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620화 (606/621)

620. 진위(眞僞) (5)

아성도 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아니었다.

혈후의 제자답게 독뿐 아니라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아성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중독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나는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성도 한빈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밖에서 수하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이제는 숨겨 둔 패를 보여 줄 때가 된 것이다.

아성이 표정을 수습하고 막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 너와…….”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손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성이 미간을 좁히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하려는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고수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지.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날붙이 좀 치우지그래!”

“허…….”

아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성이 슬쩍 눈짓하자 원숭이 가면 무사들이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진짜와 가짜, 그리고 적군과 아군은 가렸으니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가도록 하지.”

“협상이라…….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자네라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안 하는데……. 보시다시피 나는 빈손이거든.”

한빈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 모습에 아성이 웃었다.

“하하. 이곳은 지금 들어올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는 상태지. 거기에 사방은 강철로 둘러싸여 있고 말이네. 누가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나?”

“다 같이 갇힌 거 아니었어? 친구.”

“밖에는 내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네. 문이 열리지 않으면 자네들은 이곳에서 영영 못 나갈 것이야. 어서 해약을 내놓고 내가 말한 조건을 이행하는 것이 어떤가?”

“문이 안 열리면 못 나가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친구?”

“과연 그럴까? 만약에 밖에서 불을 지피게 된다면?”

“아마도 뚜껑을 닫아 놓은 무쇠솥이 되겠지.”

“잘 아는군. 그럼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 비교적 무공이 약한 독인? 아니면 우리?”

“내가 왜 독인들까지 신경 써야 하지?”

“…….”

“내 수하와 나만 살아남으면 돼. 그러고 보니 저기 자리를 옮긴 백독문의 제자 같은 경우도 화공에는 버티지 못하겠군.”

한빈이 가리킨 것은 백독문을 배신한 조기명이었다.

대화를 듣던 조기명이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야.”

“우리 조직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인가? 그건 말해 줄 수가 없군.”

“조직에 대한 얘기가 아니야. 이건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 너는 혈후와 무슨 사이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별 뜻은 없어. 그냥 물어본 거야.”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것이구나.”

“표정을 보니 내가 괜히 물어본 것 같군.”

“네놈은 대체…….”

말끝을 흐린 아성은 가슴을 만지면서 미간을 좁혔다.

대화를 이어 나가던 한빈은 뒷짐 진 손으로 손짓했다.

신호를 받은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백주천이었다.

사실 백주천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실눈을 뜨고 있었다.

그 신호는 삼독문의 문도희, 적혈문으로 계속 이어졌다.

독문의 수장들이 살짝 눈을 뜨고 신호를 교환하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백주천, 문도희, 적혈문주 등 백주천이 믿을 만한 수장들은 눈이 멀쩡했다.

모든 것이 하북팽가 사 공자인 한빈의 덕분이었다.

백주천은 본능적으로 당시 한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가 처음 놀란 것은 연공실로 찾아왔을 때의 모습 때문이었다.

혈투로 인해 무복은 넝마가 되었으며 한눈에 봐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시선은 환자를 향해 있었다.

그는 환자를 치료한 후 백주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러고는 약초까지 건네줬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마치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것 같았다.

그는 해약이 될 만한 모든 약초를 챙겨 왔다.

덕분에 눈이 머는 횡액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당시 한빈은 묘책 하나를 제안했다.

그 계획의 중심은 적을 속이는 것이었다.

적을 속여 적을 난공불락의 요새에 가까운 백독전으로 몰아넣고 나면 반 정도는 성공이었다.

백독전의 장치는 백독문의 문주만이 아는 기관 장치와, 제자까지 아는 기관 장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곳으로 유인하기까지 모두는 맹인이 된 척해야 했다.

이를 알고 있던 것은 독문들의 수뇌부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마저 속였다.

그 결과 제자 중에는 실제로 맹충에 해를 당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백주천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미리 계책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하북팽가 일행이 이곳에 들어오며 바리바리 싸서 온 약초 중 환안초가 있었다.

이 환안초는 맹충의 해독제로 쓰인다.

남만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약재로, 환안초는 현재 백독문에는 없었다.

백주천이 의문을 떠올리는 중에도 독인들은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은밀하게 신호를 교환하고 있을 때 한빈이 아성을 바라봤다.

“일단 아까 말했던 협상을 시작하지.”

“갑자기 협상이라니…….”

“일단 수하들을 뒤로 물리고 너와 나, 둘이서만 협상을 진행해 보자고.”

“…….”

“못 믿겠나? 협상에 임하는 대가는 해약.”

“해약이라고?”

“그래, 협상에 임하는 것만으로도 이 해약을 주지.”

