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박현태: 뭐여, 할리우드 블록버스타 에로영화여.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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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채은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독님. 통화가능하세요?”
“네. 채은숙 가수님. 말씀하세요.”
“감독님. 제가요. <아침 산책>요. KBC 방송에 출연했어요.”
전화상이지만 채은숙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방송 출연이 채은숙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심하게 감동했는가 보다.
“아~네. 축하드려요.”
“감독님. 이게 다 감독님 덕이에요.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흐으윽... 앙”
강산은 채은숙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서 당황했다.
만약에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은 강산이 채은숙에게 나쁜 짓을 해서, 예쁜 처자가 울고 있다고 오해했을 것이다.
전화상이라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에요. 채은숙씨가 만든 성과에요. 저는 단순한 길잡이에 불과해요.”
“정말로 고마워요. 흐윽...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지 않았을 테고요. 흐윽... 스카프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요. 흐윽...”
강산은 여자들의 이런 감정에 서툴렀다.
조금만 더 자상하게 다가가면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말이나 행동은 소름이 돋아서 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채은숙의 공치사가 지나치다.
강산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방송이야기를 꺼냈다.
“은숙씨. 언제 방송되는가요?”
“다음 주 화요일요. 감독님 이야기 많이 했으니까요. 꼭 시청해 주세요.”
* * *
이덕배는 강산과 이번 영화 가칭 <첫눈>의 감독 계약서 도장을 찍었다.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는 첫 번째 영화 <첫눈>의 결과를 보고, 다음 투자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것은 강산이 요구한 투자 자금 때문이다.
강산은 <첫눈>의 제작비로 1억을 요구했지만,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의 제작비로 3억을 요구했다.
2000년 한국영화 극장개봉작 평균 제작비는 21.5억원으로 마케팅비를 제외한 평균 순제작비는 15억이다.
제작비 3억은 무리한 비용은 아니지만 이덕배 사장으로서는 부담이 가는 아니, 불가능한 액수의 투자다.
2000년의 우리나라는 IMF 위기를 벗어나면서 인터넷 산업이 중심이 된 벤처붐을 따라 영화산업에도 기존에 영화산업과는 관련이 없던 금융회사들의 지분 투자가 시작되고 있었다.
참, 강산의 영화에도 해피머니가 모태인 해피미디어가 참여하므로 금융회사의 지분투자가 된 셈이기는 하다.
3억은 평균제작비에 5분의 1에 불과한 자금이지만, 강산의 지명도나 경력으로는 1억 이상의 투자 자금을 유치하기 어려웠다.
<첫눈>의 제작투자는 해피미디어와 애플프로덕션이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결정됐다.
이덕배는 강산이 요구한 총제작비 1억 중 5천을 만들었다.
마누라의 강남 아파트만 아니었다면 1억을 모두 투자했을 텐데 말이다.
이덕배는 부족한 5천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군데를 들쑤셔 보았지만, 이상한 소문만 났다.
극장 개봉용 영화를 만든다고 투자자를 모은다는데 아무래도 이덕배가 사기를 치는 것 같았다.
신인 감독이라는 강산 감독과 극장용 영화 제작은 처음인 이덕배에게 영화 제작을 투자하라니?
그런데 이덕배는 뭘 믿고 성공을 자신하는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작 투자를 권했다.
“이사장~ 무신 일로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가잉”
이덕배는 친분이 있는 플레이보이 조영수, 마이웨이 픽쳐스 봉춘식, 노크영화사 정자관 등 에로영화사 대표들과 돈이 많다는 쩐주들을 만나 보았지만 원하는 투자를 받지 못했다.
이덕배는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바나나 필림의 박현태 사장을 찾아갔다.
박현태에게 받을 빚(?)이 있다.
그리고 박현태는 뒷골목 세계의 선배라 돈보다는 의리를 중하게 여겼던 마지막 세대의 선배다.
“일은 무슨 일이요. 형님.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찾아 왔지요.”
