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 확인 (4)
은침을 건네받은 한빈이 환자들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향로를 닫으면 저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은침 하나를 던졌다.
그 은침은 장자명의 어깨로 날아갔다.
푹.
장자명의 아혈을 풀어 준 것이다.
“팽 공자, 살려야 합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저 여인은 살려야 합니다. 살려 주시면 삼 년이 아니라 평생 공자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저분이 장 의원이 좋아하는 분 맞습니까?”
“마, 맞습니다. 내 목숨과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 의원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확률은 반반입니다. 하지만 장 의원이 저를 방해하면 확률은 더 낮아집니다.”
“…….”
장자명은 말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자신이 기도해야 할 대상이 한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팽 공자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자명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 표정을 본 심미호가 제압했던 점혈을 풀었다.
픽.
마혈이 풀렸지만, 장자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빈의 행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자명은 넋이 나간 듯 그저 치료를 이어 가는 한빈을 바라봤다.
사실 장자명은 억울했다.
저 선물을 주면서도 사매에게 고백을 못 했다.
백독문을 뛰쳐나오면서도 그녀에게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고백할 수 있을까?
사매에게 고백하기에는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다만, 한빈이 영웅으로 만들어 준다는 약속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사매가 죽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때였다.
한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휙!
한빈의 손에서 은침이 나아갔다.
하나의 은침이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뻗어 나갔다.
비슷한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푹. 푹.
은침이 살에 꽂히는 소리였다.
한빈은 잠시 그들을 바라봤다.
매의 눈으로 그들을 살핀 한빈이 손을 내밀었다.
설화가 다시 은침을 한빈에게 건넸다.
다시 한빈이 손을 뻗었다.
푹! 푹!
한빈의 은침은 원하는 곳에 정확히 박혔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수법이 아닌 용린검법 중 백발백중의 수법을 쓰고 있었다.
공력을 이렇게 소모하는 이유는 지금의 은침 하나하나가 그들의 목숨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침을 쏘아 낸 한빈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옷자락을 털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후의 변화를 바라봤다.
그들을 확인한 한빈이 천천히 걸어갔다.
한빈의 손에는 백색 호리병이 들려 있었다.
천천히 가부좌를 튼 이들에게 다가간 한빈은 은침을 뽑아 백색 호리병 속에 넣었다.
한빈은 제자리로 돌아와 장자명에게 눈짓했다.
“이제 상태를 살펴봐도 좋습니다, 장 의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팽 공자?”
“혈고는 모두 제거했습니다.”
“대체 언제 제거를…….”
장자명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호리병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 호리병 안에는 흉물스러운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머리와도 같았다.
장자명도 혈고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건 아마도 기혈고라는 혈고일 겁니다. 사람을 가사 상태로 만드는 효과가 있죠. 주로 포로에게 사용하는 혈고입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팽 공자.”
“그건…….”
“비밀이겠지요.”
“비밀은 아닙니다. 서책에서 봤습니다.”
한빈이 웃었다.
물론 반은 거짓말이었다.
일반적인 서책은 아니었다.
전생에 겪었던 마교와의 전쟁은 혈고뿐 아니라 수만 가지의 독도 동원되었다.
귀검대의 대주로서 한빈은 모든 수법을 다 알고 있어야 했다.
적의 수법을 알고 때로는 이용하기도 했다.
전생에도 한빈은 혈고의 사용법과 제거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살폈다.
가부좌를 튼 이들의 혈색이 돌아왔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장자명은 오로지 그의 사매만 챙기고 있었다.
얼마 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력을 찾으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이곳은 백독문의 독진 속이었다.
해가 지면 한빈과 청화는 괜찮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위험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본 한빈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용린검법의 초식 중 하나를 떠올렸다.
‘기사회생!’
본래 상태의 구 할까지 회복시키는 수법이었다.
문제는 환자가 여섯 명이라는 점이었다.
한빈은 정확히 육 등분을 해서 그들에게 펼쳤다.
계산상으로는 대략 칠분의 일 정도는 기력을 회복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한빈이 기사회생을 펼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혈고가 남아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기사회생의 효과가 혈고에 영향을 미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빈의 기사회생 덕분에 여기저기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긴장에서 깬 것처럼 그들은 멍하니 한빈 일행을 바라봤다.
얼굴에 도는 핏기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기사회생의 효과는 더 좋았다.
얼굴만 보면 기력의 반 정도를 회복한 것 같았다.
그들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사형이에요?”
장자명이 사매라고 했던 여인이었다.
장자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야.”
“다 들었어요.”