말을 마친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주변에는 적혈맹호대가 기세를 피워 내며 호위하고 있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손뼉을 쳤다.

짝.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힐끔 돌아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다들 물러나라. 가능한 한 내게 멀리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주군.”

심미호의 구릿빛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한빈이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잠시 협상을 할 것이니, 다들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거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한빈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심미호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대원들에게 외쳤다.

“주군의 명대로 모두 뒤로 물러난다!”

그 목소리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방아깨비처럼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획. 획.

눈 깜짝할 사이에 적혈맹호대는 끝으로 물러났다.

적혈맹호대뿐이 아니었다.

독문의 수장들도 제자들을 모두 물렸다.

제자들은 수장들에게 이끌려 모두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한빈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뒤쪽에서 물러나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보던 백주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은 진짜로 계획을 실행할 것처럼 보였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말한 계획 중 하나가 바로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위치였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서 있는 위치는 적진에 가까웠다.

백독전을 십 등분 한다면 한빈이 서 있는 곳은 십 분의 팔 정도 되는 곳이었다.

기관이 발동할 곳은 정확히 백독전의 중앙.

그곳에서 기관을 발동시키게 되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꼼짝없이 적과 함께 갇히게 된다.

이건 한마디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자신을 희생시켜서 모두를 구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분명했다.

“생불…….”

백주천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자신을 희생시켜서 만인을 구할 수 있는 자가 강호에 얼마나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강호를 구하겠다고 말하는 정파인들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의로운 행동을 하는 자는 드물었다.

주변의 제자 하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백주천을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주천은 계속해서 한빈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변 상황을 본 아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한빈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이라고 느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백독문의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보니, 똥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그중 백독문의 문주인 백주천은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보면 이번 대결은 끝이 났다.

아성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너희도 물러나거라!”

아성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원숭이 가면 무사들에게 외쳤다.

그의 지시에 원숭이 가면 무사들이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한빈은 아성과 두 걸음 정도를 두고 서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성을 보지 않았다.

한빈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뱀과 코뿔소, 거미 등 맹독을 품은 생물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을 확인한 한빈은 손에 든 가죽 주머니를 힘껏 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진 것 같지만, 백발백중의 효용이 담겨 있었다.

가죽 주머니는 원숭이 가면을 쓴 무사들과 아성의 사이로 떨어졌다.

아성이 다급하게 뛰자 원숭이 무사들도 뒷걸음치며 가죽 주머니를 잡기 위해 물러섰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구걸십팔보!’

평범한 구설십팔보가 아닌 극성의 구걸십팔보였다.

벌써부터 속(速)의 구결이 눈에 보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광석화.’

준비된 한빈이 진각을 밟았다.

빠각.

한빈이 밟은 것은 거미 모양이 새겨진 청강석.

청각석이 얼음 깨지듯 조각났다.

순간 백독전의 중앙에 있는 바닥에서 수백 가닥의 쇠꼬챙이가 올라왔다.

슝!

쇠꼬챙이는 바닥뿐 아니라 벽면에서도 튀어나왔다.

슝!

천장에서도 내려왔다.

슝!

수백 가닥의 쇠꼬챙이는 반대편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꼬챙이들이 위에서 청강석 바닥으로.

바닥에서 천장으로.

옆에서 반대쪽 벽으로 박혔다.

푹! 푹!

그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푹! 푹!

쇠꼬챙이가 가로와 세로로 이어졌다.

졸지에 백독전이 반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 모습에 백주천이 입을 벌렸다.

모든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말한 그대로였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적을 고립시키겠다고 하며 백주천에게 백독전의 기관 장치에 대해서 물어봤다.

한빈에게 가르쳐 준 기관 장치는 모두 아홉 개.

그중 거미를 누르면 백독전은 반으로 나뉘게 된다.

문제는 적진 깊은 곳에서 그 기관 장치를 발동시켰다는 것이다.

기관 장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백독전을 반으로 나누었다.

화경의 고수가 와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백주천은 한숨을 쉬었다.

“허, 팽 소협이 갇혔으니, 이 일을…….”

“문주 할아버지는 왜 그러세요?”

낯선 음성에 백주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설화라고 소개한 아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백주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팽 소협이 저곳에 갇혔는데 너는 걱정도 안 되는 게냐?”

“공자님은 여기 계시는데요.”

설화가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고개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백주천은 눈을 크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었다.

“사, 사부님, 지금 눈을 뜨신 겁니까?”

순간 백주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흥분해서 맹인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까먹었던 것이다.

백주천은 힐금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제는 연기를 안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백주천이 제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 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것이 팽 소협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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