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장민호: 선글라스를 쓰면 아주 무섭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첫눈>은 강산이 회귀하기 전, 2010년에 만들었던 작품이다.
2000년 12월, 강산은 무슨 영화를 만들까 고민하다 커피도 사고 산책도 하려고 고시원 밖으로 나갔다.
마침, 하늘에서 퍼붓듯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면서, 회귀하기 전에 만들었던 <첫눈>을 떠올렸다.
영화 <첫눈>은 강산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강산은 애플에서 독립한 후, 수많은 영화를 만들고 제작하면서 손대는 영화마다 흥행에 성공했다.
대박은 아니었지만 만들기만 하면 흥행하고 돈이 되는 시절, 강산은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첫눈>은 성인영화 감독에서 예술영화 감독으로 전향하려고 만들었던 첫 작품이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에로영화 감독이 망친 예술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만든 배우들과 스텝, 시나리오는 최고였다.
<좋은 친구들>에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과 스텝들을 모아서 만들었지만, 배우들과 감독, 스텝들에게 흑역사로 남았다.
<첫눈>의 전반부는 장미 여관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성인영화처럼 진행되다가 아들이 누군가에게 살해되면서 미스터리 영화를 전환된다.
살인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대상이 되었다.
경찰이 아버지와 며느리, 아버지가 운영하는 장미여관 투숙객들 중에서 용의자를 줄여가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높여간다.
마지막 남은 용의자를 특정하고 체포하려고 하는데 의외의 인물이 자수한다는 이야기다.
강산은 시아버지와 아들, 며느리의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설정하고, 장미여관에 장기 투숙하는 손님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각, 오각의 애정 관계를 배경으로 잘 빠진 성인영화처럼 잘 그렸다.
아들 차명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성인영화에서 미스터리 영화로 전환하려고 했는데, 성인영화에 빠진 관객들에게는 무리한 전환으로 보였던 것 같다.
전반에 강한 성적 요소 때문에 후반에 의도한 미스터리가 살지 않고 치정극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강산은 부도가 난 후에, 왜 이 영화가 실패 했는지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시 복기해 보았다.
먼저, 며느리 역을 맡은 박은혜의 도발적인 성적 매력이 너무 지나쳤다.
박은혜의 육감적인 몸매와 야한 눈 웃음, 미소와 몸짓,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너무 성적인 매력이 넘쳐 다른 메시지는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아들, 여관의 투숙객들과 며느리 사이의 애매하고 미묘한 감성이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역을 맡은 최동조 배우가 너무 마초적으로 연기했다.
선이 굵은 최동조의 연기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다른 배우들과의 밸런스가 깨져 버렸다.
영화 <첫눈>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금지된 사랑으로 부각 되었다.
진짜 문제는 배우들이 아니라 강산 본인이다.
잘못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와 같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악기를 조율해서 사운드를 만들고, 그 사운드로 관객들을 설득하고 소통해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감독이 먼저 중심을 잡아야 한다.
배우들에게 연기 방향을 설득하고 연기의 강약을 조절해야 하는데, 이 영화 <첫눈>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씬을 촬영할 때는 이 장면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배우들의 연기를 설득하고 조율해야 한다.
변명 같지만, 배우들의 성적 표현에 너무 집중하다가 전체적인 밸런스를 놓인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다.
* * *
서정아는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다.
미스코리아로 화려하게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연기를 계속해야 할지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김윤우 교수님의 말을 따라 CF나 예능보다 연기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10년이 넘게 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주연보다는 조연, 조연 중에서 조금 비중이 높은 조연으로 알려져 있다.
서정아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연기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지만 한 걸음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은 주연의 자리들이 뒤따라오던 후배들이 어느새 차지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태혜지(김태희, 송혜교, 전지현)’처럼 귀엽고 러블리한 스타일의 여배우들을 좋아한다.
서정아처럼 키가 크고 차가운 도시 미녀 스타일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서정아는 소속사인 ‘파이트리’로 온 대본 하나를 보았다.
<첫눈>이라는 대본에는 '서정아 배우 앞'이라는 메모와 함께 밀봉된 손 편지가 붙어 있었다.
손 편지에는 정성스럽게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서정아 배우님. 강산 감독입니다. 스타보다 배우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제 영화 <첫눈>에 출연해 주십시오. 제가 배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감동이었다.
이런 손 편지, 감독이 직접 써서 보내 준 손 편지는 처음 받아보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감독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선물이었다.
서정아는 영화 <첫눈>의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어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어려웠다.
이미숙 역을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자신의 몸매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본 상의 이미숙처럼 남자들을 첫눈에 유혹할 만큼 육감적이지 않다.
서정아는 소속사에 영화 <첫눈>에 출연하겠다고 했다.
* * *
“안녕하세요. 이번 영화 <첫눈>을 감독하는 강산입니다. 촬영감독도 겸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대본 리딩하는 시간이었다.
