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눈치 싸움 (5)
장자명의 사매가 독문의 문주인 백주천을 향해서 뛰고 있었다.
장자명은 그녀가 언제 깨어났는지 몰랐다.
그의 손을 벗어나 달려가는 모습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사매가 백주천에게 달려가는 것은 본능이었다.
그의 사매는 백주천의 금지옥엽인 백리연이었다.
아비에게 달려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상황은 정체를 숨기라는 한빈의 지시와는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사매를 잡기에는 이미 멀리 떨어진 상태.
장자명이 아차 싶을 때였다.
백주천을 향해서 달려가던 사매가 휘청였다.
발이 꼬인 듯 앞으로 꼬꾸라진 장자명의 사매, 백리연.
근처에 있던 설화가 그녀를 부축했다.
백리연이 고개를 늘어뜨리는 것이 누가 봐도 혼절한 모습.
이를 지켜보던 백주천이 미간을 좁혔다.
“우리 때문에 불편함을 겪으시는 것 같구려. 죄송하오. 하지만 모든 것이 여러분과 백독문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배려라 생각해 주시오.”
“괜찮습니다, 문주님.”
한빈이 재빨리 답하자 백주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둘.
눈빛을 교환하는 것인지 기세 싸움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이들은 두 번째 경우라고 판단했다.
실신한 백리연을 부축한 설화가 장자명에게 다가갔다.
“진맥을 부탁드려요, 장 의원 아저씨.”
“그래, 알았다.”
장자명이 장단을 맞췄다. 그는 조용히 설화와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매의 완맥을 잡아 보니 누군가 점혈한 것이 분명했다.
먼저 마혈을 제입한 것은 한빈일 것이다.
그리고 설화가 부축하는 척하며 혼혈을 제압해서 사매를 기절시킨 것.
장자명은 그 둘이 원망스러웠다.
가면 갈수록 악화되는 사태.
지금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사매의 정체를 밝히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빈이 자꾸 그 길을 막는 것이다.
그때였다.
백주천이 조용히 장자명을 바라봤다.
“몰래 집을 나갔다 오더니 많이 야위었구나.”
“…….”
“잠시 이리 와 보거라.”
백주천이 손짓하자 장자명이 사매를 침상에 눕히고 달려갔다.
문주의 앞에 선 장자명이 비 맞은 생쥐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백주천이 다시 물었다.
“왜 돌아왔느냐?”
“……사문이 걱정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이제 머물 것이냐?”
“…….”
장자명은 대답 대신에 한빈을 바라봤다.
자신이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듯한 그의 표정에 백주천이 다시 물었다.
“이제는 자신의 길조차 판단을 못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당분간은 여기 있는 팽 공자와 함께할 것입니다. 다만, 지나가는 길에 사문이 걱정되어서 와 봤습니다.”
“오호, 그럼 잘 머물다 가거라.”
백주천의 말에 장자명의 눈이 커졌다.
사부의 대답이 너무도 간결했다.
질문도 꾸짖음도 없이 모든 것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가슴 한쪽이 살짝 아려 왔다.
백주천이 뭔가 생각난 듯 눈을 장자명에게 다가왔다.
“자명아!”
“네, 사부님.”
“이곳까지 오면서 이상한 소문을 못 들었더냐?”
“이상한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약재를 찾기 위해 조위현까지 갔던 리연이가 지금 돌아왔다.”
“다행이군요.”
“안타깝게도 약재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중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더구나.”
“무슨 이야기입니까?”
“약재상에 들러서 필요한 물품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그곳의 주인이 왜 다시 왔냐고 물었다고 하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얼굴이 똑같은 여인이 하루 전 그 약재상을 들렀다더구나.”
“얼굴이 똑같다면…….”
“아마도 가짜가 있는 듯하다.”
“사매로 변장한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보고에 따르면 그게 확실한 것 같구나. 물론 돌아온 리연이의 상태는 내가 확인했다. 그런데 진짜가 맞더구나. 그렇다면 새로 등장할 아이는 가짜인 게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곳에 오는 길에 백독문의 제자가 다른 곳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나 해서 물어보는 게다.”
“저는 못 들었습니다. 마을 쪽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 추룡산맥을 넘어왔으니까요.”
“그래, 알았으니 그만 쉬거라.”
백주천이 돌아서자 장자명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던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매였다.
순간 귀빈실의 문이 닫혔다.
쾅!
문짝이 두껍기에 소음도 꽤 컸다.
누군가 자신이 소매를 잡아끌자 장자명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 의원.”
“패, 팽 공자. 어떻게 제가 걱정을 안 합니까?”
“일단 고비는 넘기지 않았습니까?”
“고비라니요?”
“아, 장 의원의 사매가 백주천 문주와 맞닥뜨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흠.”
장자명이 침음을 삼켰다.
침상에 누워 있는 사매는 가짜라고 오해를 받았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던 장자명이 한빈을 쏘아봤다.
불만이 가득한 눈빛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장 의원은 그리되면 진짜 사매가 누군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그럼 아마도 둘 중 하나는 죽을 겁니다.”
“네?”
“둘 중 하나는 가짜니까요.”
“헉.”
“지금 상황에 있어 최고의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게 뭔지요?”
“눈치를 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이곳에서 말입니까? 대공자께는 말씀드렸지만, 이곳은 무쇠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입니다.”
“무쇠 벽으로 둘러싸였으니 최고로 안전한 곳이기도 하겠지요.”
“헉.”
장자명이 입을 벌렸다.
한빈의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정확히는 한빈의 말이 맞았다.
만약에 지반이 무너져 백독곡이 잠긴다 해도 딱 두 곳은 멀쩡한 것이다.
