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하수연: 노출 수위는 협의 불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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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하수연입니다.”
“감독 강산입니다.”
강산은 하수연을 탐엔탐스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탐엔탐스는 일전에 TY필름 고용철 이사를 만났던 곳이다.
강산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하수연과 가볍게 악수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면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강산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하수연 배우는 몇 작품이나 했나요?”
“개봉된 영화는 두 작품, 독립영화는 다섯 작품정도 입니다. 연극은 세 작품정도 되고요.”
“<세 번의 사랑>은 다 읽어 보았어요?”
“네. 감독님”
“소연은 인생경험이 많은 역할인데 ‘소연’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으음... 그런데 하수연씨, 제 영화 알고 지원한 거 맞으신가요?”
“네?”
“노출수위는 협의 불가하다는 말이에요.”
강산은 선글라스 안에서 하수연의 얼굴과 손을 차례로 보았다.
하수연은 강산의 말을 듣고 움찔 했지만, 얼굴 표정은 태연했다. 대신 두 손을 꼭 쥐어야 했다.
“알고 있습니다.”
“계약서에는 쓰지 않겠지만 노출 수위는 최고 수준이에요. 단단히 각오 하셔야 하는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강산은 하수연에게 냉정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제작사에서 꽂아 놓은 낙하산 배우는 다루기 쉽지 않다. 처음부터 단단히 기를 죽여 놓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하수연이 지금이라도 영화 출연을 거절해도 나쁘지 않다.
강산이 생각한 <세 번의 사랑>의 여주인공은 하수연처럼 가녀리게 생긴 미인이 아니다.
남자들이 보기만 해도 고개가 돌아가는 치명적인 섹시함을 가진 글래머 스타일의 미녀 배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키가 얼마나 되죠?”
“169입니다.”
“그럼 몸무게는요?”
“46키로 정도...”
“촬영할 때까지 최대한 몸무게를 늘려 주세요.”
“얼마나요?”
“50키로 정도요.”
강산은 하수연과 초면인데도 몸무게를 물어보고 4키로를 촬영을 시작할 때 까지 더 찌우라고 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말을 에둘러서 할 필요는 없었다.
제작비의 절반은 이미 들어왔다.
하수연이 감독이 싫다고 그만두면 다른 배우, 장윤미를 캐스팅하면 되고.
무표정한 강산의 계속되는 질문에 긴장한 하수연은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강산은 하수연에게서 묘한 친근감,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여배우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듯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동안 만났던 여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에로영화나 성인영화를 만들 때 만났던 여배우만 해도 백 여 명이 넘는다.
술집이나 사회에서 만난 아가씨들까지 합치면 아마도 수백 여 명이 넘을 것이다.
하수연의 조금 얇은 몸매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그러나 하수연이 웃을 때마다 보여주는 보조개와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이 묘하다.
‘하수연이 미소를 지으면 젊은 남자들이 심쿵 하겠구나.’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남자들은 미인이지만 표정이 없는 얼음 공주보다, 미인은 아니라도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에게 섹시한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특히, 약간의 수줍은 듯 부끄러움을 감추고 미소 짓는 여성들에게 매료된다고 한다.
강산의 영화에서는 여배우들이 수줍게 미소 짓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여배우들의 뛰어난 몸매는 기본으로 장착해야 하지만 미소가 아름다운 여배우들을 주로 캐스팅했다.
* * *
이번 영화 가칭 <세 번의 사랑>은 조금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다.
김소연(하수연 분)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인 박윤기(서윤호 분)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지만 소연의 갑작스러운 임신과 윤기 어머니의 반대로 첫사랑 윤기와 헤어진다.
가출한 소연은 야매로 일하는 어둠의 의사에게 중절 수술을 하고, 아는 언니의 소개로 여러 가지 알바를 하다가 화류계까지 흘러 들어간다.
룸싸롱에서 일하던 소연은 중년의 사업가 김중섭(이병수 분)을 만나 화류계를 벗어나 중섭의 세컨드가 되지만 중섭의 아내에게 들켜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소연은 카페에서 알바를 하다가 만난 택배기사 신용한(유요한 분)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만 자신을 찾아 온 윤기 때문에 세 번째 사랑인 요한과도 헤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소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 * *
프리 프로덕션.
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단계로 촬영 이전의 작업을 말한다.
<세 번의 사랑>은 촬영 장소 로케이션 및 촬영 일정(회차) 대본 리딩을 하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순조롭게 마치고, 하수연이 출연하는 부분부터 영화 촬영을 시작했다.
강산은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의 섭외를 위해 백방으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옛날의 인연을 팔면서 섭외하고 다녔다.
