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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8화 (8/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 달라진 황태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저주받은 방.

그곳에서 퍼져 나가는 푸른 빛은 잠시뿐이지만 저주받은 공간을 정화시켰다.

[신화적 존재와의 계약으로 신의 숨겨 놓은 미션을 클리어할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신이 숨겨 놓은 두 번째 시련이 발동됩니다. 저주받은 방에서 나가십시오!]

반투명한 창이 사라지는 순간 잠시 정화되었던 저주의 기운이 카리엘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럽다! 나도 계약해 줘!

-나도 나가고 싶다!

-나랑 계약해!

저주받은 무구들이 카리엘의 정신을 오염시킬 기세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작은 불덩이가 튀어 올랐다.

-어딜 잡것들이!

눈, 코, 입이 생긴 작은 불덩이가 앙증맞은 팔을 꺼내며 휘둘렀다.

그러자 아주 잠시 동안 검은 기운들이 카리엘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수……르트?”

-뭐 해! 빨리 나가!

“목걸이를…….”

카리엘이 봉인 장치를 부수고 목걸이를 꺼내려 하자 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계약했는데 목걸이를 두고 나가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푸른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목걸이를 보며 망설이자 수르트가 다급하게 얘기했다.

-저건 내 힘의 파편 일부에 기생하는 저주만 남아 있다. 내가 너한테 넘어온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자 카리엘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자 절대 안 보내겠다는 듯, 사방에서 무기들이 떨리며 저주의 기운을 뿜어냈다.

-더 빨리!

“이게 한계야!”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가는 카리엘에게 빨리 뛰라고 재촉하는 수르트였지만 이미 카리엘은 한계였다.

푸른 화염이 일시적으로 저주의 기운을 막아 주고는 있었지만 점차 막이 얇아져 가면서 몇몇 저주들이 카리엘에게 몰려들었다.

다행히 몸 밖으로 발산하는 화기에 의해 가로막혔으나 시간문제였다.

그래도 미친 듯이 뛴 덕분인지 저주받은 방의 문이 코앞까지 도달한 상태.

-제길! 이제 한계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저주의 힘에 수르트의 푸른 막이 사라졌다.

그러자 카리엘을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저주의 손길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엄청난 양의 손들이 카리엘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화기들이 저항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양이었기에 화기들이 서서히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끄아아!”

카리엘이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곳에 넘어온 후 처음으로 해 보는 과격한 움직임.

하지만 그 과격한 움직임 덕분에 문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저주의 기운들에 반응한 문이 곧바로 닫히면서 결계를 가동시켰다.

쿠웅!

황궁 보고를 울릴 정도의 소리와 저주받은 개체의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수많은 저주받은 무구를 가둬 둔 방답게 강력한 마법이 저주들을 찍어 눌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어 나오는 저주들.

그 순간 멀리서 나타난 그림자가 저주들을 모조리 베어 냈다.

황궁의 그림자들의 무기라 할 수 있는 검은색의 검이 모든 저주들을 소멸시켜 버리는 순간 카리엘이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헉…… 헉…….”

카리엘이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자 멀리서 그림자가 황급히 다가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림자가 황급히 카리엘에게 다가와서 묻자 지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애초에 혼자 들어가 보려고 했던 게 나다. 그리고 저주받은 무구들을 자극한 것도 나고.”

카리엘이 자책하는 그림자에게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동안 누워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숨이 가다듬어지자 그림자가 카리엘에게 조심히 물었다.

“혹 봉인이 풀린 무구가 있습니까?”

그림자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나온 무구는 없다.”

카리엘이 마치 뒤져 보라는 듯, 양팔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림자가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뭣하면 나중에 저기에 들어가 확인해 보거라.”

카리엘의 말에 그림자가 멈칫했으나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러다 입을 달싹이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본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 보고해도 된다.”

그림자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를 안 카리엘의 배려에 그림자의 두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귀족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상관없으니 본분을 다하라.”

그림자들은 황제의 비밀 친위대나 마찬가지다.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존재들.

하지만 현 황제는 썩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의심병 말기에, 능력은 없고, 뭔가 해 보려는 의지도 없는 쓰레기.

그것이 황제에 대한 카리엘의 평가였다.

능력은 없는 주제에 혹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을까 의심은 많은 양반이니 황제파를 이용해 카리엘을 시험해 볼 것은 당연했다.

“귀찮아지겠군.”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황궁 보고를 나섰다.

황족들이 접근 가능한 3관의 보물을 보면서 걷던 카리엘이 혀를 찼다.

‘이 보물들만 잘 활용했어도 황권이 이 정도로 박살 나지 않았을 텐데.’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황제의 재능이 그저 평범한 수준, 아니 평범 이하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의심병만 없었다면 제국이 이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의심병만 없었어도 나라가 이 꼴이 나지는 않았겠지.’

카리엘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대에 걸친 암군 때문에 드높았던 제국의 위상은 박살이 났다.

그것을 증명하듯 예전이었다면 감히 목소리도 내지 못했을 주변 왕국들이 제국에 깝죽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은 그나마 나았다.

카리엘이 황제에 올랐을 때는 주변 왕국들이 미쳐서 감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역시 이 나라는 답이 없어.”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4관을 지날 때쯤 발걸음을 멈췄다.

[시련을 통과해 정식으로 신의 임무가 주어집니다.]

[신화적 존재들과 계약하기 : 멸망의 마신 (클리어)]

[남은 신화적 존재 : 태양을 삼킨 마수, 지옥의 문지기, 불의 정령왕의 파편.]

저주받은 방을 빠져나오자 생긴 반투명한 창.

