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 그대들을 믿습니다 (4)
대답을 기다리는 가기군은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천수장의 훈련 때보다도.
독각서우와 마주했을 때보다도, 그는 긴장한 모습이었다.
세 명의 각주와 한빈의 대화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모습도 비슷했다.
각주들에게 이상한 훈련을 시킨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라?
그 위명에 걸맞은 적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화경의 고수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빈이 앞서 말한 삼 할이라는 확률도 크게 잡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정보를 담당하며 수많은 가문 및 문파와 눈치 싸움을 해 왔던 가기군이었다.
가기군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상황을 지켜보던 설화와 청화도 궁금한 듯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모두의 뜨거운 시선에도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기본적인 방향은 맞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기군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가 각주에게는 몇 개의 임무가 더 있습니다.”
“제가 비밀…….”
가기군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네, 비밀 임무가 맞습니다. 그래야 팽가의 주작각주답지 않겠습니까? 주작각주는 머리를 써야 하는 임무가 적당하겠지요. 그리고 현무각주는 무공을 써야 하는 임무가 어울릴 것이고요. 물론 조향각주님은 요리라는 특기가 어울리겠지요. 지도의 뒤편을 보십시오.”
“지도의 뒤라고요?”
고개를 갸웃한 가기군은 손에 든 지도를 뒤집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말대로 지도에는 그의 임무가 적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가기군은 지도를 외우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기군은 결연한 표정으로 지도를 한빈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현문의 손에 들어간 지도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이제 임무를 수여하는 과정이 모두 끝난 것이다.
한빈이 팽혁빈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팽혁빈이 외쳤다.
“모두 잔에 술을 채워라!”
그의 말에 모두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착. 착.
그들은 마치 발검을 하듯 술잔을 들었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잔을 든 채 대공자 팽혁빈의 말을 기다렸다.
팽혁빈이 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강자!”
“지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뒷말을 외쳤다.
팽혁빈이 다시 외쳤다.
“팽가!”
“무적!”
말을 마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술잔을 비웠다.
이제 그들의 출정식이 끝난 것이다.
가문의 밖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임무를 받은 세 명의 각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술을 비운 가기군이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한빈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보따리를 받고 내내 궁금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보따리의 색이 무작위가 아니었습니까?”
“이건 비밀인데 주작각주님께만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한빈이 눈짓하자 가기군이 상체를 기울였다.
가기군이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모습에, 한빈이 속삭였다.
“현무각주는 원래 붉은색을 좋아합니다.”
“네?”
“모르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주작각주인 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사 공자께서 아셨습니까?”
“그야 관심이 있으니까요.”
“관심이 있다는 건……. 계속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표정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작각주님이 손바닥을 펼칠 차례이지요.”
“아, 알겠습니다.”
주작각주 가가군이 눈을 빛냈다.
그는 자신이 가문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모든 이의 강점과 약점을 자신이 틀어쥐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자신의 자만인 것 같았다.
그조차도 몰랐던 사실을 사 공자는 모두 꿰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에 소름이 돋았다.
청색 보따리를 차서 잡게 만든 후.
현무각주는 당연히 적색 보따리를 잡을 것이고.
당연히 남은 하얀색 보따리는 조향각주에게 돌아가게 설계했다니!
만약에 무작위가 아닌 사 공자가 임의대로 임무를 분배했다면?
아마도 이렇게 수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뽑은 보따리와 연관된 임무이기에 현무각주나 조향각주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임무를 나누어 주니 어떤 불만도 튀어나올 수 없었다.
자신의 운으로 선택한 임무인데 어찌 반발할 수 있으랴!
가기군이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제게는 모두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주작각은 모든 걸 알아야 하니까요.”
“…….”
가기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빈은 지금 그가 맡고 있는 주작각의 위신까지 세워 주고 있었다.
잠시 한빈은 바라보던 가기군이 갑자기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사 공자.”
“별말씀을요.”
한빈이 손을 저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가기군은 자리에서 떠났다.
임무에 필요한 것은 속도.
구걸십팔보도 그냥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그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일각이 여삼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각주도 차례대로 행렬에서 멀어져 갔다.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말이다.
한편으로 그들의 표정은 경건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구경꾼처럼 조용히 상황을 바라보던 현문이 한빈의 옆에 쓱 다가왔다.
“흠, 다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 있네.”
“편안히 물어보시지요, 어르신.”
“저들이 이런 복장으로 경로를 따라 강호를 누빈다고 해도 적들이 주목할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주목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적들이 어찌 우리를 주시한다는 말인가? 그걸 피하기 위해 추룡 산맥을 거쳐 온 것이 아닌가? 팽 공자.”
