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차영남: 다시는 오지 마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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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촬영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다.
차영남(장민호 분)이 탑골 공원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의 옆에서 잠시 구경하다가 낙원 시장 지하로 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강산은 좀 더 리얼하게 촬영하려고 했다.
차영남이 좁은 낙원 시장 지하 입구에서 나오는 젊은 남자와 부딪치고 뒤로 밀리는 장면을 촬영하고, 이어 혼자서 시장 보고 시장에 늘어선 국수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강산이 기대한 대로 장민호는 몇 차례의 테이크 끝에 OK를 받았다.
다음 씬은 장민호와 서정아가 같이 출연하는 씬이었다.
아들 차명수가 데려온 이미숙(서정아 분)과 같이 시장을 보고, 국수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이다.
처음 씬에서는 불량한 옷을 입고 야한 화장과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민호를 따라가는 장면을 촬영하고, 다음 씬에서는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민호와 같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다음에는 장민호와 서정아가 같이 장미여관으로 돌아오는 장면들을 촬영했다.
장미여관은 북촌에 있는 어느 골목의 기와집 입구에 장미여관이라는 작은 간판을 붙이고 촬영했다.
장미여관의 본 채는 목포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 * *
강산은 영화 <첫눈>의 주요 촬영지인 목포의 적산가옥(극중 장미여관)으로 가기 전에 중간 촬영 장소로 익산 교도소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강산은 카메라에 얼굴을 묻고 ‘레디 액션’을 외쳤다.
창살로 나뉜 아홉 공간 중에 구멍이 뚫린 대화구(對話口)를 비추며, 이곳이 교도소 면회소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8927번 면회~”
면회 통보를 받은 수감자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차영남이 면회소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차영남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얼굴에는 짧은 하얀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구멍이 뚫린 유리창 너머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던 이미숙이 일어섰다.
이미숙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머리에 쓴 목도리를 벗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대화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차영남은 아무 말 없이 이미숙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얼굴 봤으니 이제 됐다.”
차영남은 이미숙을 보고 이 말을 마치고 일어서서 면회소를 나가다가 면회소 문에 다다르자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다시는 오지 마라.”
차영남이 문을 열고 나가자, 이미숙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컷. OK입니다. 이번 장면은 대본 리딩 할 때 말했던 다른 방식의 결말입니다. 차영남이 면회소로 들어와서 이미숙을 반갑게 맞아주는 장면입니다. 잠시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강산은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장민호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는 배우들에게 말했다.
“레디 액션”
* * *
장민호.
강산은 시아버지 차영남 역으로 장민호 선생을 캐스팅했다.
회귀 전에는 최동조 선배가 맡았다.
지금의 최동조 선배는 삼십대 중반으로 나이가 맞지 않았지만 강산의 원픽은 장민호 선생이다.
송광호.
아들 차명수 역으로 송광호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소속사에 <첫눈>의 시나리오와 장문의 손 편지를 함께 보냈다.
송광호 배우는 강산이 존경하고 최애하는 배우다.
회귀하기 전에도 강산은 송광호 배우와 같이 작업하고 싶어서 캐스팅을 시도했지만 하지 못했다.
송광호 배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고, 강산은 성공한 애로영화 출신 감독일 뿐이었다.
사람 사이에 계급이 없다지만 두 사람은 급이 달랐다.
그러나 회귀한 지금의 송광호는 연극 배우를 하다가 영화에서 조연을 넘어 주연 배우로 성장하는 중이다.
강산은 <첫눈>의 아들 차명수의 이미지로, 송광호가 데뷔하던 당시 모습을 생각했다.
송광호의 건들거리는 깡패 연기가 얼마나 리얼했는지, 송광호를 처음 본 관객들은 배우가 아니라 진짜 깡패를 섭외해서 촬영한 줄 알았다고 한다.
송광호 다른 영화를 촬영하는 중이라 출연하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지만 강산은 캐스팅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기다리려고 한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번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서정아.
며느리 이미숙 역에는 미스코리아 출신 서정아를 생각했다.
서정아와 회귀하기 전에 이미숙 역을 한 박은혜의 이미지와는 거의 정반대의 이미지다.
박은혜가 육감적인 매력을 가진 배우라면 서정아는 지적 이미지를 가진 배우다.
강산은 회귀하기 전에 만들었던 <첫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박은혜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한 것이다.
서정아를 캐스팅한 것은 강산에게도 모험이다.
강산은 회귀하기 전에 서정아가 보여주던 소름끼치는 연기를 기억한다.
미묘한 표정과 눈빛의 변화만으로 연기를 하는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상적인 밸런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정아가 포텐을 터뜨린 시기는 2003년에 출연했던 <장화전> 이후부터 일이다.
지금의 서정아는 열심히 연기하는 평범한 여배우들 중에 한 명일 뿐이다.
김여정.
박마리아 역으로 김여정 선생을 캐스팅 했다.
장민호 선생과는 극단 <청춘만세>에서 같이 활동한 적이 있어서 장민호 선생 편에 섭외를 부탁했다.
박마리아 역은 이전에 만들었던 <첫눈>에는 없던 배역이다.
