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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86화 (572/621)

586. 그대들을 믿습니다 (1)

설화가 비둘기를 날리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팽혁빈조차 자신의 아우를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둘기란 새는 상당히 예민하기 때문이다.

괜히 여기에서 소란을 피우면 비둘기가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보를 다른 곳에 누설하는 것밖에 안 된다.

과연 저 전서 통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이것이 팽혁빈과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이었다.

모두의 뜨거운 시선에도 설화는 묵묵히 비둘기에 전서 통을 매달고 있었다.

그렇게 작업을 거의 마쳤을 때였다.

상자 중에는 아직도 천에 가려져 있는 것들이 있었다.

천으로 겉을 막아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자 하나하나를 다시 덮어 놓은 것.

설화가 그 상자의 천을 걷어 냈을 때였다.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해 냈다.

“헉, 이런 미친!”

그 반응은 당연했다. 이중으로 천을 덮어 놓은 상자 안쪽에는 매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전서구 사이에 전서응을 섞다니?

이건 팽혁빈의 말대로 미친 짓이 맞았다.

그러지 않아도 예민한 새 중의 하나가 비둘기였다.

그런데 전서응을 같이 날린다면?

비둘기는 살기 위해 목적지도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전서응과 전서구를 같이 날린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겁만 주지 잡아먹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말이다. 저게 훈련된 전서응이라고 해도 비둘기는 분명히 겁을 먹을 테고, 목적지도 없이 중원의 곳곳을 떠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저놈들을 그냥 날린다고?”

그때였다.

설화가 새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마치 동시에 연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이것은 구걸십팔보의 속도 때문이었다.

설화는 구걸십팔보의 극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동시에 백 마리가 넘는 비둘기가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푸드덕.

공중에서 비둘기들이 빙빙 돌며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이어서 전서응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전서응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빙글빙글 돌던 비둘기들이 방향도 잡기 전에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팽혁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저렇게 뿔뿔이 흩어진다면 전서를 보낼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괜찮습니다, 형님.”

“저기에는 분명히 중요한 기밀이 적혀 있을 테고 강호인들은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모두가 전서에 적힌 기밀을 볼 것이야. 그런데 괜찮다고?”

질문이 아니라 이건 한빈을 탓하는 목소리였다.

팽혁빈은 아우를 믿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한빈의 강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인지는 몰라도, 이곳까지 와서 전서구를 날릴 정도면 이번 일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매는 비둘기를 잡지 않았다.

비둘기 같은 하찮은 생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도도하게 날갯짓하며 방향을 잡고 날아갔다.

하지만 비둘기는 사정이 달랐다.

뿔뿔이 흩어져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매를 피해 도망치다 보니 아래로 내려온 놈들도 있었고, 허겁지겁 숲으로 들어가서 몸을 피한 놈들도 있었다.

어떤 비둘기는 일단 앞만 보고 날아갔다.

그렇게 날다가 서로 부딪힌 놈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한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매는 강남 사도련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비둘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래, 신기하구나. 그런데 비둘기는 방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구나, 아우야.”

“그게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바라던 바라고? 목표를 잃고 저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네가 원하던 바라는 것이냐?”

“저렇게 흩어지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비둘기도 있을 테고, 잡혀서 전서를 도둑맞을 놈들도 있을 테지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런데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헉, 그게 진짜 네 의도란 말이냐?”

팽혁빈의 눈이 커지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소문이 빨리 퍼지니까요.”

한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놀란 팽혁빈이 물었다.

“그럼 저 전서구들은 무엇이냐?”

“아까 말씀드렸듯이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저도 이제부터 바둑돌을 놓으려고 합니다.”

“바둑돌이라…….”

“때로는 아무 뜻 없이 던진 돌에 적이 죽는 법이지요.”

“그건 적이 아니라 개구리가 아니더냐?”

“그냥 적이라고 해 두죠. 그게 편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돌을 던졌으니 누군가 맞겠죠.”

“그 누군가라는 것이…….”

“저도 모릅니다. 저희를 지켜보는 자들이겠죠. 무당산에 함정을 파 둔 자들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럼 저 전서구가 옮기는 게 네가 던진 돌이라는 건데……. 대체 내용이 무엇이냐?”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빈은 말을 끊고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변을 쓱 훑어보던 한빈의 시선이 멈춘 곳은 세 명의 각주들이었다.

한빈은 세 명의 각주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 분 각주님들.”

손짓하는 한빈을 본 각주들이 달려왔다.

사사-삭.

바로 앞인데도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달려오는 세 명의 각주.

이것은 세 걸음 이상은 뛰라고 한 한빈의 지시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빈의 지시를 잊지 않는 세 명의 각주는 군기의 표상이었다.

