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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08화 (594/621)

608. 비몽사몽(非夢似夢) (3)

한빈의 눈앞으로 글귀가 계속 이어졌다.

[천급 구결 기(器)를 획득하셨습니다.]

[……]

[천급 – 대(大), 만(晩), 기(器)]

[알 수 없는 구결 : 사(四)]

전에 모았던 구결인 비몽사몽을 완성하는 데 썼다.

이제 남은 것은 대(大), 만(晩), 기(器)의 세 글자였다.

역시 한빈의 예상은 맞았다.

혈후의 피로 만든 그물을 뚫기 위해서는 자신의 피가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뚫지는 못했지만, 구결은 취할 수 있었다.

한빈이 미소 짓고 있을 때, 몸이 다시 움직였다.

손을 든 한빈이 월아를 곧게 뻗었다.

‘일촉즉발!’

혈후를 향해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한빈의 모습은 신검합일(身劍合一), 그 자체였다.

물론 지금 펼친 일촉즉발은 한빈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동작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심화편을 확인했다.

한빈은 속으로 한숨을 삭여야 했다.

계속해서 심화편의 구결이 줄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력은 물론이요, 체력을 나타내는 구결과 속도를 나타내는 구결 모두 쉬지 않고 줄고 있었다.

[속(速) : 육십사(六十四)]

[……]

[속(速) : 오십칠(五十七)]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용린검은 한빈의 피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혈후와의 격돌로 인한 손상은 한빈의 피로 메꿔야 했다.

줄어드는 것은 구결뿐 아니라 피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도중에도 한빈은 월아 그리고 용린검과 하나가 되어 갈대숲을 헤치고 날아갔다.

순간 한빈은 아래쪽의 구덩이를 볼 수 있었다.

어떤 구덩이인지 한빈은 잘 알고 있었다.

백경의 무사들을 묻어 놓은 구덩이였다.

혈후와의 격돌 때문인지 덮어 놓은 흙이 모두 날아간 상태였다.

덕분에 구덩이 속에 상체가 드러난 무사 몇몇이 보였다.

이건 한빈이 원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빈은 나중에 얻어야 할 것이 있어서 저들을 숨겨 놨었다.

한빈은 그중 초아라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직까지 그들은 적이었다.

적에게 느낄 측은지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초아에게 멀어진 한빈의 시야에 혈후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혈후와 한빈이 얽혔다.

챙.

소리는 한 번이었지만, 한빈은 혈후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합을 주고받았다.

한빈의 옆구리에서 살짝 피가 스며 나왔다.

하지만 한빈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표정의 변화 없는 석상같이 보이기도 했다.

챙!

갈대숲에서 울리는 소리와 비례해서 한빈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났다.

그 상처에도 한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사냥개처럼 혈후를 노렸다.

챙!

다시 울려 퍼지는 굉음.

* * *

머리 위로 날아가는 한빈을 본 백경의 초아는 입을 벌렸다.

순간 초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입을 벌린 행동에 대해서 놀란 것이다.

방금 구덩이를 덮었던 흙이 날아가면서 상체가 드러난 상황.

거기에 더해 한빈과 혈후가 만들어 낸 가공할 기파 덕분에 초아의 혈맥은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점혈이 풀린 것이다.

초아는 재빨리 상태를 살폈다.

그녀를 덮고 있던 흙이 흩어져 있었다.

덕분에 초아는 상체를 움직일 수 있었다.

초아는 바로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몸을 최대한 낮춘 다음 한빈과 혈후의 대결을 지켜봤다.

팡! 팡!

귀청을 울리는 파공성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초아는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대결을 예측할 수 있었다.

초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까마득하게 잊고는 그들의 대결을 바라봤다.

혈후가 어떤 인물이던가?

백경의 선주 중 한 명이며, 초아가 모시는 백과 대등한 무공을 가진 인물이었다.

즉, 반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저 젊은 사내가 대등하게 싸운다고?

초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혈후의 혈잠을 파훼하는 이상한 수법은 무엇인가?

저것은 반선들이 쓰는 무공과 흡사했다.

고민도 잠시, 초아가 어깨를 떨었다.

초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수하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배를 땅에 바싹 붙인 상태에서 수하들이 묻힌 구덩이로 다가갔다.

초아는 숨도 쉬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다른 구덩이 안을 바라봤다.

다른 구덩이도 덮였던 흙이 다 날아간 덕분에 수하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초아와 상황이 달랐다.

초아의 수하들은 옴짝달싹 못 한 채 입에 갈대를 물고 있었다.

초아와는 달리 아직도 점혈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초아는 재빨리 해혈을 위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점혈을 푸는 데 성공한 초아는 수하들을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재빨리 수하들을 이끌고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조용히 두 고수의 대결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수하 중 하나인 자청이 초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초아의 소매를 잡아끄는 자청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초아는 그 떨림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일단 여기서 후퇴해서, 선주님께 보고드리는 게…….”

