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강산: 뒷모습에 화가 난 표정이 안보여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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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눈을 뜬다.
회귀한 후부터 생긴 습관이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 6시가 되면 눈을 떠진다.
좀 더 잠을 자려고 억지로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그래서 6시에 일어나면, 오래된 습관처럼 방을 청소하고 커피를 찾아 마셨다.
방 청소를 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주변을 산책했다.
오늘은 오대산에 온지 삼일 째다.
지금 일어난 사람은 강산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강산도 잠을 자고 있었겠지만 회귀한 이후에는 체력이 부쩍 좋아진 것 같았다.
기분 탓이지만 젊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강산은 펜션 주인 부부가 가르쳐 준 저수지를 확인하려고, 지도에 나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새벽 이슬에 젖은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좋았다.
좀 더 산 위로 올라가자, 산 안개가 올라왔다.
짙은 안개에 덮인 산하는 세상의 사물들을 모두 지워버린 것 같았다. 가까이 있는 모든 사물들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산 안개는 골짜기와 숲과 나무 같은 사물들을 숨겼다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아차! 카메라를 가져올 걸 그랬다.
산 안개가 지나가는 이 장면들을 배경 화면이라도 쓰게 인서트 컷이라도 땄으면 좋았을 텐데.
강산을 내일부터 촬영할 <남수 이야기>에서 남수가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으로 지금이 딱 맞는데 말이다.
다음에 안정민을 데리고 새벽 산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저수지가 있는 지도 방향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안개가 걷혀 있었다.
의외로 저수지는 펜션과 그리 멀지 않았다.
강산은 저수지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이 생각한 영화 장면들과 이 저수지와 어울리는 장소를 확인하고 싶었다.
촬영에 적당한 배경과 배우들이 연기할 때, 자연광을 이용하기 위한 태양이 비추는 각도를 촬영에 적당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 * *
강산은 저수지에서 내려오자 9시 정도가 되었다.
스텝들과 배우들은 이제야 일어났는지 펜션의 별관이 부산하다.
세면하는 사람, 양치하는 사람, 담배 피우며 잡담하는 사람, 몸을 이리 저리 흔들며 운동하는 사람,
강산은 아침을 준비하는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떠세요?”
“오늘이 <다현 이야기> 마지막 날입니다. 힘냅시다.”
“우리 좋은 영화 만들어요.”
“오늘도 즐겁게 영화를 만들어요.”
강산은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했다.
같이 일한 지도 이틀이 지나면서,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조금씩 신뢰의 싹이 틔우고 있었다.
이런 말의 성찬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 모두에게 안정감을 준다.
강산은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오전 촬영과 오후 촬영, 저녁 촬영 일정을 알렸다.
촬영 일정을 알려주는 것은 스텝들에게는 장비를 준비하고, 배우들에게는 촬영에 필요한 영화 의상이나 화장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현장에 스텝들이 부족해서 배우들은 스스로 촬영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시간이 충분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두 편이나 되는 영화 의상은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지만 강산의 대본도 자주 변해서 사전에 준비한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강산이 생각한 의상은 준비해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오대산으로 출발하기 전 만해도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결말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산은 김두호에게 평창군에 가서 의사 가운과 간호사 복장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두호는 차를 몰고 서둘러 평창으로 나갔다.
의상을 구하러 간 김두호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준비해 달라고 한 의상을 사용할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촬영할 시간이 있을지도 잘 모른다.
* * *
2층의 다현의 방에서 다현이 잠을 자고 있었다.
강산은 아침이지만, 배경을 밤으로 설정하고, 창문을 검은 색지로 완전하게 가리고 방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레디 액션”
누군가 다현의 침대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다현은 잠결에 손을 움직여 침대 옆에 있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침대 이불이 불룩하다.
다현이 긴장한 표정을 짓다가, 재빠르게 이불을 들춰보았다.
이불 안에는 다미가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다현과 눈을 마주친 다미는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긴장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다미야. 왜 그래. 무서워?”
다미는 대답하지 않고, ‘끄덕 끄덕’ 고개 짓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때, ‘콰과강’ 하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강산은 이 장면을 어제 촬영했던 장면과 비슷한 분위기로 촬영하려고 했다.
같은 시계를 배치하고, 같은 시계 소리를 넣어 줄 것이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불친절하지만 불편한 기시감을 주면서, 다현이 새엄마 영숙을 미워하는 감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든 씬이다.
“다미야 이리와. 나도 천둥소리가 무서워.”
