.

* * *

백독문의 심상치 않은 상황과는 별개로 한빈은 독각서우의 흔적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를 걸어갔을 때였다.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여기 보세요!”

고개를 돌려 보니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청화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변에 먹을거리를 찾고 있다가 한빈을 보고 외친 것 같았다.

한빈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청화가 뿔 하나를 잡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뿔은 남자의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거기에 순백색을 띠고 있어 마치 상아와 비슷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탐이 날 만한 진귀한 장신구 같은 느낌의 뿔이었다.

순간 장자명의 눈이 커졌다.

“저, 저건…….”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은 놀란 그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때마침 청화의 옆을 지나가던 조호가 손을 뻗어 뿔을 잡으려 했다.

누가 봐도 장난을 거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표정을 굳혔다.

문제는 저 뿔의 정체였다.

뿔의 정체를 눈치챈 한빈이 외쳤다.

“멈춰!”

그와 동시에 한빈은 용린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일촉즉발!’

한빈의 몸에 화살처럼 조호의 쪽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한빈이 신형을 쏘아 내자 옆에 있던 장자명은 기겁하며 옆으로 물러섰다.

“헉, 팽 공자!”

하지만 한빈은 답하지 않았다.

조호를 향해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휙.

한빈이 조호와 청화 사이에 도착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한빈은 조호 대신 청화의 손에 있는 뿔을 낚아챘다.

탁!

뿔을 낚아챈 한빈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조호의 앞에 섰다.

조호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주, 주군 왜 그러세요? 혹시 제가 잘못이라도…….”

“조호야, 너 지금 죽을 뻔했다.”

한빈이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조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독각서우의 뿔, 즉 독각이다.”

“독각이라니요?”

“방금 사라진 그 영물의 코뿔이란 말이다.”

“이건 하얀색이잖아요. 아까 놈들의 뿔은 검은색이고요.”

조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빈이 들고 있는 뿔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영롱한 순백색의 뿔은 상아와 비슷했다.

조호의 표정을 본 한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봤던 놈들의 뿔은 흑색이지?”

“네.”

“독각서우는 죽기 전에 뿔에 모든 기운을 몰아넣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검은색이어야 하잖아요, 주군.”

“그런데 독각서우가 품고 있는 독이 한계까지 응축되면 하얀색이 된다고 하지.”

“헉, 그럼…….”

말끝을 흐린 조호가 놀란 듯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외쳤다.

“그만! 뒤쪽에도 있다.”

“네?”

조호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조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한빈의 말대로 사방에 하얀 뿔이 널려 있었다.

“저게 전부 독각이라고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한빈이 주변을 가리켰지만, 조호는 반신반의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조호도 독각이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팽 공자의 말이 맞네. 그건 독각이 분명해.”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은 은빛이 감도는 장갑을 끼고 한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독각을 장자명에게 건넸다.

장자명은 조심스럽게 독각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살피던 장자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그의 웃음에 조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의원님, 그거 진짜 독각 아니죠? 진짜라면 의원이 그렇게 웃으실 리 없겠죠.”

“아니다. 이건 진짜다.”

“그런데 왜 웃으시는 겁니까? 의원님.”

“이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최상품이네. 독기가 완벽하게 응축되어 있는 물건이야. 우리 사부님이 독기가 응축될수록 크기가 작아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진짜구나. 하하.”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장자명의 모습에 조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조호는 장자명의 의술만큼은 믿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 독각이라면 방금 죽을 뻔한 것이 맞았다.

조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폭약이 묻힌 적진이나 이곳이나 조호에게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을 벗어나려던 조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헉, 그러고 보니…….”

“왜 그러느냐?”

“청화가 먼저 만졌잖아요. 어떻게 해요!”

“청화는 괜찮다.”

“맨손으로 만졌는데 어떻게 괜찮아요? 주군.”

조호가 깜짝 놀라 청화에게 다가갔다.

조호는 사방에 독각이 널려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청화를 살폈다.

안색을 살피더니 이제는 청화의 소매를 잡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빠르게 청화의 손을 살핀 조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어요, 주군. 청화가 중독된 것 같아요.”

난데없는 말에 장자명이 독각을 한빈에게 건네고 청화에게 달려왔다.

“청화가 중독됐다고?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냐?”

“독각서우의 독은 응축되면 하얀색이라면서요. 그래서 그 흰 뿔이 제일 위험하다고 주군이 그러셨어요.”

“그래서?”

“설화의 손이 하얗게 변했어요.”

조호는 속이 타들어 가는지 입술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장자명은 청화의 손을 바라봤다.

상태를 살피던 장자명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조호를 바라봤다.

장자명은 조호의 호들갑에 다급하게 청화를 살핀 것이었다.

그도 청화가 중원에서 몇 안 되는 공독지체를 완성한 자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화가 중독된다?

이것은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청화에게는 중독 증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독기를 흡수했는지 활기까지 넘쳤다.

아마도 청화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조호가 오해한 것일 터.

조호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한 미소를 피워 내고 있었다.

설화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아예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장자명은 피식 웃으며 청화를 바라봤다.

“조호가 ……그렇다는데?”

“제 손은 원래 하얀데요. 헤헤.”

청화가 어색하게 웃자 조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청화도 어엿한 당가의 직계다. 독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면 안 되지.”

“아, 그렇군요.”

조호가 입을 벌리더니 경외감 가득한 눈빛으로 청화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청화의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청화를 마저 살핀 장자명은 시선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독각을 살폈다.

지나가던 독각서우가 이걸 떨어뜨리고 갔을 리는 없었다.

이곳 추룡산맥에는 독각서우들의 무덤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