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 계약
생각보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신화급 존재와의 계약. 그러나 그것이 예상외로 빠르게 될 것 같자 느긋했던 카리엘이 바빠졌다.
웨어 울프의 강체술을 찾아 시간을 벌고 신화급 존재를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순서가 바뀐 것이다.
‘수르트의 유물이 저주받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강력한 저주 때문인지 황궁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기에 접근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무늬만 황태자였지만 권한 자체는 생각보다 강했다. 황궁 보물 창고 중에 상당히 높은 곳까지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갖고 나오는 건 힘들겠지만 보는 건 가능하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황궁에 남아 있는 수르트의 보물은 세계를 부순 불의 마검도, 거신의 심장도, 무스펠의 정수도 아닌 그저 수르트의 힘이 일부 담겨 있다고 전해지는 목걸이였다.
주신조차 두려워할 만큼 강대했던 그의 힘이 아주 쥐꼬리만큼 담겼다는 목걸이.
그런데 외부로 새어 나오는 저주 수준은 강력하니 보물로썬 가치가 없었다.
그저 한때 신화 시대에 종식을 선언한 존재의 힘이 조금이라도 담겼기에 상징적인 의미로 갖고 있을 뿐.
‘성국이었다면 어디 처박아 놓고 이중 삼중으로 봉인해 놓았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신이 생각보다 꼼꼼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귀한 보물이라면 접근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저주받은 유물이라면 현 상태의 카리엘이라도 충분히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리라.
딸랑!
밖에 있는 시종을 부르는 종소리에 타리온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밖으로 나가겠다.”
“좀 더 쉬셔야 합니다.”
“가볍게 황궁 안에만 좀 돌아볼 생각이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타리온이 한숨과 함께 대답하고는 카리엘을 보며 물었다.
“목적지가 있으십니까?”
“황궁 보고.”
“……예?”
카리엘이 대답에 타리온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갑자기 황궁 보고는 왜……?”
‘내 몸의 회복과 관련 있어.’
카리엘이 입술만 달싹여 답했으나 오랫동안 카리엘을 보필해 온 타리온은 그것을 대번에 알아듣고 눈동자가 떨렸다.
그동안 카리엘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음에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온갖 약을 써서 화기를 억제시키고, 병의 진행을 멈추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평생 마나 활용에 제한을 받으며 병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
‘확실한 건 아니야.’
카리엘의 대답에 타리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보니 카리엘이 답을 찾은 것 같았지만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겨우 며칠 알아본 것으로 답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희망 없이 누워만 있지 않고 이렇게라도 움직이는 것이 대견스럽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준비해.”
“예.”
타리온이 대답과 동시에 밖으로 나가서 카리엘이 외출할 준비를 했다.
몸이 안 좋은 카리엘은 황궁 내를 돌아다니더라도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황태자궁 내에서 잠깐 동안 정원을 구경하더라도 특수 제작된 가마에 올라타야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준비됐습니다.”
타리온이 들어와서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하자 카리엘이 조심스레 걸어 방 밖으로 나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이쿠! 언제나 안전! 안전을…….”
“알았어. 조용히 좀 해.”
옆에서 쫑알대는 타리온에게 면박을 준 카리엘이 한숨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타는 것조차 타리온의 도움을 받아 올라타야 할 정도로 유약한 황태자.
그것이 현재의 카리엘이었다.
‘빌어먹을 몸뚱이.’
카리엘이 이를 갈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장인들이 피와 땀을 갈아 넣어 만든 마차답게 그 흔한 덜컹거리는 느낌도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 전생에 고생 많이 했네.’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전생을 회상했다.
황제가 될 때까지 악착같이 회복에 전념하며 겨우 사람 구실 할 정도로 몸을 회복했다.
물론 그 과정에 타리온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마차는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황궁 보고를 지키는 기사가 경례를 올리며 인사하자 뒤이어 근방에 있는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병약한 황태자라 하더라도 황족은 황족이다.
제국 역사상 최악을 다툴 정도로 무너진 황권과 제대로 된 세력 하나 없는 황태자라 한들 그건 고위 귀족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 뿐.
“전하, 예까진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황궁 보고를 담당하는 내관이 카리엘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카리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뒤늦게 온 것도 모자라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꼴을 보니 카리엘의 심사가 뒤틀렸다.
앞서 설명했듯, 아무리 황권이 끝도 없이 추락 중이라 한들 황족은 황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그에 해당되지 않는 존재들이 일부 있었다.
바로 고위 귀족들이다.
무너지는 황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이 마치 황족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거들먹거리는 자들, 또는 자신이 황족인 양 행동하는 자들이다.
“여기에 오는데 너한테 보고하고 와야 하나?”
카리엘의 물음에 내관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오신다고 기별을 주셨다면 좀 더 성심껏 모셨을 것이라 안타까워…….”
“어느 가문 소속이지?”
카리엘의 물음에 내관이 입을 다물었다.
잘못 말했다간 큰일 날 수도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대답.”
“베, 베리오트 가문의…….”