“우리에게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번 임무에 실패하면 우리는 백경에서 내려야 해.”

“…….”

“너 자신만을 위해서 기를 쓰고 백경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게 아니잖아.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해서 백경에 오른 게 아니었어? 네가 돌아가면 가족이 무사할까?”

“설마…….”

자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른 동료를 바라봤다.

모두가 초아와 같은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청은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모두가 처한 상황이 비슷한 것이 분명했다.

가족과 마을의 생존을 담보로 백경에 몸을 담은 것이다.

말하자면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백경의 무사들을 움직이는 동기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약점이다.

자청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려고요?”

“용과 호랑이가 싸우다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지.”

“아!”

자청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 탄성은 이내 멈췄다.

어디선가 가공할 기세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중심에는 혈후가 있었다.

* * *

혈후는 결심한 듯 손을 저었다.

순간 그녀가 만들어 낸 혈선이 흩어졌다.

마치 따사로운 햇살에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자연스러웠다.

흩어진 혈선은 혈후의 앞에 맴돌았다.

혈후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한번 그었다.

다시 손바닥에서 피가 나온다.

그 피가 그녀의 앞에서 맴돌던 혈선과 합쳐졌다.

혈선이 모이자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채찍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혈후는 그 채찍을 들었다.

혈수신공의 네 번째 초식인 혈편선수(血鞭仙手)였다.

혈후의 독문 무공인 혈수신공은 총 다섯 개의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초식마다 병기가 달라지며 위력이 증가한다.

네 번째 초식부터는 초식의 명칭에 마(魔)란 단어 대신에 선(仙)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이는 네 번째 초식부터는 신선의 무공에 가깝기 때문이다.

혈편을 만들어 낸 혈후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혈후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수마에서 깨어난 것이냐?”

“…….”

여전히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빈은 아직 혈후가 이끈 꿈속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한빈은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만약 한빈이 깨어 있었다면, 쉬지 않고 입을 놀렸을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뒤흔들기 위해서 말이다.

한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용린검법의 초식이지만, 비장의 한 수는 상대의 감정을 흔드는 격장지계였다.

그런데 지금은 격장지계를 쓸 수 없었다.

입을 굳게 다문 혈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상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격돌부터 입이 앞서던 상대였다.

과묵한 모습에 경계심이 저절로 들었다.

고민하던 혈후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상대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혈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딱 하나였다.

모순!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뭐든지 뚫을 수 있는 창.

혈잠은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이자 그물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검은 그 방패를 무마시켰다.

정확히는 그물을 뚫고 오지는 못했다.

그물을 반쯤 뚫고 오더니 멈췄다.

그녀의 혈잠과 상대의 붉은 검이 얽혔다.

이걸 뚫렸다고 봐야 할까?

막았다고 봐야 할까?

그래서 모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이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은 한 수였다.

마치 상대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듯했다.

수마에 들지도 않고 마음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그것은 망자(亡子)밖에 없었다.

그도 아니라면 신선이라고 봐야 했다.

혈후는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순간 혈후의 눈이 커졌다.

한빈의 눈에는 생기라는 것이 없었다.

마치 아직도 잠에 취한 듯 보였다.

물론 이것은 혈후의 착각이었다.

지금 한빈은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비몽사몽의 영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혈후는 혈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상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한빈이었다.

한빈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용린검법에 무작정 몸을 맡기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적의 수법이 혈잠마수라는 초식 하나일 리만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은 새로운 초식을 꺼내 들었다.

상대가 쥐고 있는 채찍이 병기이자 그녀가 준비한 상승 무공이라는 것은 한빈도 알고 있었다.

상대가 밑천을 다 드러낸 것일까?

한빈은 아직도 상대가 삼 푼이 아닌 삼 할 정도의 밑천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비몽사몽을 중단시키고 의지대로 이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게 정답이었다.

초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본신의 내공과 구결을 소모하는 것이다.

한빈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귀청을 찢는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창!

순간 한빈의 어깨에서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어깨뿐 아니라 허벅지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혈후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한빈은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

흔히 말해서 한 대 치고 두 대를 맞는 싸움과도 같았다.

흡사 동네 꼬마들의 막싸움같이 보일 수도 있었다.

동시에 회복을 나타내는 심화편의 구결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그러지 않아도 바닥을 향해 달려가는 구결이었다.

[복(復) : 오십일(五十一)]

[……]

[복(復) : 삼십오(五十五)]

이제 얼마 안 가면 회복에 특화된 구결도 바닥을 드러낼 참이었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에 계획을 떠올렸다.

과연 설화는 한빈의 계획을 잘 전달했을까?

* * *

백독문의 대문 앞.

백독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모인 독인들은 패잔병처럼 모여 있었다.

혈독에 당한 그들은 아직 몸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독인들은 눈빛이 살짝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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