물론 이것은 한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한빈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금 걸음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한빈의 계획은 그들의 걸음걸이, 즉 구걸십팔보의 성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각을 잡은 세 명의 각주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사삭.

이번에는 청화가 한빈의 옆에 섰다.

청화는 조용히 보따리를 들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는 세 개의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적색, 하나는 청색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흰색이었다.

각기 다른 세 개의 보따리를 본 악필승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중 가장 한빈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악필승이었다.

악필승은 목 뒤의 솜털이 바싹 섰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악필승은 숨을 멈췄다.

그와는 달리 나머지 두 명의 각주는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다.

일단 악필승은 살짝 뒤로 물러선 상태.

주작각주 가기군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사 공자님.”

“주작각주님은 어떤 색을 원하십니까?”

“네?”

“셋 중 어떤 색을 원하시는지 말해 보십시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게 뭐기에 선택을 하라고…….”

“일단 말씀해 보십시오.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보따리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가기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한빈이 장사꾼처럼 느껴지는 가기군이었다.

가기군이 궁금한 것은 보따리의 정체였다.

그다음 궁금한 것은 왜 자신들을 불렀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의문에는 답도 해 주지 않고 보따리를 고르라고 하니 누가 봐도 수상했다.

가기군은 슬쩍 눈치를 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중에 뽑아도 되겠습니까?”

“그럼 남은 게 주작각주 차지가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 공자님!”

가기군이 손을 흔들며 주변의 눈치를 봤다.

그는 평생 정보 수집을 해 왔다.

이런 상황이 아예 낯설지는 않았다.

저 보따리를 선택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저 보따리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몰랐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모두는 목을 길게 빼고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기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청화를 바라봤다.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청화는 해맑은 표정으로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행복한 듯 오물거리는 청화였다.

그녀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읽히지 않았다.

가기군이 천천히 손을 뻗으며 한빈의 눈치를 봤다.

한빈의 표정을 보고 보따리를 선택하려고 했다.

흰색으로 향하던 손을 가운데 있는 청색 보따리로 바꾸어 봤다.

하지만 한빈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대신 청색 보따리를 발로 툭 찼다.

가기군은 자신도 모르게 청색 보따리를 잡았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주작각주는 뒤로 물러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작각주 가기군이 청색 보따리를 들고 뒤로 물러나자,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가기군이 적혈맹호대의 옆을 지나칠 때였다.

조호가 옆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작각주님이 청색 보따리를 잡았어요. 주작각주님은 정보에 능하시니 저게 가장 좋은 보따리일 거예요.”

“조호야, 너는 인생을 헛살았구나. 강호에서는 정보보다는 운이 운명을 좌우할 때가 있단다.”

그들의 목소리에 주작각주 가기군이 고개를 돌렸다.

“흠.”

헛기침한 주작각주 가기군은 조호를 쏘아봤다.

그 모습에 조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놀리려고 한 게 아니에요, 주작각주님.”

“아무리 봐도 구경거리가 된 것 같구나. 이건 무슨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장명 같아서 등골이 서늘하기도 하고 말이다.”

“어떤 옛날이야기요?”

“그런 얘기가 있지 않으냐? 서생이 산길을 가는데 나무 위에서 머리카락이 내려오더니 빨간 보따리를 줄까, 파란 보따리를 줄까 했다는 그런 얘기 말이다.”

가기군은 조호와 말을 섞으며 긴장이 풀렸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조호가 보따리를 가리켰다.

“일단 풀어 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각주님.”

“공자님의 명이 없는데…….”

“주군이 각주님께 준 거잖아요.”

“그럼 어디 풀어 볼까?”

가기군은 보따리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조호가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자 가기군도 호기심이 동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물건이 기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따리를 풀고 난 가기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쪽의 내용물은 그가 익숙하게 봐 왔던 물건들이었다.

평범한 옷가지와 변장용 도구들, 그리고 한 장의 지도가 들어 있었다.

변장용 도구가 평범하다면 다소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가기군은 그 도구들이 낯이 익었다.

소싯적에는 일선에서 뛴 적이 있는 가기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가장 귀에 잘 들어오는 것이 심미호의 목소리였다.

“와, 담천호 각주가 적색을 뽑았어. 왠지 남은 흰색이 꽝 같은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꽝이 적색일 수도 있고 청색일 수도 있는 법이지요.”

“흠, 그건 장삼의 말이 맞아.”

“감사합니다, 부대주.”

그들의 말에 가기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른 각주를 바라봤다.

악필승은 흰색 보따리를 들고 있었고 담천호는 적색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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