시련을 통과했다는 말과 함께 생긴 신의 임무.

만약 카리엘이 사제였다면 신의 임무를 받았다고 좋아했겠지만 그는 신을 증오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면 죽빵부터 갈길 만큼.

문제는 그다음에 나타난 창이었다.

[임무 완료 시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 줍니다.

※이번엔 사기 안 칩니다.]

중요 표시까지 해서 강조한 글자들.

비록 한 가지뿐이지만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것은 굉장했다.

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소원이든 이뤄 준다는 뜻이었으니.

“흠…….”

카리엘이 반투명한 창을 보고 고민하자 작은 불덩이 모습으로 나타난 수르트가 카리엘의 옆으로 다가왔다.

-뭔데?

카리엘이 허공을 바라보고 멍하니 서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은 수르트.

그런 그에게 반투명한 창에 대해 설명했다.

-흠…… 또 사기 치는 거 같은데?

“그렇지?”

카리엘이 수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기꾼이 사기를 안 친다고 말하는 걸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수르트와 카리엘이 서로를 바라보며 신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순간.

반투명한 창이 싹 사라지면서 장문의 글이 적힌 창이 생겨났다.

[엄마 보고 싶지 않아?

동생들은? 아니면, 대륙 제패는 어때?

뭐든 말만 해. 이뤄 줄게.

대신 계약만 해.

솔직히 진짜 쉬운 조건이다.

그냥 시간 날 때 찾아서 계약하면 끝이잖아?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계약만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

이거 거저먹으라고 주는 거야.

그동안 고생했으니 거저먹는 임무 하나 완료해서 소원 빌어 봐♥]

사짜 느낌이 가득한 글을 읽은 카리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것을 본 수르트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내용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딱 봐도 사기꾼이네.

“그렇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어딘가 꺼림칙한 신의 메시지를 무시하고선 황궁 보고를 나서려 할 때였다.

-흠, 근데 여유가 된다면 계약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긴 해.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사실 정령왕의 파편 말고는 다 불쌍한 놈들이거든.

“음?”

-신들에게 마수로 몰려서 불쌍한 삶을 살다가 봉인당한 놈들이라……. 아는 놈들이라 웬만하면 해방시켜 주면 좋을 것 같긴 해.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신화 시대에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말해 주었다.

신들에게 사기당한 마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설명하며, 자신이 있던 무스펠헤임에서도 당한 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결국 끝에는 신들을 욕하는 것으로 끝맺음한 수르트를 보며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물론 강요는 아니야. 그냥 여유가 되면 해 볼 만하다 그거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수르트를 보며 카리엘이 고민에 빠지자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생겨났다.

[임무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임무 실패에 대한 페널티는 없나? 병이 악화되든가 뭐 그런…….”

[없습니다!]

카리엘의 중얼거림에 곧바로 떠오른 반투명한 창.

그것을 보면서 더 의심이 갔지만 페널티도 없다면 딱히 안 할 이유도 없긴 했다.

수르트의 말처럼 여유가 되면 해 보고, 어려우면 포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하지 뭐.’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Yes’를 누른 순간 반투명한 창이 사라졌다.

[당사자의 수락에 신들의 내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임무를 실패해도 당사자 개인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는 없습니다. 단! 주변에 임무 실패에 대한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하시길!]

“……영향?”

카리엘이 표정을 구기면서 물었지만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사라져 버린 반투명한 창.

그것을 본 카리엘이 찝찝한 표정으로 황궁 보고를 나섰다.

“뭐지?”

황궁 보고의 문을 나서자 다수의 황궁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황제의 궁에 근무하는 내관들과 시종들이 다수가 모여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카리엘이 나오자마자 인사하는 그들.

그런 그들에게 카리엘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지. 무슨 일로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

그의 물음에 대표로 보이는 늙은 내관이 말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유는?”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묻자 그들이 움찔했다.

황제의 이름을 팔았음에도 이유를 물었기 때문이다.

“황궁 보고에 관련된 일이옵니다. 폐하께서 찾으시니 속히 가 주셔야겠습니다.”

“폐하께서 명령하셨다는 명령서가 있나?”

카리엘의 물음에 늙은 내관이 움찔했다.

“구두로 전하셨습니다.”

“구두로 하셨어도 그것을 받아 적는 내관은 있을 터. 그게 아니라면 시종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간이 명령서라도 있을 터인데?”

황제의 명령.

그것은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더라도 명령서가 만들어진다.

황제의 도장이 찍힌 정식 명령서가 아니라도 오직 황제를 모시는 자들만이 사용하는 명령서로 만들어져 사용된다.

물론 암군들이 연이어 제위에 오르면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개인적인 명령은 그냥 구두로 전하곤 하지만 황실 법도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그것이…….”

젊은 내관도 아니고 경험 많은 내관이 이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면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림자에게 보고받자마자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다급하게 왔나 보군.’

느긋하게 황궁 보고를 구경하며 걸어 나온 사이 앞을 지키고 선 내관들을 보며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폐하의 명령을 사칭하는가?”

“아, 아니옵니다!”

사칭이라는 말에 늙은 내관이 화들짝 놀랐다.

“내 지금 당장 폐하께 가서 확인하겠다. 만약 아니라면 폐하를 사칭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여도 그대들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이니 죄를 물을 것이다.”

카리엘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으나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최근 내 행보가 이상하니 이쯤에서 기를 죽여 놓겠다?’

카리엘이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밴댕이보다 작은 마음을 가진 황제를 생각하며 카리엘이 일부러 무게를 잡고 타리온에게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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