“나야 조체. 나도 동상에게 거시기 헌 일도 있고 말이제. 동상, 오늘 일 좀 제끼고 한판 놀아볼까?”
“아닙니다. 형님. 다른...”
“아녀, 아녀. 동상이 사양하면 내가 너무 섭하제. 동상은 그냥 오늘 하루 나헌티 그냥 믿고 맽겨. 내가 그냥 풀코스로 뭐다냐, 황제 싸비스 풀코스로 모실탱게.”
“형님. 술은 다음에 하시죠. 제가 드릴 말씀은... ”
“아녀, 아녀. 사양할 필요가 없다니께 그러네. 동상, 동상도 인자 젊은 여자 애들을 상대허기 좀 힘든 나이가 됐는가?”
“아닙니다. 형님. 그게 아니라요.”
“아녀, 아녀. 내가 알제. 그 심정, 나도 인자는 거시기가 잘 안서서 말이여. 아무리 이쁜 애가 옆에 앉아도 인자는 그냥 그림에 떡이여.”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형님!”
“알어, 알어. 말 안혀도 알어. 그럼 머시냐, 동상 마싸지는 좋아 허는가? 인자 유행허는 그 뭐냐, 동남아 애들이 허는 건디”
“태국마사지요?”
“맞어. 태국마싸지. 나는 중국 것보단 태국 것이 맞더라고. 동상은 태국 마싸지는 받어 받는가?”
“아직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동상. 그럼 우리 태국이나 갈까?”
“네?”
“마싸지 말이여. 태국이 좀 거시기 허면, 중국 거시기는 어뗘?”
“형님. 그런 이야기 말고요. 박두철 감독은 어떻게 지내는 가요?”
이덕배는 이러다가 이야기가 엉뚱한 대로 흘러가겠다 싶어, 대화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박두철 감독 이야기를 꺼냈다.
박현태가 이야기를 계속하게 두었다가는 영화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박두칠이, 잘 지내지. 그 친구는 왜?”
“아뇨. 잘 지내는 가 궁금해서요.”
“동상. 박두칠이 관심은 이만 거시기 했으면 허네. 우리 바나나허고 5년 계약을 햤어. 계약금으로다가 선금도 다 바더 가고.”
“형님, 저도 한번 마음 떠난 사람 관심이 없어요. 그래도 우리 식구였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그란데 말이여. 박두칠이 손버릇이 거시기 헌가?”
“무슨 말씀이신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다.
이덕배는 박두철 감독이 바나나에서도 애플에서 하듯이 제작비에 손대는 것 같았다.
“다 조은디 말이여. 제작비를 너무 마니 쓰는 것 가터서 말이여.”
“얼마나 주는 데요?”
“뭘 말이여?”
“제작비요.”
“그게 말이여. 박두칠이가 나헌티 오더니 말이여. 나가 한 작품 당 천오백을 주겠다고 혔더니 그라믄 안된댜고 그라대. 지는 이천 이하로는 죽어도 못 헌다고 허는 거여”
이덕배는 박두철이 한 작품당 이천을 받고 영화를 만든다고 말을 듣고 쓴웃음이 지어졌다.
박두철은 애플에서 한 작품당 이천 오백을 받았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박두철이가 못한다고 그래요. 형님,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을 보고만 있어요. 버릇을 고쳐줘야 줘야죠.”
이덕배는 박현태가 박두철 감독을 의심하자,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듯이 박현태의 편을 들며 박두철을 비난했다.
사실 박두철을 옹호해 주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허참. 그때만 생각허면 우습지도 안혀. 근데 말이여. 동상, 이천이면 충분한 거 아니여?”
“허허허. 형님. 충분하지요. 떡을 치고도 남아서 팁까지 줘도 될 정도죠.”
“그래. 그런다 말이제.”
이덕배는 박현태의 표정을 보고 내심 이곳에 온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했다.
강산의 영화 투자를 받지 못해도 말이다.