서정아는 해피미디어라는 회사 회의실에서 영화 <첫눈>의 처음 미팅이자 대본 리딩을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강산 감독에 이어 스텝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음향감독 김철수, 조명감독 정진수, 미술감독 박성희, 음악감독 탁성대 등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났던 스텝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미술감독 박성희는 작은 키, 작은 얼굴에 눈이 똘망똘망 귀여운 여중생처럼 생겼다.
그 외에 음향감독, 조명감독, 음악감독은 깡패처럼 하나같이 몸집이 크고, 인상도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예술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음악감독이라는 탁성대는 위아래 모두 검은 가죽 옷에 긴 머리를 밴드로 묶고, 근육질의 굵은 팔뚝에는 체게바라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제작을 담당하는 프로듀서는 김두호, 유명세 두 명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사가 반반으로 투자해서 두 사람이라고 한다.
이어서 시아버지 차영남 역에 배우 장민호 선배님, 김마리아 역에 김여정 선배님, 며느리 이미숙 역에 나, 서정아가 자기소개하고 앉았다.
그런데 이미숙의 파트너인 아들 차명수 역은 아직 캐스팅하는 중이라고 했다.
강산 감독은 이 작품 전에 독립 영화에서 여러 편 연출하고, 최근에 두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두 편의 영화는 지금도 극장에서 상영 중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는 제목이다.
솔직히 말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대본 리딩은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할 정도로, 거의 끊어지지 않고 진행됐다.
아들인 차명수 역이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배역은 제작부장이라고 하는 김두호가 대사를 읽어주었다.
장민호 선배가 실수로 대사를 씹었는데도 끊지 않고, 김여정 선배가 대사 도중 기침을 해서 끊어졌는데도 감독은 그냥 이어서 리딩하라고 했다.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한 시간이 조금 넘어서 대본리딩이 모두 끝났다.
다른 배우들이 대본 리딩을 못한 것도 아니고 대본 리딩에서 본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다.
강산 감독은 대본 리딩을 하는데도 아무런 피드백을 하지 않고 배우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 시간 후에는 연탄집에서 회식이 있으니까요. 시간이 되시는 분은 모두 참석해 주세요?”
“강감독도 수고했어요. 오늘 회식에 술은 주는가?”
“네. 선생님. 당연하죠.”
"자네가 안 먹는다고 사이다 콜라 주는 것은 아니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술은 무제한입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는 술 조달에 제한이나 차질은 없겠지?”
“네. 선생님. 이번 촬영지는 대부분이 서울이라 오대산과는 상황이 많이 다를 것입니다.”
장민호가 강산에게 물었다.
지난번 촬영에서는, 일주일 내내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감독인 강산이 술을 마시지 않아서 인지, 제작진들이 경험이 부족해서 인지, 일부러 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술을 조금밖에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한 소주는 일인 당 한 병밖에 불과해서, 첫째 날에 다 마셔 버렸다.
덕분에 장민호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강제로 금주 하게 돼서 컨디션이 좋았지만, 술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싶다고 오대산 가운데서 술 마시러 평창군까지 나갈 수도 없었다.
연탄집이라는 삼겹살집은 청담동 해피미디어 건물 뒤편으로 한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연탄집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서정아는 장민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장민호 선배님. 이상하지 않아요?”
서정아는 최근에 장민호와 같이 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서 장민호를 알고 있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과거의 이력 때문에 캐스팅을 꺼리는 배우라고 알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뭐가?”
“대본 리딩을 하는데요. 감독님이 아무런 피드백을 하지 않아서요.”
“우배우는 그게 이상한가?”
“네. 보통 대본 리딩을 할 때면 감독이 배우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이번 대본 리딩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요. 그게 너무 이상해요.”
“강감독은 다른 감독들과는 달라. 대본도 직접 쓰고 촬영도 직접 하지. 나도 두 작품밖에 같이 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천재야. 천재."
"천재요?"
"천재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거든. 아마도 실제 현장에서는 지금 대본과 전혀 다른 대본을 줄 걸. 그렇게 생각해야 나중에 마음이 편할 거야.”
“그럼 대본 리딩은 왜 하는데요?”
“배우하고 상견례도 하고 배우들이 말하는 투와 억양을 보는 거지. 아마도 우배우 본인의 말투로 대사를 고쳐올 거야. 본인이 영화 속의 배역과 일체감이 들 때는 소름이 끼칠 거야.”
서정아는 장민호가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감독이 배우에 맞춰 대본을 고쳐준다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배우가 대본에 맞춰 연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본 리딩을 보고 너무 걱정하지 마. 사실 이번 영화는 대본대로 진행되지도 않을 테니까”
“대본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힘들지. 너무 힘들어. 그런데 강산 감독은 현장성을 중요시하는 것 같아. 로케이션 장소나 상황에 따라 그때의 인상과 상황에 따라 대사를 수정해 주지”
“감독님의 지시나 대본의 지문이 이해되지 않으면 감독님께 질문해도 되나요?”
“음... 강산 감독은 조금 아니 그런 면에서는 불친절한 것 같아. 자신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데 연기하는 당신은 왜 고민하지 않지? 그런 스타일이야.”
“너무 무서운데요.”
“하하하. 무섭지. 아주 무섭지. 특히 선글라스를 쓰면 아주 무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