현문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쏟아 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현문의 질문은 타당했다.
갑자기 강호의 이목을 끈다는 것은 현무각주와 주작각주 그리고 조향각주가 노력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강호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으로 변장한다고 하면 이목이야 끌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장기간을 바라보고 펼치는 작전이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곳에 있는 행렬이 무당까지 도착하기 전에 일어나야 할 일들이었다.
심각한 현문의 표정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까 전서구를 날리지 않았습니까?”
“전서구를 날리기는 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거기에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의 이동 경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게 왜 거기에…….”
“이목을 끌려면 그 정도 잡음 정도는 일으켜야지요.”
“그럼 세 명 각주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한 것이란 말인가?”
“정확히는 저희의 목숨도 포함해서입니다.”
“흠.”
“강호를 구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이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물론 한빈의 말은 반 정도만 진심이었다.
한빈의 마음속에는 강호를 구한다는 목적은 뒤의 일이었다.
강호의 평화보다는 뒤통수를 치려는 인간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강할 뿐이었다.
어차피 유림 서원에서 적의 정체는 이미 알았다.
그들의 이름은 백경.
아마도 그들은 무당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릴 것이 뻔했다.
무공으로 그들과 정면에서 부딪친다?
그것은 연무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계란을 허공으로 던지는 것과 같다.
청강석 바닥에 떨어진 계란이 무사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무당산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단과 그들의 목덜미에 꽂을 무기를 하나씩 마련해야 했다.
방어할 수단 중 하나는 이미 손에 넣었다.
삼황초가 바로 그 물건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자신의 목에 건 은빛 구슬을 매만졌다.
* * *
그날 저녁.
섬서와 호북을 가로지르는 물줄기인 창천강의 상류.
고개만 돌리면 절경이 펼쳐지기에,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 도교의 명승지라 불리며 구파일방의 기둥 중 하나인 무당산이 보인다.
거기에 제법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에, 어업으로도 꽤 유명한 곳이었다.
물론 상류는 물살이 제법 센 관계로 어부나 일반인 모두 기피하는 곳이었다.
그곳 상류에 하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세찬 물줄기에도 그 배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닻을 내린 것도 아니고 노도 젓지 않는 배가 물살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강 한가운데 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한 모습에 주변을 지나치는 어부들은 모두 시선을 한 번씩 줬다.
그곳도 잠시,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재빨리 노를 저어 그곳을 빠져나갔다.
물살이 하얀색 배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부들 사이에는 요즘 귀선(鬼船)이 보인다는 소문이 돌고는 했다.
죽은 사람은 귀신, 침몰한 배는 귀선이라 부른다.
귀선은 삼도천을 건너기에는 아직 사람 숫자가 부족해 나머지 사람을 태우기 위해 이승을 떠다니는 배였다.
물론 이건 어부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설이었다.
물살이 피해 가는 배가 귀선 말고 또 있을까?
어부들이 겁을 먹은 것은 당연했다.
한편 배 위에서는 멀어지는 어부의 모습을 보며 한 사내가 차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 사내의 옆으로 흰색 무복의 여인이 다가왔다.
그 여인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토끼 가면의 여인은 사내에게 서찰 하나를 건넸다.
“도착한 소식이에요.”
“수고했다.”
사내가 서찰을 뜯었다.
그러고는 서찰을 거꾸로 들고 흰색 탁자 위에 털었다.
툭. 툭.
봉투 안에는 수십 개의 작은 쪽지들이 흘러나왔다.
사내는 쪽지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쪽지를 살피던 사내는 무료한 듯 하품을 해 댔다.
“역시 별 소식이 없군. 무당의 일만 끝나면 당분간 할 일이 없겠어.”
“대의를 준비하셔야죠, 선주님.”
여인이 살짝 고개를 조아렸다.
사내는 여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가면은 벗지. 답답하게 여기서까지 쓰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돋보이죠.”
여인이 웃음 지었다.
가면 때문에 그 웃음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짓이 나타내는 동작들이 그녀가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이것은 한빈이 한번 맞닥뜨린 적 있는 백경이었다.
부족의 이름이면서 이 배의 이름이기도 했다.
사내는 이 배의 선주인 백이었다.
그리고 토끼 가면은 한빈과 검을 나눈 고수였다.
그녀의 이름은 초아.
초아가 토끼 가면을 안 벗는 이유는 그녀의 말대로 돋보이려 함이었다.
백경에 탄 이들은 모두가 선남선녀.
아무렇게나 한 명을 딱 집어서 불러내도 강호에서 눈에 띌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