한 곳은 문주의 개인 연공실이요, 다른 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전각이었다.
하지만 전각 속 이 귀빈실은 철판으로 된 상자라고 보면 된다.
바닥에도 철판을 깔아 놓은 관계로, 땅속에 묻혀도 멀쩡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명을 지르던 장자명이 말했다.
“팽 공자, 혹시 백독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이상한 일이라면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 팽 공자가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도망칠 수는 없어도 수성하기에는 적격이니까요.”
“백독문에 큰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뭐, 큰일이라면 벌써 벌어졌죠.”
“수성이라……. 식량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챙겨 오지 않았습니까?”
한빈이 적혈맹호대 쪽을 바라봤다.
심미호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심미호의 옆에는 관이 하나 있었고 다른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옆에도 제법 큼직한 봇짐이 놓여 있었다.
마치 이곳에 갇힐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직은 챙겨 온 식량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백독문의 제자들이 때가 되면 식사를 귀빈실에 넣어 주었다.
한빈과 적혈맹호대는 아무렇지 않게 그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그 식사를 받았을 때 가장 불안해하는 이는 장자명이었다.
백독문에서 독이라도 쓰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한빈은 그때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장자명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곳 귀빈실에서 보낸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가 들어왔다.
장자명이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었다.
조심하라고 말해 봤자 한빈이 또 면박을 줄 테니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먹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막 첫술을 뜨려 할 때였다.
탁!
장자명의 손에서 젓가락이 사라졌다.
힐끔 옆을 보니 한빈이 그의 젓가락을 들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장 의원,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 공자.”
“이곳이 어디입니까? 천하의 백독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독을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그렇게 막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팽 공자가…….”
“그건 어제까지의 일이지요. 오늘부터는 다릅니다.”
“아니, 오늘이 뭐가 다릅니까?”
“오늘 밥에는 독이 들어 있으니까요.”
“네? 여기에 독이?”
장자명이 재빨리 식사를 반대편으로 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자급자족입니다.”
“자급자족이라니…….”
딱.
한빈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장자명의 말을 끊었다.
동시에 적혈맹호대가 바쁘게 움직인다.
귀빈실 바닥에 화로를 설치하는 모습은 마치 노숙을 준비하는 광경과 같았다.
조호가 한빈의 앞으로 달려왔다.
“주군,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땔감을 안 가져왔네요. 땔감이 없는 곳에서 노숙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제 책임입니다.”
조호가 작게 고개 숙이자 한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호야.”
“네, 주군.”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냥 뜯어.”
“뜯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방이 나무 천지인데, 뭘 걱정을 해.”
한빈이 주변을 가리켰다.
지금 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벽과 바닥이었다.
한빈의 말대로 발상을 바꾸니 온 방 안에 땔감이 쌓여 있었다.
장삼과 조호가 아무렇지 않게 바닥부터 뜯기 시작했다.
쩌억.
바닥에서 나무조각이 뜯겨 나오자 장자명의 말대로 철판이 드러났다.
쩌억.
여기저기서 울리는 소리에 장자명이 당황했다.
남의 전각을 아무렇지 않게 뜯어서 땔감을 조달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들 말고 또 있을까?
이들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한빈이었다.
하지만 한빈에게 직접 따질 수는 없었다.
장자명이 조호를 향해 외쳤다.
“아니, 왜 바닥을 뜯어?”
“불도 안 지피고 노숙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하다는 대답에 장자명이 고개를 돌려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자, 잠시만요. 팽 공자.”
“왜 그러시죠? 장 의원.”
“이 귀빈실을 뜯겠다고요?”
“중독되는 것보다는 좋은 선택 아닐까요?”
“험, 대체 밥에 들었다는 독이 무슨 독이기에 그럽니까? 저도 그렇고 여기 있는 대부분이 웬만한 독에는 끄떡없지 않습니까?”
“맹충(盲蟲)입니다.”
“맹충이라니요? 혹시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장자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확합니다. 내 코는 못 속이니까요.”
한빈이 씩 웃으며 자신의 식사를 밀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한빈은 전생에 맹충과 지긋지긋하게 마주했다.
맹충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곤충이었다.
좁쌀의 백분의 일 크기에, 밥 속에 섞어 넣으면 쌀가루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밖에 꺼내 놔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맹충을 입 속에 넣으면 식도에서 알이 부화한다.
알에서 부화한 맹충은 영양분을 찾아다닌다.
맹충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은 바로 사람의 눈이었다.
눈을 좀먹는 벌레라고 해서 맹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강호인들이 그리 경계를 안 하는 이유는, 맹충은 남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벌레였기 때문이다.
남만을 벗어나면 기후 때문에 하루를 못 견디고 말라비틀어진다.
남만 사람들은 맹충에 면역력이 있는 상태였기에, 맹충으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만이나 중원 모두 맹충 때문에 해를 입는 상황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맹충을 중원에서 사용하려면 특별한 약물을 넣은 관에 보관해야 했다.
일주일마다 새로운 약물을 넣어 줘야 하기에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그냥 독을 쓰면 되지, 돈과 노력을 들여서 맹충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맹충은 강호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물론 모두가 안심하고 있기에 맹충을 쓴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현실.
덕분에 전생에 겪었던 마교와의 전쟁에서는 자주 등장했었다.
원래 전쟁이 나면 무기를 파는 대장간이 떼돈을 버는 법.
그때 떼돈을 번 것이 바로 남만야수궁이었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장 의원.”
“백독문에서는 맹충을 다루지 않습니다.”
장자명이 황당한 듯 한빈을 바라봤다.
“제가 언제 백독문에서 독을 풀었다고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