그래도 이덕배가 박현태를 만나러 온 것은 강산 작품 때문이다.
“형님. 그러지 말고 저하고 영화 하나 합시다.”
“영화 보자고. 무신 영화, 어디서? 어디 재미진 디가 있는가?”
박현태는 이덕배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하는 말로 듣고, 무슨 영화를 같이 보자고 찾아왔나 싶었다.
“영화 보자는 게 아니라요. 영화 한편 같이 만들자고요.”
“무신 영환디?”
“강산 감독의 <첫눈>이라는 영화에요.”
“강산, 걔가 누군디?”
“저희 애플 프로덕션 감독이에요.”
“그랴. 박두칠이 대타여? 좀 거시기 허네잉.”
“실력 있는 감독입니다. 강산 감독이 이번에 만든 영화 <두 자매>가 10만이 들었다고 해피머니 최사장이 하더라고요.”
이덕배는 해피머니 최룡해를 끌어들였다.
자신의 말보다 최룡해의 말이라고 하면 박현태가 더 믿을 만 할 것이다.
10만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데자뷰>도 포함된 숫자지만 박현태를 꼬시는데 이것저것 가릴 필요가 없었다.
“10만?”
“네에. 10만”
“10만이면 얼마나 버는 디?”
“한, 3억 정도 벌걸요. 해피머니 최사장은 자기 영화관에서 상영해서 5억 정도는 넘게 벌었을 거예요.”
“해피머니 최사장?”
“네. 최룡해 사장요. 형님도 알죠. 저희들이 영화를 만들면 최룡해 사장이 영화를 배급할 거예요.”
“나도 좀 알제. 최사장, 사람들이 쩐귀라고 하더구만. 돈 냄새를 잘 마튼다고 말이여. 그럼, 동상은 얼마나 벌었는가?”
“한 삼천 정도요.”
박현태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이덕배의 말은 이천을 투자하고 삼천을 벌었다는 말이 아닌가?
“음... 동상. 그랴서 영화를 만들려면 얼매가 필요 헌거여?”
“오천요. 총 1억인데요. 오천은 제가 댈테니까, 오천은 형님이 투자해 주세요.”
“오~천?”
“네. 보통 극장 개봉영화를 만들면 최소 제작비가 10억입니다. 우리는 1억을 투자해서 10억을 버는 겁니다.”
“무신 에로영화 만드는디 일억씩이나 드는가?”
“극장 개봉 영화라니까요. 형님. 오천으로 오억 투자효과를 보는 겁니다.”
“그래두... 일억은 너무 헌거 가터, 뭐시냐. 우리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타 에로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여. 오천이면 우리 바나나 한 달 제작비여.”
“그래두 형님. 우리가 언제까지 다람쥐 챗바퀴 살듯이 쥐새끼처럼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꼴로 살자고 회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잖습니까?”
“동상. 너무 흥분허지 말고잉. 찬찬히 허세. 나라고 이라고 살고 싶것는가? 헐 수 없응게 살제.”
“우리도 한번 떵떵거리고 살아봐야지 않겠습니까?”
“알제. 그맴 내가 알제. 동상,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하러 가세. 어이 김양아! 우리 <몰디브>에 갈틴게. 두 사람이 간다고 전화 좀 줘라이.”
이덕배는 박현태 사장과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바나나 박현태 입장에서는 박두철 때문에 이덕배에게 진 빚(?)이 있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덕배는 제작실패의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면 술이 필요했다.
박현태는 뒷골목 세계의 동생격인 이덕배에게서 박두철 감독을 뺏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마음에 빚이 있었다.
그런데 잘못하다가는 투자라는 명목으로 이덕배에게 오천을 빼앗길 수도 있다 싶었다.
룸살롱 <몰디브>에서 술값으로 2백을 쓰는 것이 오천을 뺏기는 것보다 싸다고 생각했다.
박현태는 술을 사고도 돈을 버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