“듣다니……?”
“꿈속에서 사형 목소리를 들었어요. 저를 꼭 살려 달라고…….”
그녀의 말에 장자명의 표정이 굳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고백을 사매가 들은 것이다.
옆을 보니 한빈이 웃고 있었다.
순간 장자명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장자명은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팽 공자, 진짜 치료에 성공할 확률이 오 할이었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십 할이었습니다. 물론 누군가 방해했다면 확률은 내려갔겠지요.”
“흠.”
장자명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심을 외치도록 한빈이 유도한 것 같았다.
그때 장자명의 사매가 말했다.
“사형은 제 영웅이에요. 그리고 제 사제들에게도요.”
기력이 돌아왔는지 이번에는 제법 목소리가 컸다.
덕분에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 *
한 시진 후.
한빈 일행은 독진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장자명은 계속해서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자명의 사매와 다른 제자들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백독문의 옷이 아닌 적혈맹호대의 복장을 한 채로 말이다.
아직 혼자 걷기에는 힘에 부치기에, 그들은 적혈맹호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장자명의 사매는 특별히 설화가 부축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특별 대우였다.
설화에게 사매를 맡긴다면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가장 빠른 것이 한빈이었고 그다음이 설화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먼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설화였다.
장자명은 이런 배려가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저들에게 변복을 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빨리 백독문으로 복귀해서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한빈은 저들을 적혈맹호대 대원으로 변복시켰다.
복장뿐이 아니라 제법 공을 들여 변장을 시켰다.
본래 외모가 돌아온다고 해도 저들을 알아볼 사람이 없을 터였다.
장자명이 봤을 때는 완벽한 변장이었다.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숨기겠다는 의도였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장자명은 묻지 않았다.
한빈이 말해 주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한 것은 사매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백독지회에 쓸 물건을 구하기 위해 백독문을 나서다가 변고를 당했다고 했다.
적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혈도를 제압한 후 혈고를 심고 나서 이상한 공간에 가둔 것이다.
그것도 여섯 명이 한꺼번에 당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장자명은 사매가 걱정되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한빈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눈 빠지겠습니다, 장 의원.”
“아, 아닙니다.”
“계약서는 안 써도 되겠지요?”
“계약서라니요?”
“아까 장 의원이 제게 약속한 거 말입니다.”
“……아.”
“약속은 약속이니 지키시겠지요?”
“그럼요. 저는 거짓말은 안 합니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합니다.”
“명예를 건다니 조금 의심스러운데요.”
한빈이 웃자 장자명이 재빨리 답했다.
“사매를 걸 수도 있습니다.”
“하하.”
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장자명이 약속을 지킬 것을 한빈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한 말을 한빈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
때가 되면 보내야 하는 것이 이치였다.
마치 자식을 출가시키듯 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백독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담장이 보일 때였다.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자들이 백독문의 정문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부는 모닥불까지 피워 놓은 것으로 봐서 이곳에서 노숙한 것이 분명했다.
장자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독진을 벗어났지만, 담장 밖은 위험한 것이 바로 이곳 백독곡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진을 치고 있다고?
대충 상황을 보니 백독지회에 참가한 독인들이 분명했다.
그들을 본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휘적휘적 걷던 한빈이 장자명을 바라봤다.
“저들 중 아는 자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저곳에 있는 줄무늬 세 개의 무복은 삼독문의 독인입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적색 무복은 적혈문, 사파가 아니라 독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장자명은 쉬지 않고 그들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중원의 독인들은 다 모인 게 아닙니까? 그럼 누가 백독지회에 참석한 것이죠?”
“그건…….”
장자명은 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백독지회에 참석할 만한 독문을 모두 읊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손님을 내팽개친 채 문을 걸어 잠갔다는 뜻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장자명은 예전에 문주를 도와 백독지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런 예는 없었다.
아무래도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 * *
한빈 일행은 독인들의 앞에 섰다.
독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빈 일행을 경계했다.
그들의 일부와 안면이 있는 장자명은 재빨리 한빈 일행을 소개했다.
“여긴 하북팽가의 대공자님입니다. 그리고 저기는 무당파의…….”
장자명의 소개에 포권지례를 나눴지만, 독인들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인들은 정파보다는 사파에 가까웠다.
수많은 독문 중 사천당가만이 정파에서 자리를 잡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사파에 가까웠다.
여기에서 사파에 가깝다는 표현을 쓴 것은 정확히는 사파에 속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정파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독이란 은밀하고 비겁한 수단이라는 것이 정파인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한창 소개를 하던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한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