박마리아는 공원에서 노인을 상대로 박카스를 팔며 성매매 하는 박카스 아줌마 역이다.
이번 <첫눈>에서는 지난번 영화의 빈틈, 성적인 요소가 지나쳤던 부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김여정 선생은 이십 년 전에는 유명한 배우로 활약했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연기하고 담을 쌓고 지내다가 최근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기를 다시 시작했지만 아직은 전성기 시절의 플렉스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첫눈>은 독립영화보다 조금 나은 규모의 예산이라 촬영 환경이 열악하고 출연료도 많지 않았다.
김여정 선생은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인지, 박마리아 역할이 늙은 창녀 역할인데도 출연을 거절하지 않았다.
* * *
강산은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는 것을 선호한다.
선호한다는 말이지, 반드시 그렇게 촬영한다는 말은 아니다.
배우들이 감정을 유지하고 발전하는데 순서대로 촬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첫눈>의 경우, 마지막 장면을 먼저 촬영하려고 한다.
굳이 결론을 빨리 촬영하려고 하는 것은 겨울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강산은 아직 <첫눈>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배우들에게 나눠준 대본은 예전처럼 비극으로 마무리하는 버전이다.
강산의 고민은 에로틱한 부분을 많이 덜어내고 찍으려고 하는데, 비극적인 마무리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왜 그런지, 회귀한 후로는 독기가 많이 빠진 것 같았다.
회귀하기 전이라면 이런 영화의 마무리는 무조건 비극적인 마무리다.
당시는 영화는 비극적인 마무리가 아니면 평론가나 관객들에게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아 참. 지금이 그때지.
강산은 관객들에게 겨울과 첫눈이 주는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사랑을 잃고 남겨진 사람의 감정과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 겨울의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의 차가운 추위에도 마음이 들뜨고 아침 햇살처럼 따스한지 말이다.
강산은 눈이 내리면 서정아와 첫눈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다.
끝내 눈을 만나지 못하면 TV 뉴스 아나운서의 방송을 배경으로 희망을 표현하는 모습을 촬영할 생각이다.
강산은 익산 교도소 세트장에서 촬영을 마친 후, 서정아와 고창 갯벌로 내려갔다.
장민호와 다른 배우들은 목포로 내려갔다.
이번 영화는 서울 주변에서 주로 촬영할 생각이지만 촬영의 주 무대인 장미여관은 목포의 한 적산가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익산에서 고창, 목포로 이어지는 촬영 스케줄을 만들었다.
김두호는 지금 목포에서 장미여관으로 사용할 적산가옥을 계약하고,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청소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적산가옥은 김두호와 같이 목포 적산가옥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고창 공소에 도착해보니, 강산이 예상한 대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공소 갯벌은 회귀하기 전에 본 갯벌 사진전에서 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서해 갯벌은 모래가 섞여있는 남해안 갯벌과 달리 진흙이 대부분인 뻘 갯벌이다.
그래서 한번 빠지면 발을 빼기 힘이 드는데, 지금이 겨울이라 갯벌이 얼어 있어서 걸어가는데 큰 부담이 없었다.
강산은 겨울 바다에서 큰 파도가 치는 해안가를 생각했다.
푸른색이 도는 모직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걸친 서정아가 롱부츠를 신고 긴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돌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서해안의 파도는 그리 높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파도가 치는 겨울 바다를 보려면 동해안으로 가야 한다.
그림만 생각하면 동해로 가고 싶었지만 일정 상 동해안까지 갔다 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안으로 서해안 갯벌을 생각했다.
갯벌은 진회색으로 겉으로는 더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강산은 이미숙의 마음을 겨울 갯벌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감정이 메말라 죽어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수많은 생명이 다시 움직이는 갯벌처럼 살아날 것이다.
강산은 카메라를 뻘 위에 고정한 후, 서정아에게 수신호를 주었다.
카메라 감독을 겸하느라 신호를 주기 불편해서 강산이 수신호를 하면 막내 스텝이 슬레이트를 치고 화면에서 재빨리 사라진다.
서정아는 웃음기를 지우고 갯벌 위를 걸어갔다.
연기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먼저, 겨울 바닷가의 바람이다.
겨울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라 칼날 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바람이다. 겨울 바다는 사람들에게 서슬이 시퍼런 칼날 같은 차가운 바람을 보낸다.
세찬 바람을 맞으면 정면으로 맞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둘째는 갯벌이다.
갯벌은 얼어있지만 완전하게 얼어있지는 않아서, 곳곳에 바닷물이 고여 있어서 걸을 때마다 바닷물이 튄다.
서정아가 걸을 때마다 검은 가죽 롱부츠에 뻘의 더러운 물이 튀었다.
“서정아 배우님. 겨울 바람이나 갯벌 바닥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감정에 집중해 주세요.”
“네”
강산은 서정아가 갯벌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표정에 카메라 렌즈를 집중했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에 서정아의 얼굴이 창백하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고 그나마 목도리가 없었더라면 추워서 연기고 뭐고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컷. 아주 좋습니다. 서배우님.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