이제는 중견 배우가 된 유요한은 강산이 발굴한 배우로 직접 가서 설득하고, 아이돌 출신 서윤호는 김두호 제작부장이 데려왔다.
김두호는 <좋은 친구들>이 부도가 나자,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이돌 회사에서 일을 했다.
영화가 잘 되려는 지, 기대하지 않던 한류스타 이병수가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다만, 바쁜 스케줄 상 열흘밖에 여유가 없다고 자신의 스케줄을 맞춰 달라는 조건이다. 물론 오케이였다.
이병수는 카메오로만 출연해도 영화 홍보가 되는 배우다. 영화 홍보를 위한 크랭크인 행사는 이병수가 촬영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할 예정이다.
하지만 강산은 제작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하수연이 출연하는 씬부터 먼저 촬영하기 시작했다.
강산은 하수연의 연기력을 테스트하고, 처음 구성하는 스텝들과 호흡도 맞춰보고, 오랜만에 다시 하는 작업이라 본격적으로 촬영하기 전에 워밍업도 필요했다.
나중에 하수연이 다른 남자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기 전에 하수연의 제일 아름답게 보이는 표정, 얼굴 각도들을 찾아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컸다.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알았지만 하수연은 연기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았다.
스물두 살의 신인 배우라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본기가 잘 갖추어져 있다.
하수연은 대사 전달의 기본인 정확한 발음과 발성, 깊은 눈빛에서 나오는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순수한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인 소연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고등학생 소연이 혀 짧은 소리로 윤기와 전화로 만나는 약속을 하는 씬이다.
하수연이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하품하는 모습도 너무 예쁘게 나왔다.
“여보세요~.”
- 왜, 전화 안 받아
“미안, 미안, 화났어. 나 지금 일어났어.”
- 아냐. 화 안 났어.
“화났구나? 우리 자기 많이 화났어?”
- 화나지 않았어. 전화를 받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 되서 그런 거야.
“자기야. 오늘은 어디에서 만나?”
- 학원 끝나고 사거리 스벅에서 어때?
“알겠어. 알겠어. 그럼 그때 보자고요.”
모니터의 하수연은 잠이 덜 깬 고양이처럼 두 눈을 깜박이는 순진한 소녀에서 윤기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는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가 되었다.
“컷. OK입니다. 수연씨. 아주 좋아요. 좋아. 이 테이크는 킵하기로 하고 한 번만 더 갑시다.”
강산은 검은 선글라스에 무표정하게 OK를 했다.
그러나 하수연은 강산이 진심으로 OK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강산은 항상 좋다고 하면서도 매번 한번만 더 가자고 하였다.
“이 번에는 조금만 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딕션을 해 주세요.”
“네.”
강산은 하수연에게 한 테이크를 가지고도 몇 번이나 다르게 연기해 달라고 디렉션을 하였다.
강산은 본래 디렉션을 많이 하는 감독은 아니다. 배우들에게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는 연기는 자유롭게 맡겨두는 편이다.
그런데 하수연에게는 세심하게 디렉션을 했다.
강산을 잘 아는 스텝들은 강산이 신인 배우인 하수연을 길들이려고 디렉션을 많이 하는가 싶었다.
하수연은 언제나 씩씩하게 ‘네’ 하고 대답하고 강산의 디렉션에 응했다.
강산은 모니터에서 연기하는 하수연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른다. 강산은 하수연처럼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고서도 성적인 욕망이 생기지 않는 지가 고민이다.
‘나하고는 얘가 잘 안 맞나?’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배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강산의 지론이었다.
배우들의 감정을 만드는 감독의 아랫도리가 꼴리지 않는데, 어떻게 화면을 보는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정확한 시기에 대한 기억은 모른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육감적인 여배우를 봐도 성적으로 흥분되거나 ‘따먹고 싶다’ ‘사귀고 싶다’ 등등 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지금 하수연만 봐도 그렇다.
하수연이 분명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이전의 다른 여배우들에게서 느끼던 성적인 느낌, 그런 끈적끈적한 끌림은 아니다.
다른 스텝들을 보면 하수연에게서 자신과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거 안 좋은데?’
이게 말로만 듣던 중년 남성들만의 세계인가?
고개 숙인 남자들의 고민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존경하는 선배인 봉*대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강산아. 아무리 아름다운 여배우를 봐도 작품의 배경으로 보일 때 진정한 감독이 되는 거야.”
당시는 서지 않는 남자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니 알게 되었다.
지금 주연 배우 하수연이 영화의 배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강산은 이번 생에서 남자로서의 삶은 끝이 나고 있지만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제 나는 진정한 영화감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