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 어느 줄을 잡아야 하나?
황제파를 박살 낸 황태자가 이번에는 방향을 틀어 귀족파와 중립파를 향해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이 황제를 만난 이후라는 것이 문제였다.
중립파와 귀족파를 치는 것에 황제가 동의했다는 것.
정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중요시하는 현 황제이기에 이런 결단을 내릴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귀족파와 중립파까지도 불똥이 튈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다.
「또다시 움직이는 감찰부.」
「감찰청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어디까지?」
황제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감찰부였다.
그동안 모은 증거들을 토대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치안부와 같이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귀족파?」
「중립파도 맞는다!」
「귀족파 중립파 할 것 없이 때리는 황태자.」
「황태자의 비리 척결에 환호하는 제국민들!」
「칼춤 추는 황태자. 백성들에겐 환호가! 귀족들에겐 곡소리가?」
새벽에 발행된 광장에 뿌려진 신문들을 보면서 제국민들.
귀족파와 중립파가 정신없이 맞고 있자, 고위 귀족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자신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었다.
명분을 쥐고 있는 황태자가 황제의 명까지 받고 움직이고 있으니 섣부르게 건들 수가 없는 것이다.
수도의 많은 귀족들이 상소들을 보냈지만 반려되었고, 황제파에 말려 달라고 서신을 보내 봤지만 그들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우리도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 봐야지?’
황제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얌전히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쏟아지는 비는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최대한 몸을 사리고 비리의 흔적들을 지워 보려 했으나, 감찰부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동안 뇌물을 받아먹고 눈감아 주던 감찰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빨랐다.
“상소가 반려되었소.”
“후, 그렇다면 고위 귀족의 회담이 있기 전까진 얌전히 맞을 수밖에 없겠군.”
젊은 귀족의 말에 노귀족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상소가 반려되었다면 일단 때릴 거 다 때리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고위 귀족들이 단체로 반발하지 않는 이상 명분을 쥔 황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귀족파 출신의 귀족들이 상소가 반려되자 삼삼오오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물론 모여서 논의한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고위 귀족들이 모여야 한다!’
모든 귀족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중립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균형을 맞추시려는 것 같군.”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로 변경백들이 모일지가…….”
중립파 귀족들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족파의 경우 이권이 달린 문제에는 공작들도 모이곤 하지만, 중립파는 아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목적으로 모인 중립파의 핵심은 변경백과 감찰부 같은 곳이었다.
문제는 감찰부는 황태자의 명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변경백들은 타국을 견제하느라 바빴다.
타국의 첩자들까지 잡았으니 변경백들은 더 기뻐할지도 모를 일이다.
“미치겠군.”
중립파의 한 귀족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나 귀족파, 중립파 할 것 없이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황제파는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그동안 열심히 맞기만 했던 그들이었지만 쭉정이들만 나가떨어지고 살 사람은 살았으니 웃으면서 귀족파와 중립파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구경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거 참, 곤란하군. 폐하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시네.”
“하지만…….”
“좀만 기다려 보게. 일단 황궁 내의 일을 수습했으니 폐하께서도 진노를 가라앉히고 자비를 베푸실 걸세.”
답답한 마음에 재상에게 찾아온 하위 귀족들.
귀족파, 중립파 할 것 없이 죄다 재상에게 찾아와 하소연했다.
전부 수도에서 돈 좀 벌어 보고자 범죄 조직들과 결탁한 이들이었다.
“여기들 계셨군요.”
수도 감찰부장이 직접 재상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모여 있는 하위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죄다 남작이나 자작급에 불과한 귀족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감찰부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눈짓하자 치안대원들이 하나둘 귀족들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재상이 눈을 찌푸렸다.
“무례하군.”
“전하께서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잡아 오라 명하셨습니다.”
“크흠! 아무리 그렇다 해도…….”
“폐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균형을 맞추라 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감찰부장이 황제를 들먹이면서 말하자 재상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감찰부에서 나온 인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재상이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폐하께서 약조하신 바가 있으니 망정이지…….”
망나니처럼 날뛰는 황태자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감찰부와 치안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식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선에선 분명히 멈추긴 해야 했다.
황제파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자신도 귀족이었다.
그렇기에 황족들이 너무 귀족들을 공격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중재해야 할까…….”
무솔리니가 골치 아파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직 어린 황태자였고, 그동안 딱히 어떤 행보를 보인 적이 없었기에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젊은 혈기에 미친 듯이 날뛰는 황태자를 막기 위해 어떤 것을 던져 줘야 할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중재를 시도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황제파라고 딱히 봐주는 것도 없는 황태자이기에 더욱 막막했다.
그래도 경험을 꽁으로 처먹은 건 아니기에 나름대로 방안을 강구하며 어느 시점에서 중재안을 들이밀지 계획을 세워 나갈 수는 있었다.
문제는 무솔리니의 이런 생각을 읽고 있는 카리엘이었다.
“타리온.”
“예.”