다현은 다미를 꼭 끌어안으면서 다시 말한다.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엄마에게 갔을 텐데. 다미야 엄마가 안 계시지만 아빠에게 가보는 것은 어때?”
다현은 다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독백을 하듯이 말을 이었다.
“아냐. 아빠에게는 가지마. 절대 가지마. 아빠는 지금 그 여자에게 빠져 있잖아. 다미야. 아빠 대신 내가 있으니까 괜찮지?”
다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현은 다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미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너도 그 여자 마음에 들지 않지. 새엄마라는 여자 말이야. 다미야. 아무리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어도 밥은 먹어야지.”
“......”
다현이 부드럽게 다미의 얼굴을 쳐다보자, 다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미의 얼굴을 지켜보던 다현은 결심한 듯 다미를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다 괜찮아 질 거야. 예전처럼 아빠하고 다미하고 행복하게 살 거야.”
* * *
다현이 새엄마 영숙에게 화가 나서 집 밖으로 나가는 씬이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오던 아버지 덕수는 밖으로 나가려는 다현과 마주쳤다.
화가 난 다현은 덕수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버지 덕수를 무시하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컷, NG요. 이규리 배우님. 화가 난 표정에 변화가 너무 많아요. 조금 시크하게 표정 변화를 줄여주세요. 다현이는 지금 새엄마와 아빠에게 진지하게 화가 났거든요.”
이규리는 강산의 'NG'가 이해되지 않았다.
화가 날 때 짓는 표정 연기는 대부분의 감독들에게 OK를 받던 연기 표현이었다.
강산 감독은 이규리가 자신 있는 표정 연기를 'NG' 라고 한다.
다현이가 진지하게 화가 났다고 하면서, 이규리에게 표정 변화를 줄이고 다시 연기하라고 한다.
다른 영화감독들과 영화나 에로 영화를 촬영할 때와는 너무 다르다.
“이규리 배우님. 너무 빨라요. 템포를 조절해서 걸어주세요.”
이규리는 다른 씬들은 빨리 찍기로 바로 OK를 하면서, 단순하게 걸어가는 장면을 가지고 까다롭게 'NG'를 거는 강산 감독이 이해되지 않았다.
단순히 무표정한 모습이 아니라 시크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여러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강산에게서 'OK'를 받았다.
다음 씬은 화가 난 표정으로 나가는 다현을 따라 덕수가 나왔다가, 다현이 집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이다.
배우들의 동선은 단순하지만 카메라는 배우들의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강산은 김덕수의 시선으로, 대문으로 나가는 다현이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계속 'NG'를 걸었다.
“NG요. 이규리 배우님. 뒷모습에 화가 난 표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가 난 표정 좀 담아 주세요.”
이규리는 강산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어떻게 뒷모습에 화가 난 표정을 담으라는 말인가?
이규리는 강산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감독님. 해도 너무해요. 어떻게 화가 난 것을 뒷모습에 담아요?”
“으음... 이규리 배우님.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을 본 적이 있나요?”
“네.”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지금은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비에르 쿠가(Xavier Cugat)의 폭스 트로트 리듬의 Maria Elena 아래 장국영이 런닝셔츠 차림으로 방 안에서 맘보춤을 추는 장면이 유명하다.
“아비가 필리핀에 친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장면에서, 두 주먹을 꼭 쥐고 필리핀의 숲 길을 성큼 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있잖아요. 아비가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아비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것 같잖아요.”
“......”
이규리는 강산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아니 왜?'
강산 감독은 삼류 에로 영화를 찍으면서, 왕가위 감독을 끌어들이고, 장국영의 연기를 이야기하는 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솔직히 장국영이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 장면을 본 적이 있는 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식하게 왕가위를 모른다고 감독에게 따질 수도 없고, 감독에게 순종적이다가 이제 와서 한 성질 하는 것을 보여줄 수도 없고.
다시 촬영이 시작하자, 이규리는 나름 화난 마음을 담아 진지하게 연기했다.
내심 OK’를 기대했는데, 돌아온 것은 이전과 같은 ‘NG’였다.
이규리는 강산에게 진심으로 리얼하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현이가 왜 아빠에게 화가 났는지도 다 잊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진심으로 강산에게 화가 난 마음 그대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강산 감독이 'NG'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산 감독은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OK’ 콜을 했다.
“OK입니다. 아주 좋아요. 액설렌트에요. 오스카를 주고 싶어요.”
이규리는 계속되는 강산의 극찬에 강산에게 화가 났던 마음이 어느새 풀리는 것 같았다.
계속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나는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닌데’
이규리는 계속되는 웃음을 고치고 정색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