“황제파군.”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내관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황족이라도 된 양 황족의 권위를 빌려 제국을 좀먹는 쓰레기들.
카리엘의 싸늘한 시선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을 넘기고자, 허리를 숙이고 있지만 표정에선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타리온은 당장이라도 내관을 죽여 버리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카리엘의 앞이기에 참았다.
“타리온.”
“예, 전하.”
“폐하께 이곳 담당자를 바꾸라고 상신해.”
“저, 전하!”
카리엘의 말에 내관이 고개를 벌떡 들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타리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황태자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쳤다. 황권이 강했던 시절이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끄럽군.”
카리엘이 시끄럽다는 듯 손짓하자 타리온이 기다렸다는 듯, 내관을 무릎 꿇렸다.
그러자 뒤이어 시종들이 내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관이 저항하듯 마력을 사용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막혔다.
황태자궁의 시종들은 전부 일반적인 시종들이 아닌 특수한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건방지게 황족에게 소리치고 무례를 범하는 자가 상급 내관이 될 수는 없겠지.”
“그리 상신하겠습니다.”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카리엘이 무릎 꿇은 내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억울한가?”
그의 물음에 내관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당혹스러움만 남아 있을 뿐 두려움이나 다급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 엿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이 순간만 지나가면 없던 일이 될 거라 생각하나?”
이번에도 움찔거리는 내관을 향해 카리엘이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 상신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될 거라 생각하겠지. 힘도 없는 황태자의 의견 따위 묵살될 테니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관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생각이 읽혔다는 듯, 그의 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넌 내가 책임지고 지방으로 좌천시켜 주지. 힘없는 황태자라도 너 하나쯤은 좌천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마.”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내관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짜 × 됐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게 엔간히 해야지. 바쁜 척하면서 늦게 오면 봐줄 줄 알았나? 아니면, 은근슬쩍 무례를 범해도 못 알아먹을 거라고 생각했어?”
카리엘의 물음에 내관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차가 이리로 향하는 걸 알았을 텐데도 바쁜 척하며 뒤늦게 등장하고, 자신을 맞이하는데도 무례를 범한 것.
모두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행위였기에, 상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경고만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조만간 황태자 자리도 걷어찰 판국에 평판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었다.
“감히 황제파를 믿고 황족을 시험하면 어찌 되는지 너를 통해 모두에게 보여 주마.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라, 너를 통해 황권의 지엄함을 알리는 것이니…….”
카리엘이 그 말을 끝으로 황궁 보고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내관이 ‘읍! 읍!’ 하는 소리와 함께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황태자궁의 시종들이 그것을 가만두고 볼 리 없었다.
그렇게 건방진 내관 하나가 카리엘에게 잘못 걸려서 끌려가자 근방에 있던 시종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무시하며 카리엘이 황궁 보고로 들어가자 또 다른 내관이 벌벌 떨면서 다가와 말했다.
“저, 전하, 황궁 보고 안에 있는 보물들은 폐하의 재가가 없으면…….”
내관의 말에 카리엘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무, 물론 태자 전하께오선 보고 안의 보물들을 대여하는 것은 가능하시옵니다! 기, 기준에 따라 4관…… 아니 3관 일부 정도는…….”
“쯧! 그냥 보고만 나올 것이다. 그럼 상관없겠지?”
카리엘의 말에 내관이 벌벌 떨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2, 2관까진 괜찮지만 1관부터는…….”
“알아. 폐하의 보물 창고엔 들어가지 않겠다.”
황궁 보고의 제1관.
오직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고, 황제만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황궁 보고.
그곳만 제외하면 황태자 신분으로 황궁 보고의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여기 있어.”
“예.”
타리온에게 문 앞에서 대기하라는 명령과 함께 거대한 황궁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숨을 헐떡이자, 카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크기의 황궁 보고.
그 안에 잠든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을 보며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황제로 있었을 때, 이곳이 털린 것이 얼마나 아쉬웠던가.
반란, 몬스터 습격, 마족의 침공.
여러 번의 습격에서 황궁 보고는 정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거기다 돈이 없어 내다 판 보물들도 엄청났다.
“많기도 하네.”
황권이 바닥으로 수직 낙하하고 있음에도, 굳건한 황궁 보고를 잠시 감상하던 카리엘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 황족들도 접근이 가능한 4관부터 직계 황족만이 볼 수 있는 3관, 마지막으로 황태자와 황제만이 마음대로 발을 디딜 수 있는 2관까지 도달했다.
“그림자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검은 복면의 사내가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카리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란 본래 그런 것이기에…….
“1관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긴장 풀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정말로 보물들을 구경하러 온 것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는 카리엘에게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곳은 위험하십니다.”
저주받은 무구들만 모아 놓은 특별한 방.
그곳에 진입하려는 자신을 막아서는 그림자를 보며 카리엘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그대는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도록.”
“명!”
카리엘의 명령에 짧게 대답하고는 그 즉시 사라졌다.
그럼 그림자의 모습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세간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림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진짜였고, 차기 황제인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림자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은 카리엘은 저주받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음성이 들려왔다.
-계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