“슬슬 장작 좀 넣어 줘야겠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귀족파와 중립파를 전방위로 때리면서 황제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슬그머니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황제파가 비리 척결을 외친다라…….”
엄청나게 쏟아지는 중립파와 귀족파의 비리들을 보면서 황제파가 황궁에서 비리 척결을 외치고 있었다.
이참에 밀렸던 세력을 최대한 맞춰 보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카리엘이 원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다음 날, 장작을 넣으러 나간 타리온에 의해 제국의 수도는 활활 타올랐다.
「충격! 타국과 거래를 한 ××귀족! 제국의 어린아이를 노예로 팔다?」
「국가에 보고하지 않는 금광. 몰래 타국과 나눠 먹은 ××××귀족!」
「중립파에 속한 하위 귀족. 변경에 위치한 군사기밀 타국에 팔아먹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힘든 작은 신문사가 발행한 신문들이 광장에 뿌려지고, 그것을 본 제국민들은 경악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선을 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소불위한 것처럼 움직이는 귀족들이라도 선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발표된 것들은 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재상, 이건 우리 귀족파에 대한 선전포고라도 봐도 되겠소?”
“……공작, 우리가 아니오.”
새벽같이 찾아온 월크셔 공작이 싸늘한 표정으로 재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월크셔 공작이 마법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살기를 내뿜으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재상, 그럼 중립파가 우리를 쳤을까?”
월크셔 공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재상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재상을 찾아온 또 한 명의 고위 귀족이 방문했다.
“……모건 후작.”
상인 출신으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제국의 모든 파벌에 물건을 팔아먹은 돈귀신.
그가 딱 봐도 분노한 표정으로 재상을 향해 걸어왔다.
“돈을 받아먹었으면 입을 단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건 후작의 모욕적인 말에 재상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을 열진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파와 중립파의 큼지막한 비리를 덮는 대가로 받아먹은 게 얼마던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깐다?
당연히 대가를 지불한 입장에서는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덮어 보겠소.”
재상이 치욕을 무릅쓰고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월크셔 공작과 모건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만 봐도 치욕스러움이 느껴졌으나 고개까지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재상이 관여한 건 아니군.’
‘쯧! 한번 물러나 줘야 하나?’
공작과 후작이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어 보겠소.”
“조속히 처리해 주십쇼. 받은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이비어 공작과 모건 후작의 말에 재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
얼마 후, 세 파벌의 수뇌부가 모였다는 사실이 황궁에 퍼지면서 카리엘의 귀에도 들려왔다.
“곧 끝날 거라 본다고?”
“그렇습니다.”
황궁에서 각 파벌의 수장급이 회담을 가진 것을 보고한 타리온이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카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꿈이 야무지네?”
세 파벌의 수뇌부가 만났으니 이제 이 지옥 같은 시간도 끝나리라 생각한 귀족들.
하지만 카리엘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자! 그럼 일을 좀 더 키워 볼까?”
“전하, 너무 빠르게 일을 키우면 위험하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이번이 끝이야. 더 할 필요도 없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면 저들이 알아서 개처럼 싸워 줄 것이다.
그럼 자신은 그것을 보면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카리엘이 웃으면서 미친 듯이 싸울 귀족들을 생각했다.
“아! 행복하네.”
전생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이 골머리를 싸매는 상황을 상상하니 너무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루라도 빨리 이 황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범인인지 모르고, 또 세력도 없으니 이렇게 여유로운 것이다.
자신의 세력이 강해져서, 암수를 쓴 자가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적당히 치고 빠져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태자 자리를 던져 버릴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해 나갔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머지않아 이 지긋지긋한 황태자라는 굴레를 벗어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귀족들의 개싸움을 보며 카리엘이 행복해할 때,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 귀족, 남부 연합과 마약을 두고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 황궁에도 밀반입? 최소 백작급 이상으로 추정」
수뇌부의 합의로 다 끝나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또다시 엄청난 것이 터져 나왔다.
백작급 이상이 연루된 사건.
아직 정식으로 감찰부가 조사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지만 이런 시기에 구체적인 정황들이 광장 게시판에 떡하니 적혀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찾았나?”
감찰총장의 물음에 부하 직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난리 났군.”
포돌스키가 그렇게 말하면서 부하에게 물러나라고 명하고는 담배를 물었다.
“잔인하기도 하시지…….”
포돌스키가 이 일을 주도한 이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기회를 받은 재상이 온 힘을 발휘해 봉합해 가려는 그때, 이 일이 터져 나왔으니 이젠 전쟁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처럼 귀족파가 황제파를 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암투가 시작되려 하자 몇몇 눈치 빠른 하위 귀족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립파로 갈아타야 하나?”
“괜히 쥐어 터지는 건 우리라고. 일단 안전한 중립파라도…….”
하위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할 때, 감찰부가 움직였다.
「군사기밀을 팔아먹은 귀족. 연루된 자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정황을 발견했다. 철저히 수사하겠다.」
감찰부의 발표를 본 순간, 대부분의 하위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느 줄을 타야 하지?”